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이 태평요술서를 주었다

10화
“뭐? 말고기를 먹고 있다고?”
장세평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사이 상황을 알아채고 유비가 일어났다. 뭐라 설명하려는 것같았다.
그러나 장세평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나도 줘.”
술멤이 늘었다.
“마침 잘 됐구려. 남은 말을 어찌 처분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장세평이 말했다.
유비 관우 장비에게 넘기고 남은 말들이 있었는데, 군마로 팔기에는 허약해서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시 말고기를 쓰려나, 하고 물으려 했단다.
게다가 마침 꺼내놓은 말고기 육회가 그의 입맛에 딱 맞았나보다.
“음, 주인장의 솜씨라면 내 말들을 넘겨줄 수 있겠소.”
기분이 좋아진 그가 말고기를 싼값에 넘기기로 했다.
나는 얼른 오케이를 외쳤다.
***
어느 날이었다.
“아, 관우 형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울타리 너머로 키가 훌쩍 큰 관우가 보였다.
“주인장. 인사를 전하러 왔네. 아직 토벌하지 못한 황건적 일당이 있어서 출정하려 하네.”
“아...”
이유제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자네까지 상심 말게. 안 그래도 유비 형님께서도 정에 못 이겨 눈물을 보이시기에 내가 대신 인사를 고하러 온 것이야.”
“하지만...”
안 되는데. 지금 가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뻔하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주인장이 우리를 이렇게 생각해주니 감동이군. 좋은 술이나 담가놔 주게.
술이 익기 전에 돌아올 테니.”
이 형은 역시 낭만이 있다.
“관 형!”
“뭔가?”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
탁군을 떠나 출정하는 길. 군사들의 사기가 특별히 드높았다.
“어서 오십시오!”
이유제의 푸드트럭이 함께였기 때문이다.
언제 한 번 수레를 끌고 연습삼아 나가야지, 싶었는데 마침 지금이 딱 좋은 기회였다.
우리 든든한 세 형님들이 등 뒤에 버티고 섰고, 앞에는 배고픈 장병들이 그득하니
장사목으로 따지면 이곳이 배산임수 명당이다.
고된 행군길에 맛있는 먹거리란 그야말로 군사들의 낙이었다.
유비 역시 그 공을 알고 치하했다.
“유제 동생이 따라와주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네.”
“아닙니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만 하시게.”
“저, 그럼...”
나는 주저하다가 이야길 꺼냈다.
“말고기 좀 썰어주세요.”
그날 이후 삼형제는 막사에 들어앉은 때면 칼을 휘두르며 말고기를 썰었다.
챡챡챡-
“캬, 기계보다 낫네.”
고기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유관장 삼형제가 떠나겠다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안 되는데. 지금 가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뻔히 보이는 걸.’
말고기.
이유제가 반대를 무릅쓰고 행군을 따라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장세평에게 받아온 말고기가 한가득 쌓여 있는데, 이걸 나 혼자 어떻게 다 썬단 말인가?
그랬다간 인건비로 재정이 파탄나거나, 오십견이 이십 년은 빨리 올 것이다.
그래서 붙잡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내 고기 써는 기계들, 못 보내.’
기계로 썬 것처럼 얄팍하고 반듯한 말고기.
이건 유관장이 함께하는 여기서만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유제도 날로 얻을 생각은 없었다.
‘형님들 인건비는 후하게 쳐드려야지.’
판판한 솥뚜껑을 구해 왔다. 그 위에 얇게 썬 말고기를 착착 펼쳤다.
‘이제 요리 끝.’
나머지는 자연에 맡기면 된다.
그늘의 찬기로 식히고, 바람에 맡겨 꾸덕하게 말린다.
그리고 마지막은 불의 힘을 빌린다.
“이거 불 옆에 좀 둬줄래?”
밥 짓는 병사에게 일러 아궁이 옆에 두게 했다.
‘이렇게 하면 장작이 타닥타닥 탈 때마다 훈연 향을 입혀주지.
수분은 싹 날려서 감칠맛만 남기고 말이야.‘
그야말로 자연이 빚어낸, 맛있는 육포다.
질겅질겅.
그날 밤, 병사들은 불가에 모여앉아 말도 없이 육포만 씹었다.
감칠맛이 잇새 사이에 머물다가 어느새 단맛으로 바뀌었다.
‘이 맛이지.’
입을 움직이는 활동 중에 제일 재미있는 건 질긴 육포를 자근자근 씹어서 그 안에 배인 고기맛을 빨아먹는 것이다.
모두가 이 시간을 사랑했다.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며 육포를 씹으니 온 세상을 다 씹어넘길 수 있을것같은 기분이었다.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준 이유제에게 어느덧 병사들까지 정이 들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다점에 한잔하러 꼭 들러겠습니다”
이유제가 탁현으로 돌아가던 날, 병사들은 진심을 담아 배웅해주었다.
***
탁현으로 가는 길.
드르륵- 드르륵-
이유제가 수레를 끌며 홀로 걸었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같다. 올 때 걸었던 길은 분명 이렇지가 않았다.
이유제는 찻잎을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육포는 아껴두기로 했다.
산길을 오르고, 바위를 타넘던 이유제가 마침내 쓰러졌다.
“이제 더는 못 가.”
이유제는 아늑해 보이는 동굴을 찾아 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는 게 나을 것같다.
그런데...
“으악, 깜짝이야!”
동굴 안에 사람이 있었다. 백발의 노인장이었다.
“실례합니다. 같이 좀 쓰겠습니다.”
“...”
노인장은 대답이 없었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그는 노숙인 치고는 기개가 곧았다.
왠지 다가갈 수 없는 위엄에 이유제는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슬금슬금 눈치만 보는 그때.
“자네.”
노인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책 한 권을 쓱 내밀었다.
‘아, 책 파시는구나.’
“안 사요.”
이유제는 홱 돌아누웠다. 한자 까막눈인 자신이 이런 걸 사서 뭐 하랴.
한국에 살 때도 자기 이름 한자로 쓸 때마다 헷갈려서 휴대폰을 뒤적였다.
“자네, 이것이 뭔줄 아는가?”
노인장이 책을 흔들었다.
[태평요술서]
한자로 적힌 그 글자를 이유제가 알아볼 리 없었다.
아, 중국에서 한자 모른다고 하긴 좀 민망한데.
“저 이미 다 공부한 책이라서 괜찮아요.”
“...이미 다 공부했다고?”
“네. 그러니까 다른 데 가서 파세요.”
“그냥 주겠네.”
이유제의 눈이 번쩍 떠졌다.
마침 동굴 안이 추웠다. 저걸 박박 찢어서 덮으면 딱일텐데.
“저... 그럼 감사합니다.”
이유제가 책을 받았다. 바로 이걸 덮고 자는 건 실례일 테니, 대충 책을 읽는 척했다.
“먼젓번엔 이것을 잘못된 사람에게 주고 말았네.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되고 말았지.”
노인이 한탄했다.
“왜요? 나쁜 사람이었나 봐요?”
노인이 파는 물건을 누가 제값 치르지 않고 가져갔나, 싶었다.
“그래. 아주 나쁜 사람이지. 장각 이라고 하는...”
“!”
장각이라면... 황건당의 수장이지 않은가.
장각은 원래 산중에 사는 약초꾼이었는데, 어느날 신비한 신선을 만났다고 한다.
신선이 건네준 책을 받고 도술을 익혔다나.
그리고 그 책이 바로...
“태평요술서...”
이유제가 그제야 책등에 적힌 한자를 다시 보았다.
중간 것은 복잡해서 모르겠고, 앞의 두 글자는 틀림없이 ‘태평’이었다.
이게 진짜 태평요술서라고?
“어르신, 이걸 대체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물었다.
“자네, 도술을 익히면 제일 먼저 뭘 하고싶은가?”
도술, 도술이라...
“푸드트럭에 가스좀 연결하고 싶습니다.”
도술보단 과학이 간절했다.
“후하하하!”
노인은 만족스런 듯이 한바탕 웃어제꼈다. 푸드트럭이 뭔지, 가스가 뭔지 아는 것일까?
“이제야 바른 인물을 찾았군. 엉뚱한 대답을 했다면 책의 내용이 싹 지워졌을 걸세.”
과연 책은 멀쩡했다. 하지만 안 지워졌으면 뭐 하랴, 어차피 못 읽는 것.
그때 노인이 지팡이로 이유제의 머리를 한 번 툭, 건드렸다.
“자, 이제 보일 걸세.”
“!”
이유제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르신, 이렇게 신통할 데가. 제게 한자를 깨치게 하다니요!”
구몬쌤도 못한 걸.
방금까지 구불구불한 그림으로 보였던 한자가 한글처럼 읽혔다.
“거기에 자네가 배우고싶은 내용이 전부 들어있네.”
이유제는 책을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다.
노인의 말은 정말이었다. 이유제가 뭔가를 궁금해 하면, 바로 다음 페이지에 그 내용이 적혀내려갔다.
이유제는 찻잎을 씹어 카페인이 팽팽 도는 두뇌로 책을 읽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책이 마음에 드나 보군. 어떤가. 이걸 받아주겠나?”
“이 귀한 걸... 정말 제가 가져도 되는 건가요?”
“물론일세.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데 써주겠다고 약속한다면야.”
“약속... 합니다.”
띠링-
그 순간 상태창에 올라온 메시지.
[삼국지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뭐...?
이유제는 어리둥절해했다.
‘형이 시스템이었어?’
“자네, 원래는 이곳 사람이 아닌 게지? 원래 자네가 쓰던 언어로 전달되고 있을걸세.”
아래로 내용이 더 이어졌다.
[퀘스트: 남화노선에게 태평요술서를 받아라.]
[보상: 태평요술서 획득]
무슨 이런 직관적인 퀘스트와 보상이 다 있단 말인가.
“혹시... 이걸 거절하면 어찌 됩니까?”
“자네가 살던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걸세.”
“예...?”
그건 좀 싫은데. 내일 아침 생활관에서 나팔소리 들으면서 깨라고?
“미안하네. 자네를 이 세계로 불러온 건 바로 나일세.”
“어째서 접니까?”
“무작위네.”
씨이...
“세상은 난세를 맞았지. 새로운 영웅이 필요한 때야.
그래서 이 세상 바깥에서 새로운 인물을 모셔온 것일세. 이해해주게.”
노인이 다시 한번 물었다.
“태평요술서를 받아주겠는가?”
이유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
조금 걷자 민가가 나왔다. 이유제는 수레를 끌며 음식을 팔았다.
움직이면서 차도 팔고, 주먹밥도 파는 게 신기한지 사람들이 재미로 음식을 사먹었다.
“식당입니까?”
“네, 맞습니다.”
“냉차라니, 특이하구먼. 뜨거운 차는 없습니까?”
“없...”
있다.
분명 태평 요술서에 화롯불을 자유자재로 쓰는 방법이 있었단 말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유제는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퀘스트: 다점으로 돌아가 첫 손님을 만족시켜라.]
[보상: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화로]
퀘스트가 떴다.
아, 이거 공짜로 해주는 게 아니었어?
태평요술서와 나, 서로 기브 앤 테이크 였다니.
여튼 이유제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퀘스트가 그다지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거니와
앞에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유제가 따끈따끈한 차를 내밀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소원대로 화로는 얌전히 잘 탔다.
이전에는 화로를 가지고 장사를 하려 해도 불이 일정하지도 않거니와, 연기가 나서 힘들었는데 태평요술서에 적힌 대로 해보니 효과가 좋았다.
‘수레 한구석에 처박아둔 화로가 이렇게 쓰이다니.’
마치 생각대로 움직이는 가스버너를 얻은 것 같았다.
‘이제 이것만 있으면 어떤 전란이 와도 피해다닐 수 있어. 가게를 통째로 들고 다니는 거지.’
새로운 아이템의 등장에 이유제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러나 큰 폭풍은 때를 가려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유제는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주인장! 그것이...”
그때 끼어드는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
“네가 이 집의 주인이냐?”
그렇게 묻는 여인은 한 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온갖 패물로 치장한 모습이 마치 화려한 공작새와 같았다.
고운 선을 그리는 미인이었으나, 눈초리 하나만큼은 베일 듯이 표독스러웠다.
그런 사람이 우리집 앞에 서있으니 이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네, 저희 집이 맞습니다만...”
그때 시녀가 채근했다.
“뭐 하느냐! 얼른 황후마마께 예를 올리지 않고.”
뭐, 황후마마?
이 시대의 황후라면 필시... 영사황후.
십상시의 아첨에 넘어가 나라를 말아먹은, 훗날 하 태후로 잘 알려진 여인이다.
하 태후가 왜 우리 집에?
[퀘스트: 다점으로 돌아가 첫 손님을 만족시켜라.]
이유제의 머릿속에 퀘스트가 맴돌았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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