37화

정승원 감독이 이제야 이해성 스카우트가 맡아놓은 자리에 와서 앉자, 이해성 스카우트가 팔짝 뛰었다.
"아이! 왜 이제 오셨어요?"
"아··· 뭐, 할 게 좀 있어서. 경기는?"
이해성 스카우트는 킬 스코어가 적힌 전광판을 가리켰다.
[ 오인사격 0 : 3 반달곰들 ]
"쯧. 역시 기우라한테는 안 되나 봐요."
"제너러?"
"네. 처음엔 [ 콩르트 아따끄 ]를 무빙만으로 피하길래 일 벌이나 싶었는데 그 뒤론 뭐 없네요. 괜히 제너러가 죽는 바람에 미드에서 좋은 싸움이 시들어버렸기도 했고요."
정승원 감독은 제너러의 0/3/0이라는 킬뎃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죽음을 잘 면하고도 계속 박았구먼."
"네. 한번 잘 피하고 난 다음에 무난하게 라인전 했더라면 저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 뒤로 계속 박았어요."
"4렙에 한 번, 5렙에 또 한 번, 6렙에 지치지도 않고 또 한 번."
"정확합니다."
정승원 감독은 잠시 말없이 전체적인 게임의 흐름을 지켜봤다.
라인전 양상, 각 타워의 체력 그리고 크레이드가 남겻던 말까지.
"지겠네."
"그렇죠. 무난하게 지겠죠. 곧 탑 1차 타워 부서지고. 기우라 막으려고 두세 명씩 자원 투자하면 반달곰들은 다른 곳에서 이득 챙기면서 죽음의 이지선다에 걸리겠죠."
이해성 스카우트는 그제야 무언갈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금 보니까 저 두 팀 많이 닮았네요?"
"하하! 게임보는 눈이 조금 늘었네?"
"누가 매일 같이 야근시키는 바람에 그렇죠."
정승원 감독은 이해성 스카우트의 어깨를 톡치며 말했다.
"저 둘이 비슷한 느낌인 건 탑이 가장 피지컬이 좋아서 그래. 당연히 잘하는 선수를 위주로 전술과 전략을 짤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이미 끝난 거 아니에요"
"왜?"
"왜긴요. 감독님 말대로라면 결국 탑이 이기는 팀이 게임을 이기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
경기는 이해성 스카우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탑 주도권을 이용한 죽음의 이지선다를 계속해서 내미는 반달곰들과 연명하기에 급급한 오인사격.
경기가 끝나갈 때쯤 울리는 정승원 감독의 핸드폰.
= 성원성) 나중에 밥 사는 겁니다.
정승원 감독은 메시지를 확인하곤 짧은 한숨을 내쉬며 머릴 쥐어짜는 순간 울리는 해설진의 목소리.
"렉서스가 파괴되면서 1세트! 반달곰들이 가져갑니다!"
킬 스코어는 오인사격 12 : 19 반달곰들.
경기 시간은 39분.
이해성 스카우트는 걱정되는 마음에 바라본 정승원 감독의 알 수 없는 표정에 오히려 본인이 당황했다.
처음 보는 표정.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그 표정으로 정승원 감독은 짧은 독백을 내뱉었다.
"진짜 네 말대로 됐네···. 나도 이젠 모르겠다."
***
"하하! 그래.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보자고."
송재림 감독이 화장실을 완전히 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구교환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요? 우린 어디까지 얘기했죠?"
화장실 변기 칸 한 곳에 문을 열고 정승원 감독이 나왔다.
"크흠. 우리 팀에 너를 넣고 싶다고."
"감독님 팀은 신생팀이라 하셨죠?"
"그래. 서울 아카데미아 타이거즈. 이번 시즌부터 2부에서 스타팅하는 팀이야."
"바로 현역으로 뛸 수 있는 건가요?"
"바로 뛸 수 있고말고. 대신 조건이 있어."
"컵 대회 우승이라는 조건이요?"
"그래. 그래야 널 구단에 넣을 수 있는 설득력이 생겨. 아무런 커리어도 없는 선수한테 돈을 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구교환은 이마를 쓸며 말했다.
"쓰읍··· 그러면 지금 부정행위 같은 걸 하시려고 온 건가요?"
"그럴 리가! 난 그냥 똥 싸러 왔는데 마침 네가 있던 거야."
"근데 아무런 도움도 안 주실 거면서 우승해야 한다고 왜 말씀하셨어요? 그냥 볼일 보시지."
"아니, 고민이 되게 많아 보이길래. 그냥 힘내라고. 널 기다리는 팀이, 지켜보는 팀이 있다고 동기부여 좀 해줄까 해서. 말 건 거지. "
"해주실 거면 제대로 해주세요."
"뭐를?"
구교환은 음흉한 눈빛으로 방금 받은 송재림 감독의 명함을 보여줬다.
"동.기.부.여."
구교환의 눈빛에서 정승원 감독은 젊을 적 보았던 송재림 감독이 재림한 줄 알았다.
"뭐··· 정보를 달라는 거야?"
구됴환은 살짝 화장실 문을 열어 틈으로 팀원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김수하와 정한진이 송재림 감독과 이야기하는 걸 확인했다.
"저분도 사람 건드는 것 같은데.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요."
정승원 감독은 그냥 좋은 리더의 상인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다른 크레이드의 이미지에 조금 당황했다.
'생각보다 교활한 느낌이야.'
교활.
사실 그 단어보다 더한 놈이었다는 걸 정승원 감독이 알게 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달곰들의 전략은 너희랑 비슷해. 하지만 제너러가 기우라를 이길 순 없지. 어쨌든 기우라를 말리게 하는 게 승리 조건이나 다름없는데. 무조건 기우라를 말리게 할 수 있는···."
"아니, 게임에 대한 건 괜찮아요. 이미 다 아니까."
구교환은 정승원 감독의 말을 끊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그~송재림 감독님. 맞죠? 이름? 그 분의 상황 좀 알려주세요."
"상...황?"
"선수들과의 관계, 선수를 어떻게 대하는지, 가족관계, 현재 욜 씬에서 감독으로써의 위치 등등."
"그런 걸 알아서 뭐 하게?"
"뭘 얘기해주시냐에 따라 다르죠."
정승원 감독은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넌 송 감독님에 대해 뭘 알고 있는데?"
"모르니까 물어보는 겁니다."
"경기에 이기려면 게임만 잘하고, 전략만 잘 짜면 되지 그런거까지 알아야 하냐?"
"게임은 곧 잘하고, 전략은 다 알아서요."
"뭐 얼마나 아는데."
구교환이 정승원 감독의 질문을 AI처럼 술술 답하기 시작했다.
"······ 그렇게 하려고요."
구교환의 말이 끝났을 때 정승원 감독은 다짐했다. 이미지가 어떻든, 성격이 어떻든, 연봉이 어떻든 이 자는 무조건 영입하기로.
다만.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걸 알고 싶은 건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건 전쟁이잖아요."
구교환과 친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늘었다.
"하아··· 송 감독님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칭찬은 아닌 거 같은데요?"
"당연히 아니지! 근데 같이 원하는 선수 앞에서 송 감독님 얘기하는 건 너무 상도덕에 어긋나서 안 돼."
"그럼, 제가 물어봐서 대답해 줬을 뿐인 건 괜찮죠?"
정승원 감독이 아무런 제스처도 말도 없자, 구교환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왜 동한 베어스 감독님이 제대로 계약도 안 된 프로연습생 팀에 목메는 겁니까?"
"목메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고, 계약 안 된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계약은 최현...아니, 같은 팀의 제너러 선수 때문에 알았죠. 목메는 건 방금 누가 봐도 그래 보이지 않았나요?"
"그건 그렇지."
조금은 고민하다 입을 여는 정승원 감독.
"감독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회사원이야. 어쩌면 더 하지. 실적이 있어야 한다고. 이번 시즌 동한 베어스 몇 위인지 아니?"
"12개 팀 중 4위."
"그래 4위. 4위도 잘한 거지. 잘했지만 구단에 있어서 평가란 상대 평가도 절대 평가도 아닌 과거 평가거든."
"전전 시즌 동한 베어스는 1위였죠."
"그래. 그래서 이거라도 1위를 해야 명분이 있지."
"무슨 명분이요?"
"리빌딩할 명분."
"리빌딩?"
구교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4위 팀을 리빌딩한다고요?"
"어. 자세한 건 얘기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래."
"음··· 추측건데 송 감독님은 동한 베어스의 4위 추락의 이유를 선수 탓으로 돌리고 싶으신가 보네요?"
정승원 감독은 알아차린 게 놀랍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송 감독님이 굉장히 선수를 험하게 다룰 것 같다는 제 생각은 맞나요?"
"험하다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
"흠··· 선수를 기계처럼 다룬다. 뭐 그렇게 표현한다면요?"
정승원 감독은 자신의 입술을 지퍼 잠그듯 손짓했다.
"오케이."
크레이드가 가만히 먼 산만 바라보기를 수 분.
뭔가 불길한 생각이 떠오른 듯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정승원 감독을 바라봤다.
"그럼 뭐 하나만 도와주실래요?"
"뭘?! 무섭게 왜 그래?"
"어차피 감독님은 제가 1위를 하길 바라시는 건데, 송 감독님이 제 팀원들한테 상도덕적으로 어긋난 일을 하신 거잖아요?"
"그래서? 너도 하겠다고?"
"당연하죠. 이건 전쟁인데."
"야이!"
"일단 저희는 1세트를 질 거예요. 최대한 늦게."
"뭐?"
"일부로 지는 건 아니에요. 다만 아마 100%로 지겠죠. 그다음에 제가 아까 말한 전략을 꺼낼 건데 그 전략은 아시다시피 일회용이죠. 물론 송 감독님이 경기장에 있다는 가정하에."
"하아··· 그러니까 네 말은 송 감독님을경기장 밖으로 좀 빼달라? 무슨 수로?"
"동한 베어스 선수 중 한 명이 갑자기 SNS에 폭로한다면 어떨까요?"
"미쳤구나?"
"어차피 사이 안 좋을 거 아니에요. 뭐, 감독님이 굳이 뭘 하실 필요 없어요. 감독님은 그냥 동한 베어스에서 나올 선수에게 따스한 밥 한 끼 사준 것뿐."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저 정보들을 가지고 저런 짓을 할 생각을 하는지.
정승원 감독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아니, 이미 나오고 있다. 이 미친놈에게 잘못 물린 건 아닌가 후회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엿이나 먹으라며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지만.
자꾸만.
자꾸만 떠오른다.
크레이드가 있는 자신의 팀이.
끌린다.
저 악마 같은 두뇌가.
미친다.
끓어오른다.
저 판을 짜는 능력에.
"누구 하나 죽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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