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조조

25화
이로써 입증되었다.
삼계탕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고, 이유제는 무고하다.
나는 망연히 삼계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내 마지막 선물이니.”
“이보게...!”
조조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서로간 신뢰가 박살났는데, 여기서 뭘 더 한단 말인가?
조조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붙잡지 못했다.
대충 짐을 챙겨 떠나는데, 길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여백사를 마주쳤다.
“이보게, 어딜 가시는 겐가? 맛있는 술을 가져왔소만.”
여백사가 말했다.
“저는 사정이 있어 먼저 떠나려 합니다.”
“어, 어엇...!”
이유제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무고한 여백사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씁쓸한 마음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원래라면 여백사는 조조의 손에 식구들을 모두 잃고, 자신도 목숨을 잃고 만다.
진궁은 조조의 그 잔인성에 질려 곁을 떠나게 된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배드엔딩만은 막아낸 셈이다.
“이런... 우리가 경솔하여 벗을 실망케 하였네.”
이유제를 떠나보내며 진궁이 탄식했다.
“아니. 우물쭈물대다 우리가 당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조조의 냉담한 한 마디였다.
진궁은 역시 실망했는지, 그날 밤 곧바로 조조 곁을 떠났다.
***
이유제는 길을 물어 물어 탁현에 도착했다.
다행히 유제다점은 무사했다.
“아이구, 주인장! 이제야 오셨구먼.”
탁현 사람들이 이유제를 반겨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푸드트럭을 끌고 황제를 만나 동탁, 원소를 거쳐 조조를 만나기까지.
말로 담기에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과 유제다점을 보고 있자니
고단함이 싹 씻겨내려갔다.
‘그래. 내 집은 바로 여기야.’
이유제는 다점 장사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바로 다음날부터 유제다점은 장사를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의 장사 소식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열심히 주먹밥을 뭉쳐 손님들을 대접했고, 손님들은 오랜만에 돌아온 이유제를 반겼다.
“음, 오랜만에 먹으니 더 맛있구만!”
“안 보이는 동안 황궁에라도 가서 음식을 한 겐가? 솜씨가 더 좋아졌어!”
손님들의 머리 위로 일제히 [+1]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며,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주먹밥과 차 뿐이다.
귀한 재료도, 신기한 요리도 아닌 매일 팔던 주먹밥과 차일 뿐인데도 이렇게 좋아하다니.
영웅호걸들에게 요리를 대접하면서 이유제는 퍽 지쳐있었나 보다.
그 때문일까, 간만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졌다.
혼자 힘으로는 할수 없고 탁현의 바람과 공기를 빌려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 그런 음식을.
이것이 이유제가 탁현을 누리는 방법이었다.
시장에 가서 누룩을 사 왔다.
누룩은 만드는 지역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다.
장소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균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발효균도 다를 수밖에 없다.
탁현에서 만든 누룩이라면 말그대로 탁현의 공기맛을 머금은 녀석인 셈이다.
이 좋은 누룩을 정성스레 씻고, 잘게 부숴서 메주가루와 섞는다.
엿기름과 찹쌀풀을 잘 섞고, 고춧가루 아끼지 않고 팍팍 넣으면 고추장 완성!
‘아직은 그냥 뻘건 반죽에 가깝지만.’
장독대에 넣어두고 탁현의 품에 안겨놓으면 맛있는 언젠가 고추장이 될 것이다.
장독대를 통통 두드리며 고추장으로 어떤 음식을 만들까, 생각했다.
아니, 다른 것 필요없이 고추장에 밥 비벼서 후라이 하나 얹으면 그걸로 한국인의 소울푸드 완성인 거다.
‘올해도, 내년에도 장을 담가 먹을 거야.’
언제까지고 탁현에 머물겠다는, 이유제의 작은 맹세 의식이었다.
이유제는 그날 밤 달을 보며 기도했다.
오래오래 탁현에서 살게 해달라고.
불화살처럼 쏘아진 난세라는 놈도 탁현만큼은 피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그 바람은 오래지 않아 깨져버렸다.
한가롭게 장사하던 어느 날이었다.
“어서오세...”
콰앙.
“여기가 유제다점이냐?”
동탁이 쳐들어왔다.
***
‘조조, 이놈을 잡아 죽여야 하는데.’
동탁은 오만하게도 황궁의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생각했다.
이미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황제 이상이었다.
심기를 거스르는 말 한마디만 해도 동탁은 참지 못했다.
그런데 자길 암살하려 들다니.
그것도 믿고 있던 수하인 조조가 말이다.
타앙.
“일벌백계를 해야 한다!”
동탁이 분개했다.
동탁은 그 날로 관문을 틀어막고 조조를 잡아들이려 했다.
그런데 도저히 조조란 놈이 어디로 숨었는지 찾질 못하는 것이다.
“이이익...!”
동탁은 약이 오를대로 올랐다.
조조를 잡을 수 없다면, 같이 도망친 이유제라도 잡아야 한다.
“이유제란 놈 역시 죄가 막중하다! 조조를 도와 나를 죽이려 했느니라.”
이유제가 한때 자신의 군단 소속이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당시에 가까이 지내던 놈들을 끌어다 심문했다.
“이유제는 탁현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두말 할 것 없었다.
동탁은 곧장 군사를 이끌고 탁현에 도착했다.
콰앙.
“여기가 유제다점이냐?”
동탁이 다점 문을 부술 듯이 걷어차며 말했다.
물어 물어 얻은 정보가 거짓이 아니었다.
다점 안에 얼빠진 듯이 선 것은 틀림 없는 이유제였다.
‘안돼.’
이유제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했다.
그냥 동탁도 위험한데, 잔뜩 약이 오른 동탁을 마주하고 있다.
‘정신 차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그러면서 이유제는 낯빛을 고쳐 동탁에게 말했다.
“줄을 서십시오.”
“뭐?”
“사람들이 줄선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새치기는 곤란합니다.”
아니, 이 놈이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동탁이 이유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유제의 얼굴에는 원인 모를 당당함이 배어났다.
이유제는 영웅호걸을 마주하면서 겁먹은 모습을 보이면 더 불리하단 것을 알고있었다.
게다가 꼭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이것이 홈그라운드의 여유다.’
여기는 바로 유제다점.
이유제가 명성을 쌓고, 실력을 쌓아온 곳이란 말이다.
이곳에 선 이유제는 비로소 발 디딜 곳을 찾은 봉황처럼 당당했다.
온갖 영웅호걸을 대접해 보았다. 바로 여기, 유제다점에서.
동탁 역시 그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대적 못할 것도 없었다.
“...줄이 많다는데? 줄 좀 정리해라.”
동탁이 말했다.
“아 단체손님이시구나. 여기 앉으실게요!”
이유제가 다급히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때 부리는 가오는 객기일 뿐.’
빠른 태세전환이었다.
두렵지 않은 체하며 자신은 화를 피했지만, 그 화가 손님들에게 돌아갈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으악, 주인장. 이게 무슨 일이오?”
“살려주시오 주인장!”
동탁의 수신호 한 번에 줄줄이 끌려들어오는 사람들.
전부 이유제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여러 군데 얻어맞았는지 거동이 불편해보았다.
“이놈들 너랑 친한 것 같던데? 한번 손봐주었지.”
동탁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유제, 너는 조조를 도와 나를 암살하려 한 역적이다.
그런 역적놈이 탁현에 숨어들다니, 분명 너희 모두가 공범인 게야. 안 그러냐?”
뿌득. 이가 갈렸다.
하지만 탁현 사람들을 인질로 잡힌 이상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이 무슨 행패입니까! 내 잠재고객들에게!”
이유제가 외쳤다.
삼국지 세상을 살아내는 동안 그의 가치관은 퍽 난세를 닮아있었다.
동탁이 말했다.
“나 알지? 나는 인재라면 귀히 중용한다. 설사 그 이리같은 조조라 할지라도
곁에 가까이 두고 쓰는 것이 이 동탁이란 말이다.”
동탁이 잔뜩 거드름 피우며 말을 이었다.
“요리를 해라. 맛있으면 살려주고, 맛없으면 더 볼 일 없으니 죽어라.
여기 이 역적놈들과 함께 말이다.”
이유제가 이를 갈았다.
내 소중한 다점이. 소중한 잠재고객이 농락당하고 있다.
바로 이 역적 동탁놈에게, 역적 소리를 들으며.
어떡하지.
그래, 동탁의 스타일이라면 잘 알고 있다.
이자는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가능성 없는 조건을 제시해놓고 자비로운 척 실컷 즐기다가 싫증이 나면 그때 죽인단 말이다.
이미 한번 겪어보아 알고 있었다.
“자, 빨리 음식을 내어오너라! 배고프면 너희 탁현 놈들부터 하나씩 잡아먹어 줄테니. 으하하하!”
그리고 잠시 후 동탁이 받은 것은...
“뭐냐, 이 성의없는 건?”
생 날것의 고기와 야채였다.
“아, 알겠다. 네 제삿밥이냐?”
동탁의 어조가 사나워지는 것만으로 군사들의 살기가 등등해졌다.
“아니요, 여기 또 있습니다.”
이유제가 다급히 내놓은 것은 작은 냄비 하나였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본 동탁은 더더욱 분노하고 말았다.
냄비 안에서 끓는 것은 다름아닌 물.
물, 고기, 야채라.
“요리는 상국께서 직접 해드시면 됩니다.”
“네 이놈! 여봐라, 탁현 놈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라!”
동탁이 대노했다.
‘아, 안돼.’
이런 성격 급한 자를 보았나. 이유제는 빨리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샤브샤브!”
“...뭐?”
형을 집행하려던 동탁이 잠시 멈추었다.
“샤브샤브... 입니다!”
샤브샤브.
펄펄 끓는 육수에 날것의 재료를 넣고 익혀먹는 음식.
얄팍한 고기는 금세 익어버리기 때문에 잠시도 한눈을 팔수가 없다.
맛있는 상태에서 먹으려면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 샤브샤브.
바로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동탁의 눈을 돌려놓고, 얼른 도망치는 거다. 탁현 사람들을 데리고서.’
냄비를 옮기는 이유제의 손에 땀이 흘렀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