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게임과 현실 사이.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느새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놈처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온통 몸서리치며 드디어 리세가 끝났다는 생각에 한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 리세와 현실 리세의 차이점을 생각지 못한 점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것은 나중 일이었다.
아무튼 그때 시스템의 음성이 들렸다.
- 8714번 리세로 번개 속 고요한 암살자, 소르카를 획득하였습니다. 리세를 완료하시겠습니까?
“······.”
내가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 현재 가장 이상적인 SSR 캐릭(캐릭터의 준말)터며 이번 기회를 포기한다면 다음에 소르카가 나올 확률은······ 계산 중······ 약 12,000회 이후입니다.
씨X.
횟수를 듣자마자 멍했던 정신이 퍼뜩 들었다.
“리세 완료.”
그리고 곧바로 더도 볼 것 없다는 듯 리세를 끝냈다.
- 리세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리세를 완료합니다.
리세가 완료됐다는 시스템 음성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소르카 또한 사라졌다.
그제야 난 이 지긋지긋한 리세가 끝났음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꼈고, 그러자 마음 한 곳에서, 아주 아주 깊은 곳에서 성공했다는 성취감과 쾌감이 온몸으로 넘쳐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크.
짜릿짜릿한 게 이게 바로 리세의 묘미이기도 했다.
그만큼 오래 걸렸고, 현실 리세라서 그런지 더욱 지루했으며, 더욱 고통스러워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성취감이 남달랐다.
잔뜩 기지개를 피며 일어섰다.
기분 좋은 현기증이 나를 덮쳤다.
그때 나를 향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누군가 물었다.
“저기······.”
난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여전히 기지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괘, 괜찮아요······?”
아!
그제야 내가 무언가를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멍청이······ 아!
이게 바로 진짜 게임과 현실 게임의 차이였다.
그러자 기분 좋았던 성취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쩌면 끔찍한 현실이 될지도 몰랐다는 공포가 뒤따라왔다.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이들은 방금까지 내가 한 행동을 전부 보고 있던 주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리세를 끝냈기 때문에······.
다시 초기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불현듯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깨달았다.
아!
만약 내가 정말 미친놈처럼 지나가는 사람을 때리거나, 여자를 덮치거나 등등 과격한 행동을 하면서 운동장에 오고 뽑기를 했더라면······ 그래서 소르카가 나왔더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무리 현실이 게임이 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들은 사람이었고,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한기가 싹 스며들고 있을 때, 나를 향해 물었던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컥!”
내가 놀라 사례가 걸리자, 말을 걸었던 여자는 더더욱 깜짝 놀랐다.
“쿨럭. 쿨럭.”
내가 기침을 하자 이제는 여인이 알 수 없다는 궁금증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미 얼굴은 빨개질 때로 빨개졌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그녀는 바로 내가 XX 하자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문제는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버스에 탔던 사람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이 가장 컸다······.
미안하다. 나도 남자라 어쩔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 역시······.
나와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 중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를 보는 표정이 미묘하게 달랐다.
저들은 내가 버스 유리창을 깨고 미친놈처럼 달려 나간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난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운동장 밖으로는 나가진 않았지만, 창피함에 사람들이 뜸한 곳으로 피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한적한 곳으로 왔을 때, 내 머릿속에 음성이 들렸고, 동시에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 튜토리얼을 완료했습니다. 게임 닉네임을 설정해주세요.
그리고는 빈칸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굳이 다른 이름을 정할 필요가······ 있나······?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진짜 게임에서 닉네임을 정하는 이유는 익명성도 있지만, 사실 게임에 빠져들게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나, 미래 SF 성향의 게임인데 현실에 있을 법한 ‘이정훈’이란 이름을 쓰게 되면 어울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걸 제외하고도 게임은 현실과는 다른 세계라는 설정이 많았다.
그것에 맞춰 다른 이야기가 있고, 배경이 있으며, 각각의 캐릭터와 설정이 있기에 따로 게임상의 이름을 짓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내가 조금 머뭇거리고 있을 때, 시스템 음성이 내 머릿속을 울렸다.
- 닉네임 ‘전투’가 선점되었습니다.
- 닉네임 ‘해골’이 선점되었습니다.
- 닉네임 ‘영웅’이 선점되었습니다.
- 닉네임 ‘여포’가 선점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엄청 빠른 속도로 닉네임이 선점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수백 명뿐이지만, 어딘가 또 다른 사람이 나처럼 튜토리얼을 진행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젠장.
난 게임을 할 때 닉네임을 조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를 부르는 이름을 이상한 이름으로 짓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옆집누나X구멍’이란 아이디로 짓는 놈을 본 적이 있었는데, 대체 왜 저런 저질스러운 닉(닉네임의 준말)을 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고, 난 평상시에 내가 항상 사용하던 닉네임을 적었다.
내 나름대로 남캐(남성 캐릭터의 준말)와 여캐(여성 캐릭터의 준말)에 따라 각각 사용하는 닉네임이 따로 있었기에, 당연히 이번엔 평상시 쓰는 남캐 닉네임을 적었다.
Michael.
- 닉네임 중복 여부를 확인합니다.
- 사용하실 수 있는 닉네임입니다.
- 사용하시겠습니까?
난 확인을 눌렀다.
- 닉네임을 설정했습니다. WTA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비록 내가 성당 출입은 뜸해졌지만, 그래도 닉네임만큼은 꼭 이걸로 사용했다.
그때 다시 한번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식 플레이 등록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우편함에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보상?
핸드폰의 우편함을 열자, ‘핸드폰 거치대’가 들어 있었다.
응?
처음 보는 형태의 거치대였다.
보통 핸드폰 거치대라고 생각하면 핸드폰을 세울 수 있게 하는 거나 차량용인데?
우편함에 있는 보상을 클릭하자, 핸드폰에서 튀어나와 순식간에 현실화되어 내 손에 떨어졌다.
그것은 핸드폰을 넣을 수 있는 가방 같은 부분과 팔이나 다리에 매달 수 있도록 4개의 끈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신기한 것은 사람마다 핸드폰의 기종이 전부 다를 것이 분명했음에도 그것은 마치 맞춤 제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핸드폰과 내 몸에 딱 맞게 만들어져 있었다.
딸깍.
왼쪽 팔에 착용하자, 핸드폰과 거치대가 일렁이더니 갑자기 점점 투명해지며 내 팔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헉!
난 너무 놀라 순간적이나마 숨이 막혔고, 놀랄 새도 없이 부랴부랴 핸드폰이 사라진 팔을 더듬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팔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음성이 들려왔다.
- 디바이스 동기화 완료. 이제부터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디바이스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등록된 디바이스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으며, 부서지지 않습니다.
아!
핸드폰의 액정이 고장 나거나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이런 장치를 마련해 뒀을 줄은 몰랐다.
현실에서도 핸드폰이 없으면 매우 불편했고, 삶의 일부분이 되었었는데, 이 게임에서도 시스템과 나를 연결해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렇게 보상을 적용하고서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현실이 아니라는 듯, 어디론가 전화하는 사람만 열 명이 넘었다.
대부분 112와 119에 전화를 하는 듯 보였다.
난 손에 쥔 핸드폰, 아니 디바이스를 켜고 포털 사이트 어플을 실행했다.
초유의 사태라고 말하는 듯, 포털 사이트에는 전부 지금 일이 실시간 뉴스로 올라오고 있었고, 정부의 입장 또한 실시간으로 뉴스화하고 있었다.
너트뷰 실시간 방송 또한 공중파 방송국을 비롯해 각종 뉴스 매체에서는 현 상황에 대해 빠르게 전달하고자 했다.
다행이라면 현 상황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정부가 움직였고, 역대급 인력이 동원되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뉴스가 나오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행이라는 듯 안정을 찾아갔다.
나 또한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무사하실 거라는 생각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변한 지금의 현실이 과연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으아아악!”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인지,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테이지에 들어섰던 누군가가 온몸에 피 칠갑 한 채 이쪽으로 도망쳐 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은 방금까지 정부에서 수단을 강구하여 안정화를 하겠다는 뉴스와 엇갈리는 모습이었고, 또 방금까지 안도의 한숨을 쉬던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현실을 인지시켜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의 모습은 피가 묻은 것을 제외하고서도 매우 끔찍한 모습이었다.
쩔뚝거리며 다가오는 사내의 옆구리가 움푹 파여 있었던 것이다.
철퍼덕.
급기야 겨우겨우 걸어오던 그의 다리가 풀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누, 누가······.”
그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피가 묻어서 빨갛게 변한 팔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도와주러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정신을 잃으면 죽어요. 이봐요!”
능숙하게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의료계 종사자 같았다.
“누가 깨끗한, 아니 뭐라도 좋으니 옷 좀 벗어주세요!”
이제 슬슬 겨울이 시작되어 가는 10월이었으나, 아직 낮은 더웠다.
그래도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건지 누가 걸치고 있던 남방을 벗어서 넘겨주었다.
“그쪽 하얀 셔츠 입으신 분.”
갑자기 그녀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119 전화 좀 걸어주세요. 빨리요.”
난 얼떨결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119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이번 사건으로 인해 혼란한 사람들이 동시에 전화를 걸어서 발생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
그리고 그렇게 지체되는 사이 옆구리를 다친 사내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괜찮아. 괜찮아. 곧 구하러 올 거야. 울지마.”
아이를 달래는 아주머니.
“흑흑. 흑.”
참았던 눈물을 다시 터트리는 여학생.
게임이라고 생각하며 조금 즐거워 보였던 남학생들도.
다시 이게 현실임을 직감했고, 다시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일어난 일은 모두 현실이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 또한 방금까지 게임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몰랐다.
리세를 하고 SSR을 뽑았다는 생각에 마치 게임을 하듯 즐기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자, 뱃속이 울렁이며 나도 모르게 무언가 토해내고 말았다.
“우웩.”
동시에 나를 비롯한 몇몇 비위가 약한 사람이 전부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여기 큰 천 같은 거······ 가 있을 리가 없겠죠. 후. 뭐라도 덮을 거 있으면 좀 구해주세요. 나무든 뭐든.”
그나마 몇몇 사람이 시체를 보기 그랬는지, 입었던 겉옷을 벗어 간신히 얼굴과 상처를 덮을 수 있었다.
잠시 음울한 분위기가 잔뜩 그리고 짙게 깔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무언가 마음을 먹은 것인지, 입술을 꽉 다물고 디바이스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은 스테이지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무도 말을 걸거나 말리지 않았다.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계속 기다리기 답답한 것은 사실이었다.
누군가 먼저 알 수 없는 저 ‘스테이지’란 곳으로 향해 길을 개척해주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가 사라진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제야 나 또한 떨리는 마음을 조금 진정하며 스테이지로 가겠노라 마음먹었다.
“후.”
그렇게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모종의 느낌이 확 들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들은 바로 버스에서 나를 기억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리세 때의 쪽팔림이 떠올랐다.
젠장······ 흑역사······.
- 작가의말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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