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에게 샤브샤브를 만들어주었다

26화
“샤브샤브라...”
처음 듣는 음식 이름에 동탁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제보니 고기도, 야채도 최상품의 것이었다.
산해진미에 익숙한 동탁은 그것을 단번에 알수 있었다.
“여기서 문제. 고기는 어떻게 익히는 것이 가장 맛있을까요?”
이유제가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용건만 말해, 용건만.”
동탁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동탁은 음식 앞에서 길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입맛대로 익히는 것이 최고겠지요.
세상 어느 맛있는 것을 가지고 와도 제 입맛에 맞는 게 최고인 법이니까요.”
“그렇지.”
“샤브샤브는 바로 그런 음식입니다. 덜 익힌 고기든, 바싹 익힌 고기든
상국의 입맛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오호라.”
혼신을 다해 입을 털었다. 다행히 먹혀들었는지, 동탁이 눈을 빛냈다.
다시마와 묵은 간장을 넣은 육수가 팔팔 끓었다.
이유제는 시범을 보이듯이 고기를 몇 점 집어넣었다.
바르르 끓는 육수에 고기가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어느새 딱 먹기좋게 익었다.
발그레 얼굴을 붉혔던 생고기는 이제 농익은 갈빛을 뿜어냈다.
“자.”
이유제가 냄비에서 고기 세 점을 빼내들어 동탁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왼쪽부터 바싹 익은 것, 적당히 익은 것, 그리고 살짝 덜 익힌 고기입니다.
최상품의 쇠고기를 요리했으니 어느것을 드셔도 맛이 좋을 겁니다.”
이유제가 소개한 순서대로 동탁이 집어먹었다.
바싹 익은 것은 판판한 들판처럼 감칠맛이 펼쳐지고,
적당히 익은 것은 그 위에 자라는 나무처럼 풍부한 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살짝 덜 익힌 마지막 것은...
“오. 이 맛은...”
“산들산들, 하늘하늘한 감칠맛이 느껴지지요?
마치 구름이 일어나는 것처럼요.”
“그래. 딱 그맛이다.”
동탁이 맛을 음미했다.
고기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지만, 약간 덜 익힐수록 감칠맛이 노골적으로 비져나오는 것이
동탁의 취향과 꼭 맞았다.
“뭐, 나쁘지 않구나. 물에다 고기를 끓여서 뭐 얼마나 맛있을까 했는데 말이다.”
“그렇지요?”
‘다행이군. 동탁이 음식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이 때를 틈타 슬쩍 이야기를 꺼내본다.
“여기에 야채를 넣으면 훨씬 맛있을텐데요. 포로 중에 장서방이 채소 텃밭을 가꾸는데 아주 싱싱하고 좋습니다.
잠깐 풀어주면 가서 좋은 야채를 구해다줄 텐데!”
“잠깐만.”
탁, 하고 동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왜 그러시죠?”
“너 지금 포로를 도망 시키려 야채 핑계를 대고 그런 것은 아니지?”
“설마요. 감히 상국의 앞에서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래, 아님 말고. 포로를 풀어주어라.”
동탁이 순순히 말을 들어주었다.
동탁은 황제조차 제 발 아래로 생각하는 자다.
설마 이유제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도로 잡아오면 그만일 테고.
이유제가 풀려난 장 서방에게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멀리 가시오, 멀리.’
이유제는 고기, 버섯, 야채, 향신료 등의 핑계를 대며 포로들을 하나 둘 도망시켰다.
가게에 있는 재료만으로도 몇 십인 분은 될 테니
포로들이 재료를 갖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당장에 티 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나 하나 도망시키다가, 마지막엔 내가 도망치면 된다.’
그것 외에 모두가 살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유제는 자신도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태평요술서를 남몰래 품에 숨겼다.
동탁은 무고한 백성조차 도적의 누명을 씌워 죽여버린 일이 있는데,
하물며 한 번 눈밖에 난 이들을 살려둘 리 만무하니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상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으하하하. 이거 씹지 않아도 고기가 술술 넘어가는구나.”
동탁이 밥을 너무 빨리 먹었다. 게다가...
“간만에 흥이 오르는군. 여봐라, 너희들도 둘러앉아 좀 먹도록 해라.”
“예.”
동탁은 호위하던 군사들을 불러모아 앉혀놓고 다함께 샤브샤브를 먹기 시작했다.
‘아, 이거 어쩌지...’
놀랍게도 그 많던 재료가 소진되기 시작했다.
“후하하.”
동탁이 고기 한 사발을 우르르 쏟아넣었다.
접시에 담아놓았던 고기가 후루룩 풀어지면서 국물을 머금었다.
국물에 닿은 부분부터 갈빛으로 변하는 것이 동탁의 눈에는 마치
가을을 맞는 장미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야채는 배가 부른줄도 모르고 자꾸자꾸 들어가는 음식이 아닌가.
동탁과 군사들이 끊임없이 먹어댔다.
“어랏. 고기가 없다. 더 가져와!”
“그, 그게...”
“뭘 머뭇거리느냐?
아니 잠깐. 음식을 가져온다던 포로들이 아직도 안 오고있지 않느냐?”
동탁의 얼굴이 금세 노기를 띄었다.
“설마했는데 네가 감히 나를 기만하는구나!”
동탁이 이유제의 멱살을 잡았다. 이유제가 땀을 뻘뻘 흘리는 그때.
“여기 돌아왔습니다!”
유제다점의 문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아, 아니...! 당신들이 대체 왜 여길!’
이유제의 눈이 커졌다.
일찌감치 도망시켰던 장 서방을 필두로 포로들이 전부 돌아와 있었다.
가슴팍에 저마다 재료들을 품은 채로.
고기, 야채, 버섯 등 이유제가 말했던 것들이 빠짐없이 품에 안겨있었다.
“여기 이것들을 구해 왔으니 주인장을 풀어주십시오!”
예상 밖의 전개다.
그래, 고맙고 또 고맙다.
하지만 탁현 사람들을 피신시켜야 다음 단추를 꿸 수 있는데,
이건 좀 낭패다.
‘원래는 사람들을 다 피신시켜 놓고 나도 숲으로 숨을 생각이었는데...
한두 명이 도망치면 금방 잡히겠지만 여러 명이 중구난방으로 도망치면
동탁도 갈피를 못 잡을테니까.’
“대체 왜 돌아온 것이오?”
이유제가 귓속말로 물었다.
“예? 야채랑 버섯을 가져오라면서요?”
...그냥 소통 오류였다.
그래도 다행히 동탁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은 것같다.
동탁은 다시 샤브샤브에만 집중했다.
“으하하. 이거 참 기묘하도다.”
샤브샤브는 끓을수록 맛이 우러난다.
처음에는 다시마를 엷게 우린 물이 혀에 은근히 달라붙는가 싶더니
야채를 넣자 배춧잎이 부채질하듯 풋풋한 채수가 된다.
고기를 몇 번 익혀먹자 부드러운 감칠맛을 머금은 육수가 완성된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소풍가는 가벼움으로 시작해 태산을 등반하는 묵직함으로 끝나는 맛이다.
“죽을 끓여드리겠습니다.”
이제 죽만 끓여주면 식사가 끝난다.
동탁이 음식을 맛있다고 할지, 맛없다고 할지 심판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치이이-
이유제가 냄비에 기름을 듬뿍 둘렀다.
야채와 고기의 부스러기는 하나도 버릴것이 없이 죽으로 재탄생한다.
마지막으로 계란하나 톡, 깨주면
채수와 육수가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 샤브샤브 죽이 완성된다.
“으윽. 배부르다.”
동탁이 드디어 식사를 마쳤다.
빈 접시만 보면 군단 하나라도 데려와 회식을 시킨 줄 알 테다.
“맛은 어떠셨습니까?”
분명히 맛 없다고 하겠지, 생각했으나...
“맛있구나.”
“예?”
뜻밖의 대답에 이유제와 포로들 전부가 놀랐다.
“그럼 저희 모두를 살려주는 겁니까?”
“그래. 내가 너희를 죽여서 무엇 하겠느냐? 군사들 칼이나 상하지.”
말하는 것 좀 보라. 역시 인성 하나는 대단하다.
“하지만. 이유제 너는 나를 따라가야겠다.”
“예, 예?”
“안 그래도 내게 꼭 맞는 숙수를 찾고 있었느니라.
맛있는 음식을 해오라 하면 고리타분한 것을 내오고, 새로운 음식을 들고 오라 하면 꼭 이상한 것을 들고 오더군.
나는 무능한 놈은 못 참는다. 전부 죽여서 주방 앞에다 목을 내걸었지.”
이유제는 할 말을 잃었다.
다른 말로 하면 동탁은 먹어본 건 먹어봐서 싫다, 새로운 건 안 먹어봐서 싫다 하며 퇴짜를 놓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네가 딱 적임자다. 여봐라! 이유제를 끌고 가라.”
“자, 잠깐. 이거 놓으시오!”
군사들은 어느새 이유제의 팔을 붙들고 끌고 가고 있었다.
‘내 가게는?’
하고 생각한 순간.
화르륵-
“불이다! 불이야!”
유제다점에 불길이 타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으하하, 싹 불태워버려라! 조조를 도망시킨 값은 이것으로 받겠다.”
“안돼, 안돼!”
발버둥쳐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유제는 간신히 태평요술서 하나를 품에 안고 동탁군의 손에 끌려갔다.
와르르.
마침내 유제다점의 대들보가 무너졌다.
***
“내 너를 귀히 여기마. 이전의 앙금은 모두 잊도록 해라.”
동탁은 이유제를 아꼈다.
식탐이 어마어마한 동탁은 온갖 숙수들에게 음식을 시켜보았는데,
그 중 이유제만한 자는 없었다.
이유제는 원래 솜씨가 좋은 데다,
현대에 새로 유행하는 요리부터 각국의 대표 음식까지 모두 알고 있으니
매번 동탁의 입맛에 맞춘 새로운 음식을 들고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요리가 버겁긴 처음이로군.’
누군가 먹는 것을 지켜보는 게 이렇게 싫은 일이던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해 봐야 뭐 하나, 역적 동탁의 배나 불릴 것을.
동탁은 이유제를 아껴 온갖 금은보화를 내리고, 벼슬까지 주었다.
한 때 동탁의 말단병사였던 이유제는 거의 무슨 쓰리스타급이 되었다.
하지만 요리하는 보람을 뺏긴 이유제에게는 그 무엇도 좀처럼 와닿지가 않았다.
가게는 불타고, 기껏 퀘스트로 얻어낸 가스 화로와 냉각 항아리는 잿더미에 파묻혀버렸다.
간신히 건져낸 태평요술서만이 품 안에 있었다.
펼쳐볼까, 하다가도 어떤 퀘스트가 나올지 모르니 섣불리 시도하기도 어려웠다.
“아, 내일 진연은 또 무얼 만든담...”
마음이 무거운 와중에 요리는 계속 해야했다.
그 와중에 이유제가 알게 된 한가지 사실이 있었는데,
동탁은 황제와 식사를 할 때는 꼭 음식을 홀수로 준비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두라면 한 접시에 아홉 개를 담게 했다.
여덟 개나 열 개는 짝수라 안 되고, 꼭 홀수로 맞추는 것이다.
음식이 넉넉할 때에도 꼭 그렇게 홀수로 담으라 시켰다.
‘왜 이렇게 하는거지?’
한 날은 궁금해서 음식 설명을 해준다 핑계를 대며 연회장에 나섰다.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동탁, 지가 먹으려고...’
참으로 기막힌 풍경이었다.
동탁은 옆에 어린 황제를 앉혀놓고, 꼭 지가 한 개씩 더 먹었다.
원래 동탁이 먹성이 좋은 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 사소한 것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치졸한 심보였다.
어린 황제는 동탁이 무서워 뭐라 말도 못하는 것이다.
‘어릴 때 먹을 거로 저러면 얼마나 서러운데...’
황제의 신분으로 겪을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가여운 소년 같으니.
삼국지의 비운의 황제, 협.
동탁은 협을 마음에 들어해서 황제로 앉힌다.
그러나 아무리 영특하다 한들 어린 황제가 무슨 힘이 있을까?
동탁의 손에 이리저리 놀아나고, 난세의 파도를 직격으로 맞은 불쌍한 어린 소년이다.
맛있는 만두를 눈앞에 두고도 젓가락을 뻗지 못하는, 어이없는 신세인 것이다.
그날 밤 이유제는 만두를 잔뜩 빚었다.
황제의 야참을 만드는 번과 일부러 교대를 했다.
황제에게 이제라도 만두를 실컷 먹게 해주고 싶었다.
“황제폐하, 야참이 들었사옵니다.”
“오, 그래?”
야참이라는 말에 어린 소년의 귀가 쫑긋 띄었다.
- 작가의말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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