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사를 만나다

23화
동탁이 우릴 불러세웠다.
역시 이상했던 걸까?
잔뜩 겁먹은 그때, 동탁이 말했다.
“볶음밥 많이 가져와.”
“예, 상국.”
휴. 다행히 의심하지 않는다.
조조가 평소에 신임을 많이 쌓아두어 다행이었다.
조조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렸다.
“자네, 말 탈줄 아는가?”
“아니, 모릅니다.”
“그럼 내게 업혀 죽은 척을 하게.”
나를 업은 조조가 성문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말했다.
“상국께서 사람을 죽였네. 보기 흉하니 얼른 치우라셨네.
날랜 말 한필을 끌어다 주게.”
“예.”
동탁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일상이니, 등 뒤에 업힌 나를 시체로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지기도 조조의 얼굴을 익히 알았던 터라 다른 말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조조가 말을 몰고, 나는 말안장 뒤에 축 늘어져 계속 죽은척을 했다.
“성문을 열어라!”
기이이-
조조의 기지로 우리는 무사히 성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한편 황궁에선 이상함을 느낀 동탁이 시종을 불러 물었다.
“볶음밥은 왜 안 가져오냐?”
꼬르륵.
동탁은 원래 한 끼에 5인분을 먹는다.
그런데 닭갈비를 조조에게 다 뺏기고, 볶음밥을 기다리고 앉아있자니 점점 짜증이 솟구쳤다.
알아보겠다고 나선 시종이 잠시 후 돌아와 말했다.
“문지기에게 물어보니 조조가 사람을 업고 급히 성문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었다면서요.”
“뭐? 볶음밥 가지러 가다 왜 죽어?”
‘잠깐.’
그제야 동탁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조조, 이 놈이 나를 죽이려다 실패하니 도망친게로구나!”
뿌득, 이를 갈았다.
“각 관문에 일러 조조 이놈을 잡아들이라 해라!”
동탁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
조조와 내가 탄 말이 달렸다.
크콱-크콱-
말이 한 번을 내딛을 때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같았다.
“조금만 참게. 이제 성문을 빠져나왔으니 도망칠 수 있을걸세.”
“우웨엑-”
나는 못 참고 토를 했다. 더 이상 말을 탈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우리는 말을 버리고 걷기로 했다.
조조는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관에서는 남자 두 명으로 알고 쫓고 있을 게 아닌가. 자네가 여장을 하는 걸세.”
“여장이요?”
그건 수학여행 장기자랑 때도 안했던 건데.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저잣거리에서 적당한 여자 옷을 한 벌 사다가 입었다.
그러나 여자 옷을 입고 보니 영 아닌 것이다.
단순히 머리카락을 기른다고 여자처럼 보이지 않듯이, 여자옷 입는다고 도저히 여자로 봐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샤프하게 생긴 조조가 여장을 하는 게 더 그럴싸할 듯 싶었다.
“그냥 조조 형이 여장 해요.”
“아니, 난 싫어.”
“왜요?”
“난 수염 있잖아.”
“밀면 되죠?”
살기 위해 무얼 못하랴.
그러나 조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조조의 아버지는 환관이었는데, 은연중에 출신 콤플렉스가 있었던 조조는
환관을 연상시키는 그 어느것도 꺼려했다.
“아, 형이 해요.”
“싫다니까.”
“그럼 제가 해줄게요.”
“함부로 벗기지 마.”
“너네 뭐 하냐?”
결국 근처를 돌던 수비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나란히 묶여 현령 앞에 추포되었다.
“너희의 죄를 알렸다!”
“역적을 죽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한 것을 어찌 죄라 하오!”
조조가 기세좋게 외쳤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현령은...
“무슨 소리야? 남색으로 잡혀온 건데?”
‘아이씨...’
옆에서 조조가 낮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죽어도 이런 이유로 죽다니.
불명예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말아라. 못다 이룬 사랑을 죽어서 이룰 수 있도록 함께 묻어주마.”
싫어요...
“이놈들을 당장 투옥시켜라!”
“아아, 이 나라엔 정녕 희망이 없는 것인가.”
조조가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
늦은 밤.
조조와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이제 어떻게 되려나? 동탁에게 도로 잡혀가게 될까?
아니면 그 이전에 사형 당할까?’
그때 옥문 밖에 누가 찾아왔다.
다름아닌, 아까 우리를 심문하던 현령이다.
“그대들은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했지?”
이 자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조조, 그대의 얼굴을 묘사한 글이 여기저기 퍼졌소.
내일 아침이면 그림도 뿌려질 테지. 도망치긴 글렀소.”
“희망 없는 세상,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더 욕보이지 말고 죽여라.”
조조가 비장하게 말했다.
“아니, 나를 오해하지 마시오. 나 역시 역적 동탁을 죽이고 싶으나 방도가 없어 탄식하던 참이오. 어찌 그대들같은 의인을 죽이겠소?”
어라...?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고 현령을 바로 보았다.
“진궁이라 하오.”
역시 진궁이었구나.
진궁은 삼국지에서 조조를 구해준 인물이다.
삼국지에서 조조는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이를 깨달은 동탁은 조조를 잡아들이라 명하는데,
중모현에 이르러 조조는 검문에 걸렸다.
그때 그를 살려준 것이 바로 현령 진궁이다.
‘불의를 미워하는, 정의감 넘치는 캐릭터지.’
진궁이라면 믿을 수 있다.
옥문 밖에서 진궁이 말했다.
“지금은 큰 일을 도모할 때요.”
어차피 자신도 한나라에는 염증을 느껴 관직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조는 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으나, 내가 믿어보자 설득했다.
조조와 나, 진궁 세 사람은 동이 트기 전에 감옥을 빠져나갔다.
중모현을 빠져나가 먼 길을 떠났다.
조조의 염소 수염이 여전히 눈에 띄었으므로 끝을 둥글게 다듬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진궁은 현령의 인장을 내밀며 길을 뚫었고, 조조는 위기 때마다 기지를 발휘했으며,
나는 밥을 했다.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식량이 넉넉지 않았다.
쌀이나 잡곡을 조금 빼온 게 전부였다.
조조와 진궁, 두 형님에게 대접할 거리라곤 밥 뿐이었다.
나는 그나마 성의있게 대접하기 위해 대나무를 잘라 쌀을 넣어 익혔다.
대통밥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산을 헤메는 우리에게 먹거리란 없었다.
대나무야말로 산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먹거리였다.
“이유제, 그대가 있어 참 다행이오.”
두 사람이 이유제의 요리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었다.
고된 여행길에 슬슬 지쳐가던 그때 조조가 말했다.
“이쪽으로 들렀다 가시지요.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분이 계십니다.
막역한 사이시니 분명 우리를 도와줄 겁니다.“
“마침 잘 됐구려.”
진궁이 화색했으나 나는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조가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고 있다.
‘여백사.’
우리는 지금 여백사의 집으로 가고 있다.
여백사.
조조와는 엄청난 악연으로 얽힌 사람이다.
나는 도저히 여백사의 집으로는 가기 싫었다.
“저기, 우리 그냥 지나치면 안 될까요?”
“무슨 말인가. 우리 전부 지쳤어. 이대로 가다간 쓰러져 죽고 마네.”
조조의 말도 일리가 있다.
누군가 우리를 알아보고 붙잡아 세우면 더 이상 뿌리치고 달아날 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내가 여백사와의 악연을 막아보겠어.’
그 길 뿐이었다.
“오, 맹덕 네가 찾아와 주었느냐!”
여백사는 인상이 푸근한 할아버지였다.
밥도 주고, 술도 주고, 잠자리도 주었다.
여백사의 환대에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나 혼자 불안에 떨었다.
삼국지에서 보았던 그 불행이 언제 닥쳐올까 불안했다.
그때 조조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저희가 동탁에게 쫓기는 중입니다 어르신.”
그 말을 들은 여백사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했다.
“죄는 도저히 덮어줄 수가 없네.”
“예?”
“역적 동탁의 죄는 도저히 덮어줄 수가 없단 말이네. 뭘 그리 놀라나?”
아, 깜짝이야...
여백사는 특이하게도 주어를 생략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유제는 불안했다.
‘그 불행’이란, 다름아닌 말에서 비롯된 사건이기 때문.
그런데 말을 좀 요상하게 하는 것은 가풍인 듯하다.
여백사 뿐만이 아니라, 그 식솔들도 말버릇이 특이했다.
“아버지께선 공들을 반길지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예?”
“저는 격하게 반깁니다.”
아니, 오해좀 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
여백사.
삼국지의 비운의 인물이다.
그에 관련된 일화는 이렇다.
인정이 많은 여백사는 조조를 친아들처럼 반겼다.
맛있는 술까지 사오겠다며 직접 길을 나섰다.
그런데 조조와 진궁은 그의 식솔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버리고 만다.
“산 채로 잡을까, 묶어서 잡을까?”
이놈들이 나를 방심시켜 놓고 동탁에게 갖다 바치려 하는구나, 하고 오해한 조조는
그들을 싹 죽여버린다.
그런데 웬걸, 여백사의 식솔들은 돼지를 잡으려던 것뿐이었다.
돼지를 잡아 손님대접을 해주려던 식솔들은 조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아아,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후환을 걱정한 조조는 끝내 여백사마저 죽여버린다.
‘어릴 때 삼국지에서 보고 엄청 충격받았던 에피소드지.’
이유제가 생각했다.
지금 눈앞에서 허허 웃는 착한 할아버지가 곧 죽을 예정이라니,
마음 한구석이 캄캄했다.
그때 여백사가 말했다.
“귀한 손님이 와주었으니 제대로 대접해야지.”
안돼. 그 멘트 하지마.
“나는 좋은 술을 사러 나갔다 오마. 편히 쉬도록 해라.”
제발. 그 말 하지 말라고.
여백사는 그 길로 밖으로 나갔다.
삼국지에서 보았던 그대로.
‘아니야. 이대로 있을 순 없어.’
이유제가 생각했다.
이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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