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4세트 경기에 들어가기 전.
구교환은 이동하에게 주문을 넣었다.
절대 탑 싸움을 방해하지 말라는.
탑이 지면 지는 대로, 이기면 이기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주문을.
구교환은 그게 말이 되냐는 이동하의 물음에
"팀이잖아. 내 목적을 위해서 힘 써주는 만큼 나도 힘 써줘야지."
그럼 그냥 우승하면 되는 것 아닌가.
우승을 위해 무엇이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왜 그렇게까지 최현준의 자존심을 위해 희생하려는지 궁금했다.
"그거야. 관계를 만드는 과정이니까."
우승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이상 언젠가 마주칠 것이다.
하물며 함께 우승까지 한다면 같은 팀에서 뛰게 되겠지.
그렇기에 지금 최현준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둔다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는 것이 있을 거다.
관계의 힘.
절대 무시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그럼 우승은 포기한 것이냐.
우승을 최현준 한 명에게 맡기는 것이냐는 질문에 구교환은
"아니, 이번엔 내가 이겨줄게."
***
탑 정글에서 시작된 교전.
5레벨 팰리스와 6레벨 용리의 싸움.
팰리스는 불리한 상황임을 알면서도 먼저 용리에게 싸움을 걸었다.
이건 단순히 레벨의 차이로 불리함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ap계열인 팰리스와 ºad계열 용리의 태생에서 나는 극명한 차이.
스킬 대미지가 주를 이루는 ap계열의 장점은 스킬 연계를 통한 폭발적인 딜링.
[ E : 거미줄 뭉치 / ºR : 거미폼 변환 / Q : 독이빨 / W : 새끼 거미 폭격 ]
그리도 단점은 스킬 쿨타임이 돌기까지는 기본 공격력이 약하기에 이쑤시개로 쑤시는듯한 대미지밖에 줄 수 없다는 점.
[ 거미줄 뭉치 ]를 맞고 기절한 동안 들어온 스킬 연계에 폭발적으로 사라진 체력이지만,
"내 차례지?"
ap의 단점을 명확히 알고 있는 용리이기에 굴하지 않고 팰리스에게 다가갔다.
ad계열의 단점은 폭발적인 딜링은 ap보다 부족하거나, ap와 비슷하게 딜을 넣으려면 컨트롤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
장점은 ap와 반대로 기본적인 공격력이 높기에 그의 평타 한 방, 한 방이 묵직하게 들어온다.
[ W : 용 비늘 / 평타 / W : 비늘 과열 / 평타 / Q : 용의 발자국 / 평타 / E : 용의 날개 / 평타 / Q : 용의 발톱 ]
게다가 상대는 프로 연습생.
웬만한 난이도의 콤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용리의 콤보 한 번에 서로 피가 같아진 상황.
이제 스킬 쿨타임 동안 팰리스와 용리는 서로 거리를 재며 평타 싸움에 들어가려는 순간.
[ 거미줄 타기 ]
거미 여왕은 거미줄을 타고 공중으로 도망갔다.
'어차피 [ 거미줄 타기 ] 지속시간은 3초야. 아직 초반이라 3초가 지났다고 쿨타임이 돌진 않아.'
3
3초 후에 팰리스가 내려온다 할지라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3초 뒤 거미줄에서 내려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용리의 궁극기 [ 용의 숨결 ].
역시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일 뿐이라 생각하며 차분히 기다리던 용리의 뒤통수에서 들리는 소리.
2
-쿠구구구
바위를 보드처럼 타고 땅을 서핑하는 호지르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지팡이를 뻗었다.
[ 바위벽 ]
용리와 팰리스 사이에 생기는 거대한 벽에 용리가 당황할 때쯤
1
팰리스가 거미줄에서 내려왔다.
'쳇. 미드가 올 시간을 벌기 위해 [ 거미줄 타기 ]를 쓴 거냐?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호지르의 [ 바위 벽 ] 때문에 [ 용의 숨결 ]이 닿지 않자, 용리는 [ 점멸 ]로 벽을 뛰어넘어 팰리스를 사정거리에 품었지만.
팰리스는 용리의 행동이 너무 뻔하다는 듯 비웃으며 [ 점멸 ]로 벽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반 피인 데다 스킬도 쿨타임이 돌고 있는 용리의 앞에 놓인 건 풀 컨디션의 호지르.
용리는 다급하게 미니맵에서 자기 팀 미드인 렉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왜 아직도 미드 중간이야?!"
"집에 간 줄 알았어. 미리 뛰고 있었는지 몰랐지."
게다가 벽에 기댄 채 걸어가면 이속이 증가하는 호지르의 패시브 [ 바위 서핑 ]덕에 렉스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깨무는 법.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풀 컨디션의 호지르를 [ 점멸 ]도 없이 용리가 이길 순 없지만, 곧 올라오는 렉스를 위해 양념해 둔다면 최소한 1 대 1 교환은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바람이 무색하게.
[ 퍼스트 킬 ]
최소한의 발악도 못 하고 죽어버렸다.
호지르가 용리를 죽이는 장면은 전광판을 통해 여과없이 보여졌고, 그 광경을 본 송 감독은 실성한 듯 웃었다.
"뭐냐··· 허...허허···!"
그 이유는 그 장면에서 용리는 단 한 대도 크레이드의 호지르를 때리지 못했다.
""우와!""
관객석은 난리요. 정승원 감독도 놀라긴 매한가지.
"저...저 녀석 피지컬이 저 정도로 좋았어?"
"그...그러게요? 방금 한 대도 안 맞았어요. 완벽한 거리 조절에 스킬 분배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고요."
"분명 지략가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정승원 감독은 음흉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웃었다.
"문무겸비라... 같이하고 싶어서 미치겠어!"
"감독님. 방금은 좀 변태같았어요."
구교환이 기우라까진 아니라도 제너러급의 압도적 피지컬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함께 지내봤으니까!'
구교환은 욜을 하면 할수록 느끼고 있었다.
이세계에서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웠을수록 챔피언을 다루는 피지컬이 급상승한다는 걸.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다.
오랜 시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을수록 관계는 깊어지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약점과 그에 따른 보완법.
비기나 특별한 전술 혹은 독특한 마법의 활용법 등을 터득할 수밖에.
그래서 힐라로 데비를 이길 정도의 피지컬이 나왔던 건.
힐라가 아내였기 때문이고.
호지르로 제너러 만큼의 피지컬이 나오는 이유는 호지르와 함께 했던 시간과
'그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
호지르가 먼저 킬 스코어를 올리자.
렉스는 호지르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아무 소득 없이 미드로 복귀했다.
이대로 라인에 복귀하면 손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합류대신 호지르가 로밍간 사이 라인이라도 밀어 타워에 미니온을 밀어 넣었더라면
적어도 하나의 미니온 웨이브는 태울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싸워보지도 않고 내빼는 이유는 호지르가 풀 컨디션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전광판이 아닌 바로 눈앞에서 본 호지르의 무력에 압도당했기 때문.
'뭐야··· 머리만 좋지 피지컬은 제 밑이라면서요. 감독님!'
다시 라인으로 돌아가는 렉스.
이미 죽은 용리와 발을 맞추기 위해 요람으로 귀환하는 팰리스.
호지르는 위를 바라본다.
풀 컨디션인 데다, [ 점멸 ]까지 아낀 상황.
이대로 탑으로 뛴다면 막상막하인 탑 전투의 판도를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다.
중요할 때 한 번에 해당하는 로밍이 될 것이다.
아무리 자존심을 지켜준다고 한들.
아무리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들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나니 자연스레 조금 더 승리에 가까운 길을 선택하게 된다.
지금 얻은 이 스노우볼을 더 굴리고 싶다.
그 마음에 잠깐 최현준을 바라봤던 구교환은 그를 믿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대단하네.'
기우라의 플뢰레는 퍼스트 킬 소식을 접하는 순간에도 맵 따위 보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하아··· 하아···."
지금 앞에 있는 제너러의 데비에게서 눈을 떼면 왠지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분명 현재 탑 전투 구도는 기우라의 설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질까 두려웠다.
처음이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이 경기가 끝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그 느낌이 들었던 건 최현준도 마찬가지였었다.
왜 '들었던'이고 '였었다.'는 것인가.
"하아······ 하아······."
그건 현재 최현준의 머릿속엔 오로지 게임에 대한 정보뿐.
그 어떤 감정도 그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한 채 오로지 눈앞의 게임에만 집중하는 상태.
현실의 오감을 넘어서는 감각을 느끼는 최현준.
심호흡은 천천히 줄어들고.
"후···...우······."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기분.
키보드와 마우스에 닿은 촉감이 마치 한 몸이 된 듯 느껴지고
귀가 닫히고, 눈에 보이는 건 바로 앞의 수많은 미래.
그 수많은 정보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머리.
집중력의 상한선을 경기 내내 갱신한 끝에
제너러는 무아지경의 수준.
존(ZONE)에 들어갔다.
"······."
- 작가의말
ºAD (Attack Damage) : 물리 공격력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