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평이 선물을 주고 갔다

9화
“이, 이건...”
너무나 귀한 선물에 이유제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래. 벌꿀이오.”
그것도 양이 꽤 많았다.
아까 남자가 송화밀수를 만들어달라며 내밀었던 벌꿀은 종지그릇에 담을만한 양이었다.
딱 차 몇 잔 만들고 약밥 한 번 만들자 동이 났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한 단지를 내어주었다.
알고 보니 이 아저씨, 탁현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원래는 말 장사를 했는데 최근에 다 처분하고 꿀벌 치는 일을 시작했단다.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어디서 꿀이 잘 될지 보고 있었다고.
그는 내가 꽤 마음에 들었나보다.
“만일 탁현에서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나를 찾으시오. 장가 세평이오.”
그 이름을 들은 나는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가 말했다.
“황건과 도적이 판치는 세상, 말은 간수를 잘 해야 겨우 뺏기지 않고 제값을 받지.
그러나 꿀벌이라면 어떤가? 벌을 잡아다 군사로 쓰겠소, 책사로 쓰겠소? 하하.”
“대...”
대머리 아저씨가 제법이네.
“대협.”
“허허, 뭘 그것 갖고 대협이라니, 쑥스럽소.”
‘꿀 잘 딴다고 대협 소릴 하기엔 무리가 있긴 하지. 하지만...’
유비와 관우, 장비가 탁현을 떠날 무렵, 의군을 꾸릴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꽤 부유한 장비가 전 재산을 털었는데도 말이다.
그때 나타나 군마를 공짜로 준 사람이 있었다.
어차피 황건적에게 뺏길지 모르는데, 좋은 일 하는 사람에게 주겠다면서.
‘그 이가 바로 장세평.’
탁군 일대를 휘어잡은 거상의 이름이다.
***
그날 밤.
이유제는 냇가에 내려가 땀을 씻어내린 뒤, 마룻바닥에 축 늘어졌다.
“귀한 꿀을 어디다 쓸까.”
놋수저를 잘각이며 시원한 꿀물 한잔을 타 마셨다.
미처 식지 못한 낮의 더위가 달콤한 꿀물 한잔에 씻어내려졌다.
흐릿한 오늘밤 달처럼, 은은하게 부드러운 단맛이 감돌았다.
과연 상품의 꿀이었다.
“보자... 복숭아철은 이제 좀 지났고. 아이스티 말고 다른 걸 만들어보고 싶은데.”
탁현에서 장사하는 일의 장점이자 단점, 바로 재료였다.
복숭아든, 송화가루든 뭐든 제철에는 몹시 신선한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제철이 지나면 얻기가 어려워질뿐더러, 꿀처럼 수급이 들쭉날쭉한 것도 더러 있었다.
탁현의 시골 장터에 꿀이 늘상 있지 않았으니, 꿀이 들어간 음식을 팔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장세평은 탁현의 산에 벌을 칠 것이라 했으니, 이제 훨씬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게다가 그와 안면까지 터 두었으니 횡재가 아닐 수 없다.
‘뭐가 어찌됐든 핵꿀맛이다.’
잡다한 생각으로 쏠렸던 신경이 다시 혀끝으로 돌아갔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도 결국엔 다시 노란 달로 시선이 가는 것처럼.
‘이걸로 뭘 만들어도 맛있다.’
그날 밤 이유제는 물에다, 술에다 꿀을 넣어 먹으며 달달한 기분으로 잠을 청했다.
***
“으~ 개운하다.”
이유제는 활기차게 일어났다.
간만에 먹는 단맛이 반가웠던 것인지, 아니면 피로회복에 좋은 꿀을 듬뿍 먹어서인지
몸도, 마음도 상쾌했다.
“오늘도 힘내서 일해볼까.”
그때 반가운 손님이 들어왔다.
“주인장, 계시는가-”
“아, 형님들!”
오랜만에 보는 유비와 관우, 장비였다.
“저 그런데... 손에 든 거 뭐에요?”
유비가 한 봉지 사이즈의 꾸러미를 들고 있었는데, 불길하게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유제는 얼른 머리를 굴려 삼국지 내용을 떠올렸다.
혹시 유비가 의외로 사이코패스라서 사람 머리를 들고 다니는 취미가 있다던지, 하는 내용이 있던가 생각했다.
“아, 놀라지 마시게. 말고기요 말고기.”
유비가 손사래를 쳤다.
“이번에 출정했을 때 군마가 꽤 죽었소. 어디 묻어줄 수도 없고, 몸뚱이가 썩으면서 금세 악취가 나더군. 그래서 차라리 군사를 먹이면 좋지 않을까, 싶었네.”
“그렇죠.”
전쟁터에서 흔히들 있는 일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요리를 해주었거든.”
“군사들이 좋아하던가요?”
“사기가 많이 떨어졌네.”
그럴 줄 알았다.
말고기는 다른 고기와는 다르게 근육이 많고, 지방질이 적다.
말근육이란 표현이 몸매 칭찬으로 쓰이는 걸 보면 알수 있다.
그래서 잘못 요리하면 씹기 힘들 정도로 질겨진다.
“어머니께서 하시던 걸 보고 정성을 넣어 푹 고았을 뿐이네만.”
잘못된 요리방법의 예시다.
“그래도 군사들이 정성을 보아서 다 먹어주었어!”
유비가 밝게 말했다. 착한 형들은 가끔 민폐가 되었다.
“군사들의 그 마음에 감동했네. 때문에 나도 더 나은 요리솜씨로 보답하기로 했네.”
뭔가 비약이 심한 스토리였지만, 그 마음에 충분히 공감했다.
나 역시 한국의 취사병이었을 시절, 고생하는 국군 장병들에게 밥이라도 맛있게 해주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역시 나의 주군, 유비.’
나는 속으로 포권지례를 했다.
“말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겠는가?”
장비가 간절히 물었다. 어쩐지 이가 많이 닳아보였다.
“예, 저만 믿으십시오.”
나에겐 귀중한 꿀단지가 있었다.
***
유제다점의 하루가 시작됐다.
“어서 오십시오-”
“어, 저기... 장군님들은 누구신가?”
“걱정 마십시오. 오늘 하루 일을 도와줄 도우미들입니다.”
부엌에서 칼을 휘두르는 유비, 관우, 장비는 도저히 식당 알바로 보이지 않았다.
까딱 잘못 앉았다간 청룡도가 그대로 목 언저리를 스쳐지나갈 것 같았다.
그들이 썰고 있는 게 도저히 정상적인 루트로 가져온 고기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은 말고기를 써는 것뿐이었다.
‘손님들이 겁 먹었네.’
“형님들, 여기 밖으로 빠져나오시면 안 됩니다!”
하는 수 없이 이유제는 부엌에 간이 커텐을 달았다.
“여기 차 한 잔과 주먹밥 하나 주시게! 물김치도 같이.”
손님이 주문을 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엇, 그런데 이 빨간 건 뭔가? 안 시켰는데.”
“서비스입니다.”
이유제가 싱긋 웃었다.
접시 위에 주먹밥과 물김치, 그리고 불그레한 말고기 육회가 소담하게 담겼다.
“으음, 날고기인가...”
얇게 저민 날고기가 낯선지, 손님이 젓가락으로 들었다 놓았다 했다.
“신선한 말고기에다 귀한 꿀까지 넣었답니다. 드셔보시지요.”
“그래 그래.”
말고기 맛있는 줄은 몰라도, 꿀 귀한 줄은 알 터다.
손님이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실패인가?’
생소한 날고기의 식감 때문일까, 손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말고기를 먹는 것은 흔하지만, 이렇게 날것으로 먹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손님은 이내 한 점을 다시 집어먹었다.
“이렇게 먹으니 고기가 쫀득하구먼.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
“하하. 그렇죠?”
“주인장, 이거 언제 또 팔겠는가? 술이 생각나는 맛이구만.”
“늘상 팔지는 않고, 신선한 말고기가 들어오면 그때그때 팔겠습니다.”
이정도 반응이면 성공이다.
내가 세 형님들에게 부탁한 것은 고기를 최대한 얇게 썰라는 것.
말고기는 익히면 오히려 질겨지고, 육회로 먹을 때 식감이 좋다.
칼솜씨 좋은 형님들이 얄팍하게 썰어주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거기다 달짝한 양념이 묻은 고기맛을 물김치로 개운하게 씻어내리니 메뉴 합도 더할 것 없이 좋았다.
손님은 주먹밥에 육회를 곁들여 맛있게 먹은 뒤 일어났다.
“자, 봤지요 형님들? 맛있게 드셨답니다.”
이유제가 커텐을 걷었다. 삼형제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유제다점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전부 말고기 육회를 서비스로 맛 보여주었다.
날고기에 대한 거부감은 있을지언정, 달짝한 양념을 모두가 좋아했다.
신선한 말고기는 양이 꽤 많아서, 손님들 모두를 먹이고도 넉넉히 남았다.
영업 종료 후.
“자, 고생하셨습니다 형님들-”
불이 모두 꺼지고 등잔불 하나만 남겨놓은 유제다점.
주황 불빛 아래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와 이유제가 술잔을 부딪혔다.
손님들이 모두 나간 뒤의 아늑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주인장과 그 지인들만의 특권이었다.
안주는 당연히 말고기 육회였다.
“음, 이제보니 상당히 아까운 고기였구만 그래.”
유비가 화색했다.
간장과 꿀의 단짠을 말고기의 감칠맛이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크으- 술맛 좋다.”
칼을 휘두르는 것이 이런 방향으로 생산적일 수 있다니.
노동 뒤에 마시는 술은 꿀맛이었다.
“전쟁통에 팔아도 팔릴 맛이구먼.”
그때였다.
똑똑-
“주인장 계신가?”
누군가 찾아왔다.
“아, 지금은 문을 닫았습...”
이유제는 손님을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
“누군데 그러는가?”
장비가 반사적으로 칼을 쥐었다. 그러나 칼로 상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주인장, 바쁘신가?”
장세평이었다.
이유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유비와 관우, 장비가 탁현을 떠날 무렵, 의군을 꾸릴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나타나 군마를 공짜로 준 사람이 있었다.
어차피 황건적에게 뺏길지 모르는데, 좋은 일 하는 사람에게 주겠다면서.
‘그 이가 바로 장세평.’
그리고 우린 말고기를 먹고 있지. 오해를 살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때 장비가 말했다.
“주인장, 아는 분이오? 마침 잘 됐네. 말고기나 같이 잡수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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