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할줄 알았습니까?

24화
“조조, 너를 소홀히 대접할 수는 없다. 내 아들같은 녀석이니까.”
여백사는 결국 술을 사러 나섰다.
삼국지에서 나온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 친절한 할아버지는 자신의 호의가 어떤 비수로 되돌아올지 전혀 모르겠지.
‘이대로 둘 순 없다.’
이유제가 불행을 꼭 막으리라 다짐했다.
여백사가 죽어버린다면 꿈자리가 뒤숭숭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조조와 살인 공범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아무리 아니라 한들 이제껏 조조와 자신은 한몸처럼 붙어있었으니.
이유제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닫힌 부엌문 사이로 집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 놈이야.”
“힘이 세 보이는데.”
“방심한 때를 노려 가격하자.”
오싹.
삼국지 전개를 알고 있는 이유제지만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돼지를 묶어놓고 잡을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돼지가 아니라면?
정말로 나와 조조, 진궁을 잡으려 든다면?
두근두근.
어느새 의심이 뾰족이 비져나왔다.
벌컥.
고민하던 그때, 문이 안에서부터 열렸다.
“오, 손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여백사의 식솔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가만히 있기가 면구스러워 음식이라도 좀 하려 합니다.”
이유제가 말했다.
요리를 돕겠다는 이유제와, 말리는 남자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일었다.
결국 남자가 졌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손을 좀 빌려주십시오. 닭을 잡으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유제가 들어간 순간, 남자가 문을 달칵 걸어잠그는 게 아닌가.
“...라고 할줄 알았습니까?”
싹 변한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아차. 걸렸다 싶은 순간.
“손님께 닭을 잡으라 시키다니요. 정말 그럴 줄 알았습니까?”
...말 좀 그렇게하지 말랬지.
“손님께선 편히 구경만 하십시오.”
여백사의 식솔들이 닭을 잡기 시작했다.
한 눈에도 토실토실 살이 잘 오른 것이, 잘 대접하고 싶은 여백사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역시 무고한 사람들이야. 죽게 둬선 안 돼.’
이유제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식솔들은 자신들이 잡은 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세 놈을 이렇게 보내는군.”
“좀 불쌍하지 않아? 아버지를 믿고 우리 집으로 왔을텐데.”
“명이 짧은 것도 운명인 것을.”
...역시 이 자들은 말이 너무 많다.
만약 조조가 우연히 문 밖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면 오해하고도 남는단 말이다.
‘말로 화를 입지 않게 하려면, 애초에 말을 못하게 막는 게 최고지.’
“자, 이제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이유제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저는 황제의 만찬도 차려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께도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황제한테 탕후루 엄청 만들어 줬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내심 이유제의 솜씨가 궁금했던 여백사의 식솔들이 못이긴 척 물러나며 말했다.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물론이지.’
이유제가 생각했다.
‘하다 보면 힘들어서 대화 나눌 기력도 없어질 거다.’
말할 힘도 없게 진을 빼놓을 생각이다.
이유제는 곡식 창고 안을 돌아보았다.
“어디 보자...”
마침 필요한 재료들이 다 모여있었다.
콩, 깨, 호박씨, 그리고 호두까지.
역시 대가족의 창고 안이라 그런지 먹을것이 꽉꽉 들어찼다.
이유제가 곡물 한줌 씩을 내밀며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이것들을 잘 빻아 가루를 내어 주십시오.”
식솔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자, 이것들을 쳐서 형체도 남기지 말자!”
제발 말조심 좀...
이 난세에 이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쿵. 쿵. 쿵.
다행히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다들 곡식을 빻는 데만 집중했다.
“그런데 곡식을 빻아서 어디에다 쓰시렵니까?”
여백사의 식솔이 물었다.
곡식을 이렇게 곱게 빻으면 죽도, 밥도 안 되지 않은가.
황제의 요리사라고 하니 기대가 크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슨 요리를 하려는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열치열.”
“예?”
“무더운 여름에는 오히려 더운 것을 먹어서 더위를 다스린단 뜻입니다.
저희 고향에서 하던 방식이죠.”
그야말로 광기의 음식인 이것은 바로, 삼계탕이다.
이유제가 가마솥에 물을 팔팔 끓이는 것을 보고 식솔 하나가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하. 닭을 삶으려는 것이지요? 저희들도 자주 먹습니다.”
이유제가 더 이상은 비밀이라는 듯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었다.
이들이 더 말하게 두는 것은 옳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삶는 닭은 처음 볼 걸.’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이유제가 가마솥을 열었다.
“완성입니다.”
훅 쐬어지는 증기에 기름진 육향이 묻어났다.
“닭 삶은 것은 많이 보았지만 이건 냄새가 참 좋습니다!”
식솔 하나가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닭고기 맞습니까?”
원래 닭고기 삶은 물은 반투명이다.
그런데 지금 가마솥 안에서 푹푹 끓는 국물은 우유처럼 빛깔이 뽀얗지 않은가.
꼭 사골 같았다.
‘그래. 이런 국물 색깔은 처음 보았지?’
그토록 곡식을 빻게 시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여름 날 삼계탕 뚝배기를 앞에 두고
뽀얗게 찢은 닭고기 한 점, 기름 둥둥 국물 한 수저를 떠넣다 보면 어느새 뜨거움을 즐기게 된다.
그런데 먹을수록 좀 물리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
삼계탕은 원래 슴슴한 매력에 먹는 음식이긴 하지만,
어느순간 퍽퍽한 닭고기보다는 깍두기 맛으로 먹게 된다.
‘그러니까 난 국물 맛으로 치고 나간다.’
전부 국물 맛을 위한 빅픽쳐였다.
곱게 빻은 깨, 콩, 호박씨, 호두 등을 면보에 감싸 주머니를 만든다.
펄펄 끓는 가마솥 안에 주머니를 넣었다, 뺐다 하면 어느새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온다.
곡식의 뽀얀 빛깔과 구수한 단맛이 더해지면 이것만 들이켜도 든든한 국물이다.
여기다가 닭고기를 넣는다.
뽀얗던 국물은 어느새 닭기름을 둥둥 띄우고 푹푹 끓는다.
국물이 한 번 왈칵 솟을 때마다 감칠맛이 쭉쭉 뽑혀나는 기분.
‘곡식과 고기를 한가득 담았으니 이거야말로 여름 보양식이지.’
역시 삼계탕은 뚝배기다.
잘생긴 질그릇을 찾아다 놓고 닭 둥지를 틀 듯 백숙을 넣는다.
파 송송 썰어넣고 뽀얀 국물 끼얹으면 이것으로 끝.
“와, 신기한 요리군요. 이런 건 무슨 맛입니까?”
식솔 하나가 물었다.
“이걸 먹으면 곧 죽게 될 겁니다.”
“예?”
식솔이 이유제의 대답을 듣고 놀랐다.
“음, 여기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인가요?
너무 맛있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여백사의 집에 있다보니 저도 모르게 말투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유제는 알지 못했다.
다행히 그런 화법에 익숙한 여백사의 식솔들은 곧바로 납득을 했다.
이유제가 밥상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자, 모두 조용히 모이십시오. 아무것도 모르고 편히 쉬고있을 테니.”
(시끄럽게 해서 방해하면 안 되니 말이죠.)
“그럼 그때를 노려서 한 방을 먹이는 겁니다.”
(그 때를 노려서 한방 재료로 끓인 삼계탕을 먹이는 겁니다.)
이유제를 비롯한 식솔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스레 밥상을 들이려는 바로 그때.
벌컥.
갑자기 부엌의 문이 확 열렸다.
“네 이놈들! 감히 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조조와 진궁이 오색 몽둥이를 양 손에 들고 외쳤다.
오색몽둥이는 겉보기엔 김밥 속재료처럼 알록달록하지만 꽤나 위협적인 물건이다.
팔뚝만한 몽둥이에 맞고서 무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단은 진정시켜야 해.’
이유제가 나서 말렸다.
“형님들,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그저 삼계탕을 대접하려고...”
“닥쳐라 이놈!”
조조가 이쪽으로 몽둥이를 겨누었다.
“그간 너를 한 편이라 믿었거늘 이렇게 배신을 하느냐?”
뭐라고?
지금 나를 의심한단 말인가?
“나를 못 믿고 배신한 것은 조조 당신입니다.
누가 무기도 들지 않은 채 사람을 해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형님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한 것 뿐이오.”
이유제가 간곡하게 말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조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기를 든 쪽은 분명 이유제가 아니라, 자신과 진궁이었다.
“네가 그리 당당하다면 먹어보아라. 그 안에 뭐가 들었을지 어찌 아느냐?”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은 게로군.’
씁쓸한 심정으로 이유제가 밥상 앞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닭다리를 맨손으로 건져올렸다.
손끝을 타고 뜨거움이 전해졌다.
하지만 지금 배신당한 마음보다 더 쓰라린 것은 없었다.
주욱-
닭고기를 얼마나 푹 삶았는지 이유제의 힘없는 손길에도 저항없이 찢어진다.
뽀얀 국물과 닭고기살이 서로의 색을 닮았다.
닭고기를 입 안에 넣는다.
쫀득한 닭다리살의 육질 사이로 기름이 배어나온다.
입안에 고기가 푸짐하게 담긴다.
퍽퍽해질 때쯤 뽀얀 국물을 흘려넣는다.
서로 겹쳐 맛을 잃는 조합이 있는가 하면,
서로 보완해 상승하는 맛이 있다.
곡물 삼계탕은 후자였다.
곡식 담은 구수한 국물이 닭고기의 감칠맛을 살살 끌어안는다.
퍽퍽한 고기는 국물에 적셔 먹고, 기름진 닭껍질은 국물에 씻어 먹는다.
하얗게 우러난 국물은 마치 어머니의 앞치마처럼 모든 맛을 감싸안아 줄테니.
‘맛있다.’
원래라면 조조와 먹게 되었을 이 맛을 혼자서 느끼며,
이유제는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닭 안에 넣어두었던 찹쌀죽까지 알뜰하게 긁어먹고 국물까지 싹 비워냈다.
일부러 보란 듯이 말이다.
“자, 이제 되었습니까?”
이유제가 실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조조를 마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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