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음식

8화4
해가 쨍쨍한 날이었다.
‘바로 오늘이다.’
이유제는 속으로 생각해오던 것을 오늘 해보기로 했다.
창고 안에 만들어두었던 수레를 끌고 나갔다.
‘오늘은 길에 다니면서 차를 팔아보는거야.’
황건적에게 잡혀갔을 때 이유제는 수도 없이 고민했다.
이 전란 속에서 가게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결론은 푸드트럭.
수레에 짐을 싣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또 가게를 떠날 상황이 생기더라도 장사를 계속 할수 있을 것이다.
‘내 가게 내가 지킨다.’
일단은 간단하게 차부터 팔아보기로 했다.
탁현의 농부들은 더위에 지쳐 그늘에 앉아있었다.
“아, 날이 무지하게 덥구만 그려.”
여느 때였으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우물가라도 가서 뭘 마실텐데
이런 날은 그늘 밖을 벗어나기도 싫었다.
우물가에 가서 목을 축인들 다시 돌아오면서 땀으로 다 빠질 판이었다.
바로 그때.
“냉차 드세요- 냉차 드세요-”
“냉차?”
덥고 목마른 와중에 반가운 소리였다.
“오, 유제다점 청년 아닌가!”
“네, 차 한잔씩 드시죠.”
“어라, 파는 게 아니라 그냥 먹으라는 건가?”
“네.”
목마를 때 마시는 물은 꿀맛, 공짜면 핵꿀맛인 법이다.
그런데 차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차라고 하면 맑고 투명한 수색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것은...
“왜 차가 샛노란가?”
맑지도, 투명하지도 않았다.
차 위에 마치 노란 기름막을 씌운 듯한 생김새가 영 낯설었다.
“송화밀수라고 하는 차입니다.”
“송화밀수?”
송화밀수.
꿀물에다 송화가루를 넣은 차다.
비록 꿀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조청을 넣었지만.
“예, 멀리 동방의 궁중에서 먹...을 예정인 차랍니다.”
이것은 한국 궁중에서 먹던 것이다. 더위를 식히는 데 그만이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임금님 먹는 것을 먹는단 말인가?”
농부들은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껄껄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농부들이 차를 받아마시는 걸 보고, 주변에 서성이던 사람들도 한 잔씩을 받아갔다.
“아, 시원하구먼.”
“잘 마셨네.”
농부들은 땀을 훔치며 다시 논일을 하러 갔다.
괜찮은 반응이었다.
송화가루의 계절이다.
세숫물로 쓰려고 받아놓은 물동이에 아침마다 샛노랗게 송화가루가 앉는 것을 보고 이유제가 생각했다.
‘아까운데.’
현대인인 이유제에겐 버리기 아까운 식재료였다. 언제 이렇게 무공해의 깨끗한 꽃가루를 손에 넣어보겠는가?
이유제는 꽃이 주는 묘한 신비로움에 이끌렸다.
‘마침 다점에 새로운 차 메뉴를 넣고 싶었는데. 이 참에 송화밀수를 팔아보자.’
송화밀수는 원래 꿀을 넣어야 하는데, 꿀을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조청을 타 넣기로 했다.
한번 맛을 보았다.
‘윽, 쓰고 달아. 달고 써.’
옛 궁중 음료라기에 기대했는데 난해한 맛이었다.
쓴맛도 쓴맛 나름이거늘, 송화가루의 쓴맛은 켜켜이 혀에 내려앉는 맛이었다.
그 뒤로 알싸하게 펼쳐지는 솔향이 상쾌했지만, 지나치게 어른의 맛이었다.
‘이거 나만 맛없는건가? 탁현 사람들은 어떠려나?’
맛없는거 팔아서 욕먹을 수는 없으니, 어디한번 공짜로 돌려보기로 했다.
조청을 훨씬 많이 넣고, 송화가루는 조금만 넣어서.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괜찮았나 보다.
“좋아, 이 레시피대로 해서 팔아봐야겠다.”
...하고 마음 먹는 순간.
[-1]
[-1]
[-1]
...
농부들의 머리 위로 일제히 마이너스가 떴다.
‘...아. 이사람들도 맛 없었네.’
한 잔 더 준다고 할까 봐 다시 일하러 간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문득 미안한 마음에 이유제는 가져온 찻잎으로 냉차 한잔씩을 만들어 새로 돌렸다.
“에이, 송화밀수는 팔지 말아야겠다.”
애써 모은 송화가루가 아까웠지만 별수 없었다.
나온 김에 좀더 나가볼까.
이유제가 수레를 끌고 산을 올랐다. 이쪽은 오며가며 다니는 사람이 많은 길목이니 장사가 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서오십시오-”
“오, 차를 팔고 있는 건가? 옆의 이 노란 것은 처음 보는군.”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가 와서 물었다.
“네, 송화밀수라고 합니다. 동방의 왕실에서 더위를 식힐 때 마시는 차죠.
원래는 벌꿀이 들어가는데, 오늘은 조청으로 맛을 냈습니다.”
“어디 한번 줘 보게.”
돈을 받기가 꺼려져 그냥 한 잔을 주었다.
“오오, 이것이 제왕의 맛인가-”
대머리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사람들을 우르르 데리고 돌아왔다.
모두가 젊은 청년들이었다.
뭐지? 맛없다고 클레임 걸러 온 건 아니겠지. 공짜로 줘서 다행이다.
대머리 남자가 으쓱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자네들 송화밀수라고 들어봤나? 제왕의 맛이라고들 하지. 이걸 먹으면 동방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나.”
뭐 어디까지 왜곡된 거야?
“뿐만 아니야. 불에 넣어도 타질 않는다고 하지.”
더위를 안 탄다 그랬지 언제 저런 말을 했어? 큰일 날 사람.
“자, 주인장. 송화밀수 다섯 잔 주시게-”
남자가 주문했다. 그러나 자신없는 맛을 팔 수는 없었다.
“잠깐, 아까는 시험 삼아 한잔 드린 것이고요...”
“내 따로 벌꿀도 가져왔네. 오늘 산 타기 전에 기력 보충하려고 가져온건데,
어디 송화밀수를 제대로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남은 건 주인장이 쓰시게.”
“다섯 잔 대령하겠습니다.”
대머리 남자는 대부호라도 되는지 꿀을 턱 내주었다. 귀한 꿀을 그냥 준다는데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그걸 맛있게 먹었을 줄이야.
여튼 잘 된 일이다. 송화가루를 받아서 다시 정제하는 일은 꽤 번거로웠는데, 그걸 버리자니 너무 아까운 참이었다.
‘보아하니 직원들 데리고 등산 왔나 보네.’
젊은 청년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그들은 저마다 한 짐씩 지고 있었는데, 쌀이며 장작거리, 가마솥까지 이고 졌다.
이건 뭐 산 정상에서 라면 끓여먹겠다고 부하직원들한테 냄비며, 가스버너며, 생수통까지 짊어지게 하는 부장님보다 더하다.
더운 날에 등산하는 젊은 청년들을 보고 측은지심이 들어 재료를 아끼지 않았다.
진하게 꿀물을 타고 송화가루를 푹 퍼서 넣었다. 대추 고명 몇 개를 띄우니 과연 궁중음식이라고 부를만한, 고귀한 비주얼이 되었다.
‘이건 진짜 눈으로만 먹어야 하는 음식인데.’
이유제의 생각으론 그랬다. 손님들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다.
“자자, 이건 내가 사지. 시원하게 한 잔씩 하고 등산 마저 하자고.”
“예, 주인어른-”
“자, 단결! 단결! 단결!”
모두가 쭉 들이켜는 순간.
[-1]
[-1]
[-1]
...
청년들의 머리 위로 일제히 마이너스가 떴다.
숫자를 눈여겨볼 필요도 없이, 표정부터 썩어나가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괴롭힌 기분이 들었다.
대머리 남자가 말했다.
“아, 촌스럽게들 왜 이래- 이거 나만 입에 맞아? 나만 궁중음식 좋아해?”
‘[-1]’
‘아저씨도 맛 없잖아요.’
그의 머리위로 떡하니 마이너스 숫자가 떠 있었다.
이 아저씨,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다. 허세 가득, 자존심 풀장착.
‘직원들 피곤하겠구먼.’
“자, 단결! 단결!”
아저씨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유제는 그들을 속으로 조용히 응원했다.
***
“아, 시원하다-”
냉차는 잘 팔렸다.
산은 입맛이 도는 장소였다.
탁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초가가 옹기종기 들어섰고, 논두렁 밭두렁이 마치 자투리 천을 이어붙인 조각보처럼 펼쳐졌다.
이런 풍경을 보며 냉차를 마시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유제는 조금씩 위쪽으로 자리를 이동하며 차를 팔았다.
정상에 가까워질 때쯤, 우려둔 찻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
오늘 장사는 이만하고 돌아갈까, 하는 때.
“큰일 났습니다! 도와주세요!”
구슬픈 목소리로 다급히 외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왜 그러시오?”
자세히 보니 이 사람, 아까 왔던 등산 무리의 한 사람이다.
“도시락 좀 나눠주세요.”
뭐? 어이없어하는 와중.
“그게 말입니다...”
청년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예상대로 상사 모시고 등산을 온 게 맞았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이다.
“찬거리로 싸온 음식이 다 쏟아져서 못 쓰게 돼버렸습니다.
가마솥이며, 쌀이며 무거운 것을 잔뜩 들고 옮기다 보니 미처 신경을 못 썼습니다.”
허 참, 그 무거운 가마솥을 이고 오르다니. 그거부터 무리한 발상이었다.
“벌써 주인어른꼐서 시장하신지 역정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들은 그렇다 치고 일단 주인어른께서 뭘 좀 먹게 구해다 드려야 합니다.”
“음...”
“좀 도와주십시오. 값은 꼭 치르겠습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이유제 자신도 줄만한 게 없었다.
도시락으로 싸온 거라곤 밥에 물김치, 간장 뿐. 지나치게 소박했다.
그렇다고 산중에 어디에 음식을 파는 이가 있겠는가? 냉차를 파는 것도 드문 일인데.
“딱 하나 떠오르는 게 있군요.”
이유제가 씩 미소지었다. 그에게 딱 맞는, 최고의 음식이 떠올랐다.
***
“아,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거야- 찬거리를 다 쏟아버렸다니, 이게 말이 돼?”
대머리는 노발대발 화를 내고 있었다.
“기분 좋으려고 오른 산에서 꼭 이렇게 소리지르게 만들어야 해?”
“주인어른, 밥을 짓고 있으니 조금만 계십시오.”
“내가 지금 배고파서 이래?”
배고파서 그러는 것 정확히 맞다. 곁에서 봐온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꼰대긴 해도 원래 이렇게까지 함부로 굴진 않는데, 배가 고프면 극도로 예민해진다.
그때였다. 밥이 들어왔다. 소반에 딱 하나 밥만 놓은 것이었다.
“주인어른, 이것 좀 먼저 드십시오.”“찬거리도 없이 뭘 먹으라는 거야-”
심지어 밥은 새카만 것이, 태운 것처럼 보였다.
“안. 먹. 어-”
남자가 상을 엎으려는 듯이 손을 탁, 짚었다.
그때 금쪽이 달래듯 차분한 목소리가 말했다.
“제왕의 음식입니다. 안 드시겠습니까?”
“뭐?”
그 말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다점 청년, 이유제였다.
“송화밀수의 가치를 알아보신 어른이 아닙니까. 약밥도 알아보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약밥?”
남자가 새카만 밥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거 다시 보니 태운 게 아니라 색깔만 거뭇하구먼?”
“예, 맞습니다. 역시 제왕의 음식을 알아보다니, 탁월하시군요.”
이유제의 칭찬에 남자는 기분이 약간 좋아진 듯 보였다.
“흠흠. 아랫것들이 허둥대는 바람에 나도 정신이 없어서 못 알아봤구만, 그려.”
못 알아보기는 개뿔, 약밥은 신라의 음식이다. 이 아저씨가 알 리가 없다.
중국에도 약밥과 비슷한 바바오판이라는 요리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한참 뒤에 만들어지는 요리다.
그러니 못 알아보는 게 아니라, 아예 모르는 게 정상이란 뜻.
“약밥은 멀리 동방의 나라, 신라에서 먹는 음식입니다.
신라의 왕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까마귀가 나타나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이후로 까마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까만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하는군요.”
“알지 알지.”
알기는 무슨. 약밥도 한참 뒤에 만들어지는 음식인데, 이 아저씨가 알 리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 약밥은 남자의 입맛에 맞았나 보다.
가마솥 안에서 눌린 간장의 맛을 벌꿀이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콕 박힌 대추가 감칠맛 나는 단내를 풍겼다.
단 맛과 짠 맛이 번갈아 자기주장을 하며 입맛을 당기게 했다.
입가심도 아니고 요리도 아닌 것이 먹을수록 묘한 매력이었다.
‘내가 가져온 간장이랑, 아까 남긴 꿀이 있어서 다행이다.’
원래는 간장, 꿀 뿐만아니라 기름도 좀 넣고 밤이나 곶감 같은 것도 얹어서 쪄내야 하지만, 이 산중에서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행히 송화밀수에 얹어내기 위해 가져온 대추 고명이 있었다.
대추라도 얹어서 내니 그럴싸한 약밥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남자는 왕의 음식이라 하면 뭐든 맛있게 먹을 사람이었다.
쓰디쓴 송화밀수도 왕의 음식이라 하니 맛있는 척 먹었는데, 달짝한 약밥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기운이 솟는구만-”
남자가 약밥을 다 먹었다. 그 사이 막내가 얼른 내려가 찬거리를 사왔고, 남자는 배불리 식사를 마쳤다.
“이게 다 주인장 덕분이네. 약소하지만 받아주겠나?”
그리고 남자가 내민 것은...
“헉.”
헉 소리가 절로 났다. 전혀 약소하지 않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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