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고작 이딴 전략에 두 세트나 내줬어?! 뭐한 거야 너희들은!"
반달곰들의 대기실.
3세트를 패배한 코치진과 선수들 모두 땅만 내려다볼 뿐. 아무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다.
"기우라가 미드로 가는 건 누구 생각이냐?"
모두가 눈치만 보던 중 한 남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커다란 덩치. 각진 얼굴. 짧은 스포츠머리에 눈을 뜬 건지 아닌지 모를 실눈의 남자.
송재림은 그를 보며 말했다.
"너야? 기우라 네가 직접 생각한 거 맞아?"
기우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재림은 기우라의 코 앞까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가, 니 보고 생각하라 했나? 시키는 대로만 하라 안 했나. 와 안 하던 짓을 하노?"
기우라는 송재림 감독의 압박에도 눈 깜짝 한 번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와 그랬노? 니는 피지컬만 좋고 머리가 텅 비었으니까 운영할 생각도, 맵리딩도 하지 말라 캤다. 아이가."
-끄덕
"근데 와 그랬냐꼬!"
기우라는 또 말없이 송 감독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기고 싶었다꼬? 하아··· 그라믄 시키는 대로 좀 해라. 으이! "
송 감독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와 불이 붙었노. 제너러 때문이가? 항상 이기던 놈이 와? 무습나?"
기우라는 1세트에서 느꼈던 제너러의 피지컬, 그의 무빙, 기세.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그의 성장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송 감독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우라의 눈동자를 읽고는 되물었다.
"부러··· 하아··· . 부럽다고? 뭐가?"
그러자 굳게 닫혀있던 기우라가 입을 열었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
동한 베어스에 들어온 뒤 계속해서 감독의 작전을 수행하는 로봇처럼 플레이하는 동안.
동한 베어스를 나간 제너러는 스스로 성장했다.
부럽다.
제너러의 생동감이, 자유가.
그의 열정과 불타오름이.
반대편 대기실에 있던 제너러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우라의 재능이, 피지컬이 부러웠던 제너러는 송 감독이 왔다는 것을 모른 채 스왑 전략을 좀 더 완벽하게 다듬기 위해 브리핑하던 구교환의 말을 끊었다.
"안 할래요."
구교환은 말을 끊었음에도,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던 스왑 전략을 하기 싫다는 충격적인 말에도 별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이동하가 의문을 품었다.
"왜··· 지금 잘 통하는 전략을 굳이··· 안 하려는 거야···."
최현준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겁쟁이잖아."
"겁...쟁이?"
"내가 대회에 나온 이유는 기우라를 잡고 싶어서란 말이에요. 동한 베어스가 아닌 스스로 강해져서 최현준으로서 이기고 싶다고요. 그래서 보여주고 싶다고요. 난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아니라 기우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다고요."
정한진이 말했다.
"이기고 있잖아! 2 대 1 이라고! 앞으로 한 경기만 이기면 되는데 왜 그래?"
"스왑 전략은 내 실력으로 이기는 게 아니잖아! 난 내 실력으로 이기고 싶다고."
"전략과 운영도 실력이야!"
"그건 내 실력이 아니지! 네 실력도 아니고, 동하 형 실력도 아니지. 그건."
최현준은 말을 끝맺는 대신 날 바라봤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정석대로. 기우라랑 라인전하게 해줘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자신이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기우라를 이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신을 무시했던, 자신을 내쳤던 동한 베어스에게 너희는 틀렸다고 얼마나 외치고 싶은지.
그리고 이 세상에게 얼마나 인정받고 싶은지.
그때의 내가 그와 같았기에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마르크의 얼굴이 보인 그때 내 안에 끓어오르던 건
자존심
그 세 글자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가.
하지만
"그래. 그럼, 원래대로 하자."
팀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전원이 들어가지 않은 로봇처럼 가만히 있던 김수하도.
의견을 제시했던 최현준 본인조차도.
동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괜찮...겠어?"
한진이는 내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형! ······"
그래도 내 말을 따라주려는 듯 둘 다 반문은 하지 않았다.
고맙다.
항상 전략에 대해서 나 혼자 생각하고 내 멋대로 진행시킴에도 왜 그렇게 해야 하냐는 의문 없이 따라와 준 이들에게.
그 믿음에 이제 내가 선물을 줄 차례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이요?"
***
"오인사격 팀 스탠바이할게요!"
무대로 올라가는 우릴 반기는 함성과 해설진의 격양된 목소리.
"욜 챌린저스 컵 대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4세트가 지금 시작됩니다!"
밴픽이 시작되자, 송 감독이 해드셋을 끼고 선수들이 있는 부스로 들어왔고.
해설진은 그 광경을 보며 흥분했다.
"아! 이번엔 반달곰들 측 감독이 들어왔습니다! 익숙한 얼굴이죠."
"동한 베어스의 송재림 감독이군요."
"반달곰들은 동한 베어스 산하의 팀이니까요. 감독의 영향력이 밴픽 양상을 얼마나 바꿀지 기대가 됩니다."
구교환은 상대편 부스 안에 있는 송 감독을 보곤 놀랐다.
'벌써 왔어?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어. 아니, 오히려 좋아.'
송 감독은 반달곰들 선수들 뒤에서 밴픽을 조율했다.
"언노페부터 밴한다."
언노페 Banned
언노페가 밴되자 어차피 이번 경기에선 언노페를 할 생각이 없었던 구교환은 미소 지었다.
호걸 Banned
'일단 발을 자른다.'
최대한 최현준의 싸움에 방해되는 픽은 밴하기로 했다.
"호걸? 플뢰레가 아니라?"
송 감독은 반대편에 보이는 크레이드를 살짝 바라봤다.
"흠··· 또 무슨 이상한 묘수를 두려고. 채플랭크 밴해라."
채플랭크 Banned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가슴을 쓸어 넘기는 구교환.
브레이브즈 Banned
"또 정글?"
크레이드는 아마추어 대회에 그것도 결승전에 스왑 전략을 들고 오는 책략가다.
한 번의 밴픽 실수가 경기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것 정도는 송 감독도 알고 있었다.
벨베어 Banned
'먹혀들었다.'
구교환은 그리 생각했다.
두 번의 스왑 전략. 그리고 그 전략이 통했기 때문에 상대는 위축된 밴픽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밴이 끝나면 서로 세 번의 픽을 할 차례다.
'기우라의 플뢰레는 위험하다.'
1세트에서 느꼈던 서늘함이 있다.
기우라의 플뢰레는 지금껏 만났던 플뢰레와 궤를 달리했다.
분명 플뢰레를 밴하지 않으면 무조건 플뢰레를 픽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브랜스웨이트 7세 Banned
밴할 수 없었다.
반달곰들은 차례가 오자마자 플뢰레를 픽하진 않았다.
분명 플뢰레는 좋은 픽이고 그 외에 좋은 픽이 많이 남은 상황이지만, 크레이드의 2, 3세트에 보여준 스왑 전략에 관한 이해도가 송 감독을 망설이게 했다.
'도대체 무슨 전략일꼬. 무슨 전략이길래 우리 기우라를 마음껏 춤출 수 있게 내버려두는기고 . 제너러는 기우라를 이길 수 없는 걸 모르나?'
송 감독은 지금까지의 밴을 차근차근 뜯어보기 시작했다.
'정글 세 개··· 무난하게 좋은 용리가 풀려있네. 첫 픽이 우리라는 걸 모르진 않을 터. 플뢰레를 풀어줄 테니 용리를 내놓아라?'
송 감독은 무브다운의 용리를 다루던 솜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무브다운이 용리를 다루는 데엔 탑급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만약 용리를 가져간다면 상대는 브레이브즈를 픽하겠지. 브레이브즈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아. 그에 반해 기우라가 쓰면 좋은 탑 챔피언은 플뢰레 말고도 많다.'
픽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송 감독은 어느새 최선을 다하는 자신에 웃음이 나왔다.
'흥! 꼬맹이 하나 때문에 이 정도로 골머리를 썩이다니.'
"용리를 가져온다!"
기우라는 송 감독의 지시에 아무 말 없이 용리를 픽했다.
용리 Pick
그러나 그런 견제가 무색하게 오인사격의 픽을 보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데비 Pick 호지르 Pick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는 거냐? 자존심에 이성을 잃다니, 어찌 되어도 애새끼는 애새끼구먼."
송 감독은 모르고 있다.
플뢰레를 밴하지 않은 건 순전히 최현준이란 사람을 위한 배려.
구교환은 데비를 픽해주며 최현준을 향해 소리쳤다.
"마음껏 해라!"
팀원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것 또한 리더의 덕목.
개인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것 또한 관계의 책임.
그 자존심으로 잃는다 하여도 챙기고 싶은 것이라면 마음껏 발산해라.
「 대신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너의 것임을 잊지 마라. 지구인. 」
다만 이 마음에.
최현준의 마음에 과연 그는 답해줄 것인가.
기우라의 픽 순서.
송 감독은 제너러의 데비 픽을 보곤 곧바로 플뢰레를 입에 담으려다 멈칫했다.
'자아가 남은 팀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에 쓴소릴 하지 못했을 경우의 수. 그 경우의 수 때문에 지금의 픽이 형성된 것이라면?'
그런 경우의 수는 진작에 지웠다.
크레이드가 제너러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2, 3세트에 나왔던 스왑도 나오지 않았을 거다.
'계략이 있다. 무난한 픽으로 가서 좀 더 상황을 본다.'
"갸르를 픽해라."
···.
송 감독의 지시에도 전광판엔 갸르의 초상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송출 오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깎이는 픽 시간에 기우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건 기우라의 비장한 표정과 플뢰레에 가 있는 마우스 커서.
"너!"
플뢰레 Pick
""와아!!""
밴픽을 보며 흥분하는 관중과 해설진.
"탑 챔피언이 1세트와 똑같네요!"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는 것 같네요!"
"과연 1세트처럼 기우라 선수에게 지게 될지. 아니면 복수에 성공할지!"
송 감독은 부스 밖 흥분한 관중과 대비되게 평온한 표정으로 기우라를 쳐다봤다.
"이 대회가 끝나면 넌 아웃이다."
반달곰들 팀원은 모두 놀라 기우라와 송 감독을 번갈아 쳐다봤고, 기우라는 말 없이 송 감독을 쳐다봤다.
그도 그럴게 기우라란 말이다.
송 감독이 발굴하고 애지중지 키운 기우라.
지금껏 수많은 연습생이 동한 베어스 연습실을 드나들었다. 지금 상대로 있는 제너러조차도 송 감독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그 자릴 꿰찬 건 연습생 중에선 기우라 하나였다.
그런 기우라를 나가라고 한 것이다.
송 감독은 기우라의 눈빛을 오래도록 보다 말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꼬? 그래! 역시 우리 둘은 마음이 잘 맞는구먼. 레이틀린을 픽해라."
멍하니 송 감독을 바라보는 팀원들을 향해 송 감독은 시선을 돌렸다.
"왜? 너도 나가고 싶냐?"
"아...아니요."
레이틀린 Pick
구교환은 플뢰레가 픽된 것을 확인하곤 송 감독을 빤히 쳐다봤다.
"감독님도 했잖아요? 쌤쌤인걸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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