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미지의 성(4)

준성과 민정은 고함이 들리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 방향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과 일치했다.
달려가는 동안 경고 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어떠한 장애물도 없다는 것을 뜻했다.
“허억, 헉. 여, 여긴가?”
준성과 민정이 멈춰 선 곳은 문 앞이었다.
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지 말지 물었고 준성은 답했다.
“열자.”
화살표는 계속해서 문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고 고함도 계속 들리고 있었다. 그러니 멈춰 설 이유가 없었다.
끼이익-.
무언가 튀어나온다거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문은 손쉽게 열렸다.
“준수야!”
문이 열리자마자 준성은 저도 모르게 절규하듯 이름을 불렀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흐응, 아까부터 시끄러웠던 이유가 너희 때문이었구나앙?”
묘하게 거슬리는 말투를 쓰는 은발의 긴 생머리를 한 사내는 싱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목소리는 남자였지만, 요염한 말투를 가진.
말을 하지 않으면 여자라고 믿을 정도로 예쁘게 생겼으며 긴 망토를 두른 자.
이 성의 주인인 듯했다.
준성은 확실히 하기 위해 물었다.
“네가 이 성의 주인인가?”
그는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엄지로 쓱 훑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 동생을 이리 내.”
“아앙, 이거랑 아는 사이인가보지잉?”
백작은 십자가 형태로 묶여 있는 준수를 가리키며 재밌다는 듯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렸다.
“끄하하하항, 동생이나 형이나 멍청하구나앙. 감히 내가 사는 성에 들어와앙?”
겁먹을 수 없는 말투임에도 준성은 소름이 끼쳤다.
위압감이 그를 무겁게 짖눌렀기 때문이다.
'정보 창!'
그 와중에 준성은 속으로 외쳤고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코이 데 카를로이 LV.150
카를로이는 1500년 전부터 이 성의 주인이었다. 그는 동족을 죽인 인간을 극도로 혐오하지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으면 굳이 죽이진 않는다. 귀찮은 게 증오를 늘 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부지런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인간이 성으로 침입할 때였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의 물건에 집착하는 그는 인간이 성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용서치 못했기에 도둑놈, 도둑놈의 아내, 그리고 그의 자식까지 모조리 죽여야만 성이 풀린다.
**주의**
현재 물건을 잃어버려 광분한 상태이다.
추정 LV. 250]
추정 레벨 250. 아까 흉악 곰의 다섯 배였다.
50 레벨치곤 흉악 곰을 쉽게 처치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보 창에 적힌 약점 덕분이었다.
만약 약점을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죽는 건 아마 다른 쪽이지 않았을까.
준성은 이번에도 약점이 적혀 있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정보는 없었다.
싸워서 이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일 것 같으니. 말로 설득을 해야 할까.
“눈알 돌릴 필요 없엉. 넌 오늘 살아서 못 돌아가거드응. 아! 물론 네 동생도 마찬가지고.”
저 태도로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준성은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후 말했다.
“무슨 물건이 없어진 거지? 내가 찾아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십자가 형태로 매달린 준수를 보고 있던 백작은 흥미가 생긴 듯 빙그르르 돌아 준성을 바라보았다.
“네가 찾아 줄 수 있다고오옹?”
“뭐든 찾아 줄 수 있어. 내가 찾는 거 하난 타고났거든.”
물론, 시간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의외로 잘 먹힌 듯했다.
백작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좋앙. 인간 네 말을 믿어 보지. 찾아 준다면 네 동생을 풀어 주징. 대신!”
비음이 섞인 목소리를 줄곧 내던 백작은 ‘대신’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굵은 남자의 음성을 내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준성을 보며 이어 말했다.
“찾아오지 못한다면 너도, 네 동생도 다 죽여주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그 상황 속에서 준성은 힘겹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동생..... 한 번만 가까이서 보게 해줘.”
“흐으응.”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백작은 선심 썼다는 듯 검지를 까딱거렸다.
“딱 한 번이야.”
허락을 받은 준성은 거진 5년 만에 본 살아 있는 동생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기력이 쇠해 다 죽어 가고 있었지만, 죽은 것보다는 백 배, 천배 나은 상황이었다.
“준수......”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며 얼굴에 손을 갖다 대려는 순간.
“잠시마아앙”
다시 비음 섞인 목소리를 내는 백작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전에 확실히 해 둘 게 있지 않아앙?”
준성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흐응, 성깔 있는 인간이네엥. 동생이랑 닮았어엉. 아니지, 동생이 형을 닮은 건가앙?”
“확실히 해 둘 게 뭐지?”
“네가 물건을 찾아야 하는 시간. 그걸 정확히 해 둬야지. 안 그랭?”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준성도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이 말했다.
“24시간을 주지. 난 그렇게 인내심이 길지 않아. 당장 네 동생을 죽이고 싶지만, 네 행동이 흥미로워..... 잠시만.”
갑자기 말을 하다가 멈춘 백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준성의 팔목을 잡아 올렸다.
“뭐 하는 짓....!”
“감히.....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비음이 섞이지 않은 굵은 목소리가 또 나왔고 준성은 백작의 눈동자가 붉어짐을 보며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뭘.....”
“네가 내 물건을 훔쳐 가 놓고 그 물건을 찾아 주겠다고.....!”
“잠시! 잠시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내가 언제 물건......”
준성은 그제야 백작이 손에 낀 반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훔친 게 아니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내가 이 성에 방금 들어왔다는 거, 너도 알잖아!”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내가 인간의 말을 믿을 거 같아? 감히 인간 따위가 내 물건에 손을 대!”
백작이 소리를 지르자 땅이 흔들렸고 준성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살아서 나가기 힘들겠구나.
그가 화가 난 이유는 물건이 사라져서이고 화를 풀 방법이 있다면 물건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물론, 돌려준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준성은 마지막 남은 유일한 방법에 희망을 걸며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건넸다.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진짜야.”
반지를 받은 백작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준성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반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준성은 그가 든 반지를 보며 속으로 외쳤다.
'정보 창'
그러자 눈앞에 창이 나타났다.
[회귀의 반지였던 반지
회귀의 힘은 잃었지만, 주인을 지킬 능력은 여전히 존재.
회귀의 반지로서의 힘은 잃었다. 회귀는 단 한 번만 가능하기 때문. 회귀를 사용한 건 대한민국의 '최준성'이다. 반지는 그 후 최준성을 주인으로 모시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능력을 부여했다. 회귀의 힘과 여러 힘을 가진 반지의 실체를 아는 자는 유일하게 코이 데 카를로이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그들 외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친구, 스승과 제자, 주종. 1000년 전에는 여러 추측이 나돌긴 했으나 그들을 아는 인간들이 사라진 후에는 잠잠해져 그 누구도 그들의 관계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정보 창에 자신의 이름이 버젓이 적힌 것을 보고 놀란 준성은 뒤의 내용을 읽으며 저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지의 주인이라니.
'그러니까 내가 저 반지의 주인이라고?'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능력을 부여했다는데 그 능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준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할 능력을 받은 게 없어 더 의아해졌다.
‘설마 눈앞에 보이는 시스템 창?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일 유력하긴 한데.....’
“주인님, 모습을 드러내어 저들을 파멸시켜 주시옵소서. 아니, 인간 전부를 파멸시켜 주시옵소서.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님과 저의 큰 꿈을 펼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준성이 이것저것 생각하던 때, 반지를 손에 쥔 백작이 큰 소리로 외쳤고 준성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 저들의 관계는 주종이구나.'
반지가 주인, 그리고 백작이 부하.
그렇다면 반지의 진짜 모습은?
준성은 다소 웃긴 장면을 진지하게 살폈다. 능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소중하게 반지를 쥐며 간절히 말하는 백작은 약간 미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보 창을 통해 반지에 대해 알고 있는 준성에게만큼은 진지한 장면이었다.
“주인님! 어서 모습을 드러내어......”
백작처럼 준성 또한 반지가 모습을 드러내길 바랐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떠올랐다.
준성은 백작이 딴 곳에 정신을 팔 때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준수에게로 다가갔다.
“준수야, 괜찮아?”
“형..... 미안해.”
준성은 괜찮다는 듯 어깨를 토닥거리며 준수의 팔목과 발목, 그리고 몸 전체를 묶은 밧줄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민정은 어느새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몸에 묶인 밧줄을 푸는 순간 준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말도 안 됩니다, 주인님! 이게 어떻게.....”
백작은 그들의 행동을 신경도 쓰지 못할 정도로 격앙된 상태였다.
준성은 기회를 틈타 준수를 업은 민정과 함께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안 됩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 따위에게 무릎을 꿇는단 말입니까!”
백작이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준성이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준수를 찾았으니 이제 이 게임에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 준수와 함께 평범하게 사는 게 그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회귀 전, 그 끔찍했던 때로 다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그때를 다시 겪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멈춰!”
그러나 준성의 바람과 희망은 한순간에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백작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울부짖듯 외쳤기 때문이다.
“멈춰!”
다시금 들리는 백작의 외침에 준성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준성은 상황이 잘못 돌아가도 한참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여차하면 모두가 죽을 상황이었다.
그는 민정의 팔을 잡아당기며 작게 말했다.
“준수 내리고 총 들어.”
백작을 이길 방법은 총뿐이라고 생각했다.
준성의 작은 속삭임을 알아들은 민정이 준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모두가 백작의 행동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최준성 님을..... 주인......님으로 모십니다.”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조아린 백작은 준성을 향해 ‘주인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가장 당황한 사람은 준성이었으니.
백작의 말과 동시에 들려온 머릿속 음성 때문이었다.
-회귀를 축하드려용,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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