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육림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28화
주지육림.
연못에 술을 채워 넣고, 나뭇가지마다 고기를 걸어놓는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엽기적인 생각을 해낼 수 있을까?
“와하하. 마셔라 마셔!”
동탁이 꾸며놓은 황실 후원의 연못에는 물 대신 술이 가득했고
가지마다 고기와 육포가 걸려있었다.
옛 전통과 법칙을 싹 무시한 이 역적놈이 주지육림 같은, 못된 것은 충실히 재현해낸다.
“오늘은 내가 주나라의 상왕이니라!”
동탁이 그간 쌓아둔 재물은 어마어마했다.
연못에 술이 아니라 돈을 부으라 해도 할수 있었을 것이다.
주지육림 정도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제 슬슬 배고프구나. 오늘은 무슨 음식이냐?”
“예, 오늘도 처음 보는 음식으로 준비했습니다.”
이유제가 시종을 시켜 재료를 끌고 들어오게 했다.
동탁은 이유제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종종 이렇게 화로와 냄비를 끌고 들어와 바로앞에서 요리하곤 했다.
동탁이 식재료를 눈으로 훑었다.
야채, 고기, 여기까진 뻔하다. 그런데 제일 끝에 있는 시꺼먼 장은...
“저건 뭐냐?”
동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새카만 장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춘장이라 합니다.”
“춘장?”
발효장을 구해다 이것저것 양념을 더해서 미리 춘장을 만들어두었다.
오늘의 음식, 바로 짜장면이다.
‘아끼고 아껴둔 메뉴인데. 여기서 하게 될 줄은.’
낭만 하면 짜장면 아니겠는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파라솔 펼쳐두고 먹는 게 짜장면.
당구 치러 가서 가죽 소파에 앉아 먹는 게 짜장면.
졸업식 날 꽃다발 옆에 고이 두고 먹는 게 짜장면.
‘그런데 그걸 주지육림에서 하게 되다니.’
“뭐가 되었든 맛있게 해라. 맛없으면 죽음이야!”
동탁이 말했다.
살인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농담인 줄 알면서도 뒷덜미가 오싹했다.
일단은 파기름부터 만든다.
냄비에 기름을 넉넉하게 두른다. 거의 튀김인가 싶을 정도의 양이다.
여기에 마늘, 생강과 파를 송송 썰어넣는다.
치이이-
“호오.”
벌써부터 동탁의 시선이 냄비 안에 묶였다.
잘 만든 파기름은 이게 정말 육향이 아니라 식물의 냄새인가, 싶을 정도로 깊은 향을 내준다.
짜장의 노릿노릿한 불향은 바로 파기름에서 나오는 것이니,
기름 하나만 잘 내어도 절반의 성공이다.
각종 채소, 그리고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달달 볶는다.
화롯불은 어느새 화염처럼 타오르며 불맛을 입혀준다.
그리고 여기서 춘장 투하. 이제부터는 눈을 뗄수 없다.
재료들이 냄비 안에서 널뛰기를 하며 춘장과 버무려진다.
중국집 앞을 지나쳐 가면서도 빠져드는 것이 짜장의 향일진데,
짜장 볶는 냄비를 바로앞에 두고 무시할 수는 없다.
동탁의 눈길은 짜장에서 떠나지 못했다.
자작하게 볶아 국수 위에 얹어내면 끝.
“짜장면 한 그릇 나왔습니다.”
흠흠.
동탁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갓 볶은 짜장의 냄새를 흠향하는것만으로 배가 부른듯한 착각이 들었다.
게다가 동탁이 좋아하는 국수면 위에 이 매력적인 소스가 얹어지다니.
이거야말로 최상의 조합이다.
동탁은 두말 않고 젓가락을 들었다.
후루룩.
국수의 느낌이 평소와는 다르다.
다른 때는 보슬비같이 자잘한 면이었다면, 오늘은 좀더 굵다.
마치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것같은 감각으로 입술에 닿는다.
그리고 양념은...
“으음!”
혀에 완전히 닿기 전에 고소한 향이 불쑥 치고 들어온다.
곧 그 향에 매료된다.
춘장이란 것이 참으로 묘하다.
짭짤한 간장과 달콤한 설탕이 뒤섞인 채로 백 년을 묵은 맛이다.
깊은 맛은 텁텁할법도 한데, 이것은 몇 백 년 묵은 구미호가 손짓하듯이 요망한 맛이다.
면발에 찰싹 붙은 이 새카만 양념이 자꾸자꾸 입으로 들어갔다.
늪 같은 짜장향이 물릴 때쯤 단무지 오독.
단무지가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내리며 다시 짜장면을 먹을 준비를 마친다.
“여봐라,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동탁은 짜장면이 맘에 들었나 보다.
즉석에서 시를 한수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동탁은 자기가 지은 시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직접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목, 짜장면.”
‘백일장이냐?’
이유제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달고 짠 것이 정도를 지켜 어우러진다.
불쑥 치고 들어오는 향이 간특하나 무척이나 아름답도다.
이 맛은 마치,
누군가 안방에 기척 없이 들어와 혼내려 했는데
자세히 보니 절세가인이 유혹하고있는 맛과 같도다.“
동탁이 시 낭송을 마치자 궁녀와 환관들이 하나같이 찬사를 보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맛인데?’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이유제 뿐이었다.
궁녀와 환관들은 원래 리액션이 후하기는 했으나,
정말로 짜장면이 매력적이기도 했다.
이상하게 냄새만 맡았는데도 한 그릇을 먹은 것같은 기분이었다.
“짜장면이라니, 참으로 요물이구나. 이것도 너희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냐?”
“예, 그렇습니다.”
“어느 때 먹느냐?”
“거처를 옮겼을 때, 학업을 마쳤을 때, 몸이 피로하여 밥을 먹기 힘들 때 먹습니다.”
이사, 졸업, 그 외 그냥 귀찮을 때 먹는 거니까.
“오호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천지신명께 간곡히 고할 일이 있을 때 먹는 음식이구나!”
얘기가 그렇게 되나?
아니라 하기에도 좀 민망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제가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짜장면을 사랑한 나머지, 성의 이름을 붙여 높이곤 합니다.”
만리장성이 대표적인 예시.
“또한 멀리 있는 이가 짜장면을 청할 경우 으레 덕을 베풀어 가져다주옵니다.”
“그게 너희의 전통이냐?”
“예.”
그걸 배달이라고 하지.
짜장 배달은 거의 전통이기도 하니, 틀린 말도 아니다.
이유제가 동탁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이렇게까지 과장되게 얘기했는데도 동탁의 반응이 좋은 것으로 보아,
짜장면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론을 말할 때다.
“만약 상국께서 오늘 음식이 마음에 드셨다면 멀리 있는 아랫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것도 크나큰 은덕인 줄 아뢰옵니다.”
“그래. 그렇고 말고!
여봐라, 짜장면을 한 그릇씩 가져다 동씨 가문의 일원들에게 맛보여주어라!”
동탁이 기꺼운 듯이 말했다.
덕분에 이유제의 손은 쉴새없이 짜장을 볶아내느라 바빠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목표는 달성이다.’
며칠 뒤 있을 진연회의 밑밥을 깔았다.
***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어린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진연 날이 되었다.
황실의 연회장이 호화롭게 꾸며졌다.
물론 어린 황제가 아니라, 동탁을 위한 진연일 뿐이었지만.
어린 황제는 그 옆에 앉아 이따금 물이나 홀짝일 뿐이었다.
오늘 동탁은 유독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시끄러운 노친네들이 안 보이는군.’
황제와 친했던 노신들이 대거 아프다면서 결석했다.
다들 황실의 녹을 오래 먹은 명망 높은 인사들이라 어디 치워버리기도 애매했는데 잘 되었다. 자리만 차지하는 낡은 가구를 마침내 내다버린 기분이었다.
‘좋은 자리마다 나타나 죽상이나 해서 술맛 떨어지던 참인데, 잘 되었구나.’
그들도 마침내 황제를 저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자, 음식을 들여라!”
기분이 좋아진 동탁이 외쳤다.
시종들이 오늘의 메인 디쉬를 들고 들어왔다.
큰 잔치이니만큼 이유제도 함께 들어왔다.
“오늘의 음식은 무엇이냐?”
“짜장, 짬뽕, 그리고 탕수육입니다.”
“오호라.”
이 순간만큼은 황제와 동탁, 두 사람의 눈빛이 똑같이 반짝였다.
새카만 국수와 새빨간 국수, 그리고 고기튀김.
무슨 조합인지는 몰라도 한상 푸짐해보였다.
왜, 현대인도 그렇지 않은가.
짜장 하나, 혹은 짬뽕 하나만 놓았을 때는 덩그러니 쓸쓸해보이지만
한 테이블에 짜장, 짬뽕, 거기다 탕수육까지 그득히 놓고 있으면
별 것 아닌데도 푸짐해보인다.
짜 짬 탕 세트를 처음 보는 동탁과 황제에게는 그 무엇보다 화려한 음식이기도 했다.
“자, 들어보시지요 폐하. 제 숙수가 만든 음식입니다.”
동탁이 선심 쓰듯이 말했다.
후룩.
어린 황제가 짜장면을 먹었다.
‘넌 좋겠다, 짜장면 처음 먹어봐서.’
아는 맛이 맛있는 법이다. 이유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으음...”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촘촘이 혀를 메우는 감칠맛.
은근히 뒤따라오는 단맛.
그리고 훅, 하고 코를 휘어잡는 파향.
“이 맛은! 이 맛은!”
황제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어 말을 더듬었다.
“어때요, 그 맛은 마치...”
동탁이 또 난잡스럽게 맛을 묘사하자 이유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린애 앞에서 무슨 말이람?’
황제가 어려서 말을 못 알아들어 다행이었다.
“옆의 빨간 것도 드셔보시지요. 짬뽕이라 하옵니다.”
“그래.”
후룹.
황제가 국물을 떴다.
입 안으로 매운 파도가 쓸려들어온다.
“켁, 켁!”
“빨간 국수는 천천히 드십시오. 맵습니다.”
단 한 방울의 짬뽕국물이라도 잘못 넘어가면 지옥행이다.
귀로 넘어가면 그나마 다행, 코로 넘어가면 참 안 된 거다.
황제가 진작 알려주지, 하는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매운 혀를 얼른 물로 씻어내려 했지만... 그게 아니다.
매운 맛의 파도 뒤에 따라오는 온갖 해물의 향.
어디엔가 있다는 홍해에 빠지면 이런 맛일까?
홍합, 오징어, 조개 등 귀한 해물이 듬뿍 들었다.
황제가 짬뽕면을 살살 넘겼다.
빨간 바다의 시원한 맛이 면발을 붙들고 쭉쭉 올라온다.
입맛을 사로잡았던 짜장면 맛이 빨간 짬뽕 국물에 금세 씻겨내려갔다.
바삭.
마지막으로 탕수육을 먹는 순간, 혀가 춤을 추었다.
매운 맛에 지친 혀를 새콤달콤한 탕수육이 감싸주었다.
짜장면이 다정한 할머니의 쓰다듬이오,
짬뽕이 짖궂은 삼촌의 장난이라면
탕수육은 함께 정원을 뛰노는 벗의 손길이었다.
‘짜, 짬, 탕은 함께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황제가 이렇게 잘 먹는 줄 몰랐다.
평소엔 동탁의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젓가락하던 녀석이
오늘만큼은 짜장면을 뺏기지 않으려는 어린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잘 먹었다.”
동탁과 황제가 식사를 마쳤다.
“맛있게 드셨습니까?”
“그래. 아주 맛있었다.”
동탁이 기분 좋은 틈을 타 이유제가 말했다.
“오늘 재료를 한가득 준비했는데,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이 많아 아쉽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천지신명의 음식을 모두에게 맛보여 위용을 뽐내야 하는데 말이다.”
동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원래 멀리 있는 아랫사람들에게 베푸는 음식이라 했지?”
“맞습니다.”
“여봐라, 오늘 참석하지 않은 이들에게 짜장면을 내리도록 하라!”
나이스.
이유제가 남몰래 미소지었다.
배달음식 운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충신의 집에 황제가 사람을 보내면 의심받겠지만,
충신의 집에 동탁이 사람을 보내면 괜찮다.’
오늘 음식을 받는 자들 중에는 필연적으로 충신들도 섞여있을 터.
자연스럽게 황제의 밀서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다.
왜 이런 위험한 짓에 나서냐고?
‘동탁은 망하니까.’
나중에 동탁이 죽을 때 같이 죽고싶지 않다면, 황제에게도 분산투자 하는 게 현명하다.
‘좋아, 완벽한 계획이다!’
그때 짜장면 배달에 나선 이가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버님.”
큰 연회장을 울리는 씩씩한 목소리.
이유제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잠깐. 잠깐!’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삼국지 장수 그 누가 나서도...
아니, 유비 관우 장비가 한꺼번에 나서도 못 이기는 괴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포야!”
말 중엔 적토요, 사람 중엔 여포라 했던가.
더 말해서 뭐할까. 삼국 무쌍 괴물 필살기 최종병기다.
“번거롭게 왜 네가 가려 하느냐?”
“적토마를 제대로 한번 시험해보고 싶어 그렇습니다. ”
적토마로 짜장 배달이라...
‘이건 좀 보고싶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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