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태후에게 돼지껍데기를 볶아주었다

11화
[퀘스트: 다점으로 돌아가 첫 손님을 만족시켜라.]
운도 참 없다. 하필 그 첫 손님이란 게 왜 하태후냔 말인가?
‘이것도 시스템의 농간인 건가...’
하 태후가 부채를 팔랑였다.
마치 하 태후의 외모처럼, 고혹적이지만 독한 향수냄새가 퍼졌다.
“윽.”
나도 모르게 소릴 흘리고 말았다. 쌀국수에나 넣어먹으면 딱일 것같은 향내였다.
“누추한 집에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흐흐. 설마 유제 다점의 명성을 듣고 온 건가?
시녀가 대신 답했다.
“마마께서 연이은 정사로 몸을 살필 기회가 없으셨는데, 탁현의 물이 맑다는 이야길 듣고 친히 걸음하셨다.”
대충 놀러왔다는 뜻이구나.
“길을 가던 중에 너희 집 마당의 열매가 예쁘기에 들렀다. 먹는 것이냐?”
하 태후가 빨갛게 익은 고추 열매를 만작였다.
앙증맞은 것이 불그레하게 예쁘니 지나가다 눈을 뗄수 없었나보다.
오우 쉣. 잘못하다 뺏기게 생겼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되옵니다. 드시면 큰일나옵니다.
함부로 드셨다간 입이 아리고 숨이 막혀 눈물이 나옵니다.”
갑자기 하태후가 빽 소릴 질렀다.
“어디 거짓을 고하느냐!”
허리가 가느다래 한 손에 잡힐 것같은 여인이 어떻게 사자후를 쓰는 것일까.
“세상에 그런 열매가 어디 있느냐. 네가 나를 천출이라 여기고 업신여기는구나-”
아니 그럼 먹어보던가...
간신히 말을 억누르고 있는데, 하태후가 정말로 고추를 따서 입에 넣는 게 아닌가.
“안돼-”
“커억.”
그러나 이미 늦었다. 태후가 얼굴이 벌게 기침을 하고, 시종들이 놀라 태후를 깨웠다.
“저, 저놈을... 당장... 사, 사...”
하 태후가 나를 부채로 가리켰다.
“사형시킬까요?”
“윽-”
다행히 하 태후는 말을 맺기 전에 기절했다.
***
축 늘어진 하 태후를 위해 내 방을 통째로 넘겨주어야 했다.
“네 이놈, 감히 마마께 엉뚱한 열매를 바치다니.
마마께서 깨어나시면 엄벌로 다스려야 마땅한 줄 알아라-”
시녀가 윽박질렀다.
뭐 이렇단 말인가. 이쯤되면 한나라는 망해야 되는 게 맞다.
나는 마당에 쓸쓸히 자리를 폈다.
“유비 형... 언제 와요?”
유비가 짜준 돗자리를 덮으니 따스한 짚풀 냄새가 확 올라왔다. 문득 영웅이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다음 날.
나는 찌뿌둥하게 일어났다. 세수도 하기 전에 가장 먼저 들은 말은...
“네놈, 아직 목이 붙어있었느냐?”
하 태후의 물음이었다.
“예...?”
아. 잠깐.
나는 위아래로 유비 형의 돗자리를 깔고, 덮었다. 흡사 죄인을 덮어놓은 모양새.
이 인간이... 나를 두동강 내서 돗자리로 가려놓은 줄 알았나 보다.
시녀가 끼어들었다.
“사형 시킬까요?”
아니, 이 아주머니는 나를 안 죽이면 녹봉이 깎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왜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인가.
“아니다, 죽이지 말거라. 마침 시장하구나. 너, 이 고을에서 꽤 유명한 숙수라지?”
후후. 그 와중에 내 요리 맛을 아나 보군.
“예, 맞습니다.”
“식사를 대령해라. 맛있으면 목숨값으로 쳐서 살려주마. 허나 맛이 없으면-”
차악. 하 태후가 부채를 모았다.
“지난 밤 나를 독살하려 한 네놈의 죄를 괘씸히 여겨, 네 시체를 저 열매 밭에 버리겠노라.”
지가 맘대로 집어먹고 무슨 소리야. 그러나 투덜거리고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얼른 부엌으로 향했다.
쌀, 물김치, 찻잎... 모두가 맛은 있지만 흔한 재료다.
하 태후는 백정 출신으로 태후 자리까지 오른 여인이다.
길바닥의 천한 음식부터 황궁의 산해진미까지, 웬만한 건 다 먹어봤을거란 말이다.
그런 여인에게 뭘 먹여줘야 만족하겠느냔 말인가?
“......”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탁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중에 하 태후가 좋아할만한 것.
딱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나는 급히 심부름꾼을 불러 말했다.
“지금 얼른 가서...”
“예? 그걸 사다 뭐에다 쓰시려고요?”
일반 백성도 먹지 않는 그런 것을 설마 태후께 진상하겠느냔 얼굴.
“얼른. 시간이 없소.”
***
한편 태후는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흐음. 역시 물이 맑은 고을이라 그런지 차맛이 좋구나.”
“그러나 마마, 찻잎이 하품이라 영 좋지 않습니다. 다른 것으로 대령하라 이를까요?”
그때 하 태후가 급발진을 했다.
“네가 감히 나를 천출이라 여겨 무시하는구나- 내가 찻잎인지 나뭇잎인지도 가릴 줄 모른다는 것이냐?”
백정 출신인 그녀는 얼마나 궁중에서 치였는지 이런 주제에 민감했다.
“마마, 그런 것이 아니옵고...”
“시끄럽다-!”
어후, 저 아줌마 히스테리 장난 아니네.
이유제는 초조하게 요리를 했다. 출신에 지독히 콤플렉스를 가진 그녀가
이 요리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 슬슬 걱정되었다.
***
시녀가 고했다.
“마마, 죄인이 요리를 가지고 왔사옵니다.”
벌써부터 죄인이라고 할거냐?
“들여라.”
나는 하 태후 앞에 소반을 내려놓았다. 차림새는 간단했다.
주먹밥 하나와 찻잔 하나, 그리고 찬 하나.
“이게 전부냐?”
“예, 마마. 본래 유제다점은 차와 주먹밥을 파옵니다. 가장 자신있는 것들로 내어왔습니다.”
“흐음... 일단 들어보지.”
하 태후는 심기가 불편해보였으나 배가 고팠다. 일단 음식을 먹고난 뒤에 벌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젓가락으로 주먹밥을 조금 떼어먹었다.
꿀꺽.
“어, 어어어어-!”
하 태후가 발작을 하듯 뒤로 넘어갔다.
“왜 그러십니까 마마!”
놀란 시녀가 달려들었다.
“너... 너 도대체 주먹밥에 무슨 짓을 한 거냐!”
하 태후가 숨까지 가쁘게 쉬며 물었다.
씨익. 맛있지?
이게 바로 레벨 MAX의 주먹밥 맛이다.
평소엔 잘 안 만들었는데, 오늘은 돈 몇 푼이 아니라 목숨이 걸린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레벨 MAX의 스페셜 주먹밥은 온 정신을 쏟아야 하나가 나온다.
손바닥으로 살살 굴려 밥알을 셀 수 있을정도로 집중을 해야 만들 수 있다.
당연히 체력 소비가 크기 때문에 평소엔 잘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 주먹밥, 정말 뛰어나구나!”
하 태후는 체면도 잊고 젓가락으로 주먹밥을 마구 파먹었다.
찹쌀처럼 차지고 벚꽃처럼 흩어지는 것이 정말 길가 다점의 주먹밥 맛인가.
“황후 폐하, 다른 것도 들어보시지요.”
내가 청했다. 스페셜 주먹밥은 어디까지나 안전빵으로 내놓은 것.
오늘의 메인 요리는 꼭 주먹밥과 같이 먹어야 한다.
“그럼 어디.”
하 태후가 젓가락을 들었다.
탱글-
“......”
투명하고 기묘한 생김새.
“이게 무엇이냐?”
이 아줌마, 진짜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백성이 모르고 황제가 몰라도 이 여인은 대번 알 텐데.
“저희 고향에서 즐겨먹던 음식이옵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래.”
별 거부감 없는 하 태후와는 달리, 오히려 시녀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요리를 보았다.
네모반듯한 모양이 국수와 같고, 투명한 것이 묵 같기도 한데 고기라니?
게다가 색깔이 불그레한 것이 꼭...
고추.
어제 하 태후가 먹다가 자빠지던, 그 고추색과 닮지 않았는가?
‘음...’
시녀는 영 의심스러워 먹지 않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에이씨, 알 게 뭐람.’
한바탕 하 태후의 히스테리에 당한 그녀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물컹.
하 태후의 입에 그것이 들어갔다.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맛을 보았다.
떡처럼 쫀득하다. 그러나 분명한 육향이 난다.
‘이건...!’
하 태후는 무엇인지 금세 알았다. 그러나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것은 바로 돼지 껍데기이므로.
하 태후가 백정 마을의 소녀였을 적이다.
살코기나 비계는 돈을 받고 팔곤 했지만 돼지꼬리나 창자, 간 따위는 팔지 않았다.
누린내가 나는 부위라 맛이 없을뿐더러, 팔더라도 헐값에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돼지 껍데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차라리 그것들을 모아다 집에서 먹곤 했다.
소녀적 그것을 몹시도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으로 요상하다.
백정 마을에 살 때는 꼴도 보기 싫었던 돼지껍데기라는 것이, 궁중으로 들어가자 희안하게도 한번씩 생각이 났다.
그러나 자신은 황후. 더 이상 소 돼지를 잡던 백정 소녀가 아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차마 구해오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맛 중의 최고는 아는 맛이거늘.
온갖 산해진미를 다 맛볼 수 있는 황후지만 정작 돼지 껍데기는 다시 못 먹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돼지껍데기를 먹다니!
“...고기 같기는 한데 이취가 없어 좋구나. 무슨 고기냐?”
황후가 모른 체 물었다. 이런 부위들은 으레 누린내가 나기 마련이다.
“돼지껍데기입니다. 다점에서 쓰는 찻잎으로 잡내를 제거했습니다.”
이유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하 태후는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 아는 맛인데 모르는 맛.
쫀쫀한 껍데기에 간장과 단맛이 스며들었다.
누린내가 날라 치면 마늘향이 톡 치고 올라오며 시선을 끌었다.
입이 텁텁해질 때 파를 한 점 집어먹으면 금세 다시 껍데기가 생각났다.
‘무엇보다도 혀를 잔잔하게 울리는 이 맛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이건...”
하 태후는 맛을 표현할 길을 몰라 말을 더듬었다.
혀가 아리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운하다.
아프고, 짜릿하고, 새침한 이 감각이 맛은 맞단 말인가?
“혀가 맵지요?”
“그래! 맵구나, 매워!”
마침내 꼭 맞는 단어를 찾았다는 듯, 하 태후가 외쳤다.
“아니 잠깐만.”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미인의 얼굴의 붉은끼가 얹어지니 놀라울만치 표독스런 인상이 되었다.
“그럼 혹시 여기에 고추를 넣었다는 것이냐-?”
그래, 맞다. 고춧가루 빠진 돼지껍데기가 뭐냔 말인가.
황건적의 진영에서 빼돌린 고추를 말려 가루로 빻은 것이 조금 있었기에 넣어보았다.
“네놈이 감히-”
“쿨피쓰 드소서-”
나는 얼른 찻잔을 하 태후의 입에 물려주었다.
“읍-”
얼결에 받아마신 하 태후의 얼굴이 점차 가라앉았다.
“하아-”
마침내 그녀가 숨을 내뱉었다.
잔에 든 것은 복숭아 주스.
복숭아 식초와 과육을 으깨서 잘 섞었다. 거기다 좋은 벌꿀을 듬뿍 넣었으니,
매운 맛을 달래기에 그만이었다.
“좋구나.”
매운 맛을 씻어내리는 단맛.
이 자이언트드롭을 느낀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복숭아향 뒤에 은근히 남는 아릿한 매운맛이 껍데기를 더 먹으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조화를 깨달은 걸까, 하태후의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강한 양념에 익숙해질 무렵 주먹밥으로 진정시킨다.
호되게 당한 혓바닥이 쌀알을 쓰다듬으며 한 박자 쉬어간다.
그때 쿨피쓰로 시원하게 한번 씻어내린다.
이렇게 한번 혀의 고통을 망각하고 나면 또다시 찾게 되는 게 바로 매운맛의 무서움이었다.
“네 고향에서 먹는 음식이라 했느냐?”
“예.”
“어디에서 왔느냐?”
“사람들이 미식을 좋아하여 동서방의 먹거리를 한 식탁에 늘어놓고 먹는 나라에서 왔사옵니다.”
“뭐라? 그런 곳이 있느냐?”
“예. 사람들이 세 끼를 정해놓고 먹되, 간식거리는 때를 정해놓지 않고 끊임없이 먹습니다.”
“이런!”
“언제나 음식을 먹고싶어하여 당장에 먹을거리가 없다면, 남이 먹는 것이라도 지켜보려 합니다.”
그걸 먹방이라고 하지.
“놀랍기 그지없구나!”
하 태후가 아직 열이 오르는 얼굴을 부채질하며 말했다.
“고추란 것이 참 기이하도다. 어찌 내 음식에 이것을 넣었느냐?”
“마마께서 제 충심을 오해하고 고추를 미워하시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고추 먹고 죽을뻔 했다고 우기지 말라고 넣은 것이다.
맛있게 먹은 음식에 알고보니 고추가 들어갔다고 하면, 더는 트집을 잡지 못할 것이 아닌가.
물론 고추를 처음 먹어보는 맵찔이임을 감안해 소량만 넣었지만.
거기다 돼지껍데기는 빨간 양념이 생명인 음식.
“네 뜻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만일 하 태후가 하늘을 나는 새를 가리키며 잡아먹겠다 하면, 점심 상에 그 새가 올라올 것이다.
뭐든 먹을 수 있고, 뭐든 아쉬운 것 없는 여인을 만족시키려면
오히려 아는 맛을 활용하는 게 최고다.
“고추가 이렇습니다, 마마. 함부로 사용하면 독이 되고, 잘 사용하면 음식이 되옵니다.”
“그래. 신기하기도. 그런데 있잖아...”
하 태후가 어쩐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말했다.
이게 바로 황제를 꼬신 여인의 스킬일까?
“고추를 좀 나눠줄 수 있겠느냐?”
아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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