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데비의 검게 물든 창이 그의 손에서 사라지자.
플뢰레는 눈을 뜬 채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기우라는 회색 화면이 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최현준은 그제야 자신이 침을 흘리고 있었다는 걸 인지했다.
최현준의 솔킬로 환호하는 오인사격의 부스.
기우라의 죽음으로 다급해진 반달곰들 부스.
부스 밖은 관중들의 환호성과 흥분한 해설로 가득 찼다.
정승원 감독과 이해성 스카우트를 비롯한 여타 욜 E스포츠 스카우트들은 서둘러 기우라의 목을 딴 제너러를 영입하기 위해 부산했다.
동한 베어스 또한 기우라를 대신할 탑솔러 제1순위에 제너러의 이름을 서둘러 올렸다.
단 두 사람.
기우라의 패배를 말없이 쳐다보는 송 감독과 구교환만이
큰 감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자신의 감정을 지키고 있었다.
왜 인가.
최현준이 기우라를 이길 것을 알고 있어서?
아니다.
그가 이길 것이라고는 만에 하나라고 해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승리가 구교환을 더욱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앞으로 벌어질 일.
그가 싸우고 있는 최현준의 자존심이 더욱 커졌기 때문.
----
숲 한 가운데
스니처의 시체가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이 전장에 울리는
"터치다운!"
승리를 만끽하는 환호성에 가까운 외침.
허나.
-촥!
"어?"
전투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벨베어 길드 VS 가이온 길드 ]
구교환이 촌장의 앞에 "터치다운!"을 외치는 순간 뒤늦게 온 마르크가 보였다.
구교환은 자존심을 한껏 고취하며
'난 이런 사람이다.'
'너 따위가 앞길을 막을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며 흐뭇하게 마르크를 쳐다봤다.
그런데 어째선지 벨베어는 아직도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건 호지르도, 캉캉도, 미어도 마찬가지.
왜일까?
라는 의문을 해결해 주려는 듯 촌장의 그림자에서 들리는 목소리.
"벨베어 길드는 스니처 여왕의 자궁을 노리려다 전사했다. 벨베어. 너는 3급 모험가. 어쩌면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자이지만, 결국 서류상 명시 돼 있는 건 9급 모험가니까."
그림자에서 나온 레드와 구로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호지르를 쳐다봤다.
"시나리오는 만족하나?"
"설마 했는데 결국 해보자는 거냐!"
-탕!
벨베어가 레드의 살기에 대응하는 순간 울리는 총소리.
그리고 쓰러지는 미어의 작은 몸.
"시발! 다리를 노리라니까! 이 미친년이!"
터져나가는 미어의 머리를 보며 마르크가 내뱉은 한마디에 레드는 호지르를 바라보던 눈빛을 마르크에게로 옮겼다.
"이 머저리가."
머릿속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구교환은 회피를 택했다.
[ 점멸 ]
-팡!
사라진 벨베어 길드를 보며 레드는 마르크의 목을 변명도 하기 전에 깔끔하게 베었다.
-촥!
"쓸모없는 놈."
아직 [ 링크 ]가 풀려있지 않았기에 구교환과 벨베어, 호지르, 캉캉 그리고 머리가 없어진 채 피를 분수처럼 내뿜는 미어의 작은 몸이 함께 이동했다.
"아...아으...아···."
구교환은 피로 물든 미어의 몸통을 품에 가져가며 오열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어째서긴 너 때문이잖아.'
마지막 유언 따위도 남길 시간 없이.
마지막 대화 따위 남길 새도 없이 세상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벨베어 말대로 그 승부에 발을 들이밀었으면 안 됐다.
호지르 말을 들었어야 했다.
분명 이유가 있었을 말들을 나는
난 그저 자존심에 취해 귀를 닫았다.
자존심 따위 아무것도 해주는 것이 없는데.
자존심을 지킨다고 내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닌데.
나를 치켜세워 주었던 건 얄팍한 자존심 따위가 아니라.
"너였는데···."
호자르가 정신없이 오열하는 구교환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운 뒤 뺨을 날렸다.
"정신 차려! 지금 이런다고 변하는 건 없다. 더 많은 것을 잃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
"그...그렇지만···."
"캉캉과 나도 죽이려는 거냐!"
호지르는 구교환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널 믿고 너와 함께 이 자리에 온 나와 캉캉과 길드장님은 어쩌라는 말이냐! 우리뿐만 아니라 저 멀리 우릴 기다리고 있는 길드원들은 또 어떡할 거냐!"
"...길드원?"
"그래 길드원. 마르크가 하는 말을 못 들었느냐? 다리를 노리라고 저격수에게 주문했다는 말을?"
저격수가 다리를 노린다는 건 시간을 끌기 위함.
더구나 레이틀린이다. 그녀라면 절대 조준을 실패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다리를 쏘지 못했는가.
"아이 씨. 저 녀석은 몸이 너무 작아서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머릴 쏴 버렸네."
레이틀린은 자신이 의뢰받은 일을 끝마치자마자 자릴 떴다.
벨베어는 호지르의 말을 듣고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는 길드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가이온 이 새끼가 안 따라오더라니."
"길드장님! 가십시오! 여기는 저와 캉캉이 막겠습니다."
호지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베어는 마을로 뛰었고.
호지르는 얼이 빠진 구교환의 얼굴을 바로 잡았다.
"너도 따라가라! 그리고 절대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그...그래도 제가···."
"그만!"
호지르는 주저앉아있는 구교환을 일으켜 세웠다.
"넌 누구냐."
"저는···."
"네가 누구냔 말이다!"
"······."
"넌 벨베어 길드의 정찰대장이다! 끝까지 책임져라! 만약 모두가 죽었다면 그들의 시체를 양지 바른 곳 아래서 잠들 수 있도록 해라! 그게 최소한의 책임이라는···!"
-팡!
분명 구교환의 앞에 보이던 호지르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의 얼굴 대신 보이는 건 스크롤을 든 구로의 모습
"네 몸··· 흥미로워."
구로는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죽인 뒤에 철저하게 해부해 주마."
[ 신성 올가미 ]
구로의 스크롤에서 나온 올가미가 구교환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분명 피할 수 있었다.
마법을 쓰지 않아도 피할 수 있을 만큼 구교환은 강하니까.
하지만 무너진 마음이 그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휘리릭! 촥!
올가미에 꼼짝없이 묶인 구교환 앞으로 구로가 다가왔다.
"싱겁군. 벌써 마력을 다 쓴 건가? 고작 그 정도야?"
"왜 죽였지."
"뭐가? 아까 그 족제비? 걱정 마라 그 녀석 뿐 아니라 너희 모두 죽일 거니까."
"왜 죽이려는 거지?"
"아, 그걸 모를 줄은 몰랐는데?"
구교환의 코앞에 온 구로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린 지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말이야. 너도 그렇지 않아?"
"맞아, 내 잘못이야···."
구로는 말 없는 구교환의 얼굴로 주먹을 번쩍 들었다.
-퍽!
"너도 그래서 가이온님의 제안에 응했잖아. 그냥 가만히 너희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으면 되는데. 괜히 까불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
"······."
-퍽!
"왜? 마르크의 얼굴을 보니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해주든? 무슨 맘인지 아주 잘 알아. 가이온님도 마찬가지라 말이지. 그 곰탱이한테 턱이 부서진 게 아직 자존심이 상하시나 봐."
"그렇다고 왜 미어를···."
"그거야···."
구로는 힘없이 나가떨어진 구교환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게 이치니까. 원래 자존심을 치켜세우면 내가 아니라 내 주변이 다치거든."
"내 잘못인데."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는 마. 나는 그저 네 몸과 마법을 구사하는 방법에 흥미가 있을 뿐이니까."
"...어떻게 하면 미어가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어··· 뭐 최소한 죽인 녀석이 살아있는 꼴은 보여선 안 되겠지? 물론 그런 복수 따위 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복수? 그럼, 미어를 죽인 그 저격수는 어디 있지?"
"아, 그 여자는 나와 같은 용병이라 나도 잘 몰라."
"그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지?"
"알아낼 필요 없어. 어차피 이미 끝났는데 뭘. 미어라면 곧 만나게 해줄게."
"그래··· 일단 이 녀석부터 죽인 다음 알아내자."
구로는 올가미에 묶인 채 질질 끌려다니는 구교환을 비웃었다.
"퍄하하하! 이건 또 뭔 소리? 왜? 아플까 봐 걱정 돼? 너무 걱정하지 마. 안 아프게 죽여줄 테니까. 난 딱히 원한 같은 건 없거든."
"최소한의 책임···."
그제야 구로는 지금까지 구교환이 내뱉은 말은 전부 혼잣말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구교환은 올가미에 묶인 채로 인을 맺었다.
[ 간증 ]
[ 신성 올가미 ] 때문에 마력은 쓸 수 없었을뿐더러 신성한 자도 아닌 구교환은 [ 간증 ]을 통해 신성력을 빌렸다.
빌린 신성력만큼 나중에 마력을 갚아야 하지만, 현재 구교환에게 미래 따위 사치.
그러나 흘러들어오는 방대한 신성력에 비해 구교환의 몸에 신성 마법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 힐 ]과 회계뿐.
"끄아악!"
구교환은 올가미를 끊어버리기 위해 온 힘을 다 했다.
올가미가 살 속을 파고들다 못해 뼈가 드러나는 고통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고통이야말로 간증이오, 회계였다.
"어이! 어이! 그만하라고! 샘플이 망가지잖아!"
구로가 새로운 스크롤을 꺼내듬과 동시에 [ 신성 올가미 ]는 해제됐다.
구로의 능력은 랜덤 스크롤.
그가 스크롤을 꺼내는 순간 랜덤으로 마법이 결정된다.
꺼낸 스크롤을 사용하지 않으면 다시 새로운 스크롤을 꺼낼 수 없다.
새로운 스크롤을 꺼내면 전에 썼던 마법은 해제된다.
'하필 [ 부패 사슬 ]이라니.'
다른 사람과 싸울 때 [ 부패 사슬 ]은 충분히 좋은 마법이지만
막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구교환에게 [ 부패 사슬 ]은 그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이미 [ 힐 ]로 너덜너덜해진 팔의 수복을 마친 구교환은 [ 부패 사슬 ]에 뜯어지고
녹아내리는 피부를 계속해서 수복하며 구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수복이라함은 고쳐서 본모습으로 다시 되돌려 놓는 것.
구교환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은 멀쩡하지만, 그의 통각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가는 상황.
그럼에도 구교환은 앞으로 나아갔다.
본인의 죄에 대한 벌이라 생각하며 달게 받으며.
'속죄해야 해. 내 자존심이 모두를. 내가 사랑했던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어.'
"미...미친 놈!"
구로는 서서히 다가오는 구교환의 기괴한 모습에도 새로운 스크롤을 뽑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제아무리 [ 간증 ]을 한들 구교환의 신성력으론 [ 부패 사슬 ]을 끊임없이 견뎌 내기란 불가능이라 생각했기 때문.
허나 아쉽게도 그의 생각은 근원부터 틀렸다.
마침내 구로의 목을 잡은 구교환.
"커흑! 어...어떻게!"
그는 [ 간증 ]으로 평생의 마력을 가불했다.
이미 구교환은 모든 것을 버렸다.
이세계에서 유일하게 본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공간이, 인연이 사라졌다는 생각은 구교환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지금 구교환의 머릿속에 남은 건 말의 끝까지 제대로 듣지 못한 '최소한의 책임'이라는 것과 복수뿐.
"우선 미어를 고향에 묻어줄 거야. 그리고 레이틀린을 죽인다. 그다음에 되어줄 게 네 실험체가."
"시...시발··· 그럼... 이 손부터··· 놓...으라...고···. 커헠···!"
결국 구로의 숨통은 끊어졌지만, [ 부패 사슬 ]은 풀리지 않았다.
저주 마법이란 그런 것이다.
저주를 건 자가 마법을 해제하지 않는 이상 자연적으론 풀리지 않는다.
이제 그는 저주와 함께 천천히 호지르를 향해 걸어갔다.
과거라는 저주에 빠진 한 새를 향해.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