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놈(3)

벨라가 보여 주는 장면은 거기서 끝이 났다.
준성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저 보는 것뿐이었는데도 체력이 소모되는 것 같았다. 운동장을 몇 바퀴나 돈 것 같은 느낌에 어지럽기까지 했다.
-괜찮으세용?
벨라의 걱정에 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하..... 그래서.... 준수는..... 사람을 죽였어?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서?’
-아니용. 죽이지 않았어용. 사람을 죽여 부모님을 살리는 건 의미가 없다고 말했어용. 부모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거 같다고 했어용.
‘그건 그렇고.....흑마법사..... 그게 가능한 건가?’
-이곳에서 불가능한 건 없답니당.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제외하고용! 아! 이제 회귀도 가능하지 않겠네용.
근데 왜.....
벨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놈은 준수에게 거짓을 말했다는 건데.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왜 준수에게 살인을 권유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흑마법사와 살인은 떼어 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관계랍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용. 제가 알기로는 그 길드는 살인자 소굴이었어용. 모두가 살인을 했답니다. 최준수를 제외하고용.
준수가 길드장을 배신했던 이유가 길드를 떠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준성은 그제야 왜 제 동생이 배신하면서까지 떠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준수가 그 사실을 알았구나.’
-넹, 그 후에 배신을 했죵. 모두가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직후에는 꽤 충격받은 얼굴이었어용.
‘쉽게 떠날 수 없다는 걸 알고 길드장이 되려고 했어.’
-맞아용. 함께한 자들이 배신해서 들통이 났지만용.
준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저만 힘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어리기만 했던 동생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 카를로이의 음성이 들렸어용! 최준수를 찾았대용!
준성은 그 즉시 벨라의 인도를 받아 카를로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허, 헉.”
도착한 곳에는 민정과 카를로이, 그리고 놈과 준수가 있었다.
이상한 점은 카를로이가 놈과 준수를 떼어놓지 않고 가만히 노려 보고만 있는다는 거였다.
그런 카를로이에게 따질 시간도 없었던 준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놈에게 말했다.
“뭐... 하는 짓이지?”
“하.... 이런, 모두가 모이고 말았군요. 뭐, 예상한 일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모였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놈은 준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준수 군, 얼른 도장을 찍어요. 함께 해요. 우리가 함께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답니다.”
“안 돼!”
준성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지만, 다다를 수 없었다.
준수의 코앞에서 튕겨 나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게.....”
“마법이에요.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급하게 달려드는 바람에....”
카를로이는 아프겠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내밀었다.
준성은 그 손을 잡고 일어서며 준수를 향해 말했다.
“안 돼, 준수야. 절대 계약하면 안 돼. 놈은 너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야.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들어야 해!”
“.....형..... 난 꼭 부모님을 살리고 싶어.”
준수가 엄지를 계약서에 대기 직전, 준성이 소리쳤다.
“안 돼! 놈이 무슨 말을 했든 듣지 마! 사람을 죽이라고 했어? 그래도 살릴 수 없을 거야. 놈이 흑마법사라고 하더라도 죽은 사람을 살릴 방법은 없어!”
준성의 말에 놈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빙그레 웃었다.
“아, 안 되겠네요. 아무래도 전 이 꼬맹이보다는 그쪽이 더 흥미로운걸요. 정말 길드에 가입할 생각 없나요? 만약 한다면 동생은 조용히 보내주도록 하죠.”
혀로 입술을 적시는 모습이 역겨웠다.
준성이 이를 꽉 물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리자 놈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준수 군, 계약 진행하죠. 아까도 말했지만, 도장을 찍으면 형은 못 보는 겁니다. 부모님을 살려낼 때까지는요. 그리고 준수 군은 살인을 포함한 모든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살인을 포함한?
놈의 말에 준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알겠습니다.”
준수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직전, 준성이 다시 소리쳤다.
“같이 게임 하자 준수야! 놈 말고 형이랑.... 형이랑 하자. 응? 준수야..... 제발..... 부모님 살리는 거....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없는 세계!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는, 불가능한 게 없는 세계잖아.”
간절한 진심이 전달됐기 때문일까.
줄곧 계약서와 놈만 바라보던 준수가 고개를 돌려 준성을 바라보았다.
“같이?”
“그래, 같이. 같이 하자.”
이 말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 형이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최후의 보루를 꺼내자 준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얼른, 준수야. 제발.”
준성이 손을 뻗자 준수가 일어났다.
그러자.
“누구 맘대로!”
놈이 불같이 화를 내며 준수의 팔목을 잡아 강압적으로 엄지를 계약서에 갖다 대려 했고.
그때.
“으아아악!”
카를로이가 달려서 준수의 허리를 잡고 안아 들었다.
“.....어떻게....”
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린 채로 카를로이를 바라보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있을 수 있을까.
준성은 방금까지 그가 서 있었던 곳을 보다가 준수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아, 준수야?”
“......형,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내가 왜 그런 생각을.... 살인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분명 지금은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이상하게 아까는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준성은 충격을 받은 듯한 준수를 다독이며 속으로 말했다.
‘벨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봤던 것과는 다르잖아. 분명 준수는 그때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고 했어. 부모님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해도.’
-그러게용. 이상하네용. 왜 갑자기..... 혹시....
‘혹시 뭐?’
-최면 같은 걸 건 게 아닐까용?
‘그럼 그때도 걸었겠지.’
준성의 말에 벨라도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용. 근데 이상하네..... 지금은 마법사가 확실한데 그때는....
‘그때는 뭐?’
-흐음.... 사실 확실하지 않아서 얘기하지 않은 건데용.
잠시 뜸을 들이던 벨라가 다시 말했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용.
‘뭔데?’
-제가 처음 그놈을 봤을 때는 분명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단 말이죵. 그러니까 놈이 처음 카를로이의 성에 왔을 때용.
회귀 전 이 시점의 그는 마법사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때도 힘이 셌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했었죵.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인간의 힘보다 월등했으니깐용.
회귀는 준성 혼자 했는데 놈이 왜 바뀌었단 말인가.
-한 가지 가설이 있긴 한뎅....
‘뭐지?’
-주인님만 회귀한 게 아니라면용? 아, 아닌데.... 아니에용, 안 들은 거로 해 주세요. 말이 안 돼용. 제 힘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거든용.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대체.
준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리가 되지 않았으며 이 정보로는 그놈의 정체를 알아내기에 무리였다.
준성은 이 일은 뒤로하고 일단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동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준수야, 너.... 정말 게임을 하고 싶은 이유가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서야?”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준성의 물음에 준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능하지 않다는 게 확실하다면..... 포기할게. 그때까지는 같이 게임해 줄 수 있어? 약속했잖아, 형.”
약속은 약속이니까.
준성은 지금이라도 당장 준수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동생의 고집을 알고 있었기에 나가는 건 보류하기로 했다.
만약 억지로 데리고 나간다면 언젠간 또 말없이 사라지고 말 게 분명하니.
준성은 동생의 손을 잡았다.
“알겠어, 형이랑 같이하자. 대신.... 약속해 줘야 할 게 있어.”
“응, 뭔데?”
“이번처럼 말없이 사라지지 않기.”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성은 그런 동생의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저놈이 무슨 말을 하든 믿지 말기.”
“알겠어, 형. 약속할게.”
일상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준성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며 동생의 손을 잡았다.
언젠가는 부모님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똑똑한 준수는 받아들이리라.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이 안에서 생활하면 된다.
동생이 옆에 있으니 그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가 됐든 죽수가 죽었던 회귀 전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으니.
합리화를 한 준성은 좋게 생각하기로 하며 민정을 보며 물었다.
“민정이 너도 같이 갈 거지?”
“아! 민식! 민식! 김.민.식이라고!”
소리를 꽥 지른 민정은 씩씩거렸고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항, 왜 갑자기 저러는 거예용. 민정이랑 민식이랑 거기서 거기구먼.
벨라의 말처럼 준성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싫다고 하니.
“미안하다, 민식아. 이제 실수 안 할 게.”
“그래요, 민식이 형. 화 풀어요. 네?”
“하아.... 너희...... 진짜 이제 그 이름 안 부를 거지?”
“알겠어. 약속할게.”
그제야 민정은 화를 풀고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너희들도 알잖아. 내가 이 이름 때문에 얼마나 괴롭힘당했는지. 부모님이 개명은 죽어도 안 된다고 해서....”
“알지, 알지. 미안하다. 신경 못 써줘서.”
“고맙다.....”
준성은 차마 ‘민식 말고 더 괜찮은 이름이 있을 텐데.’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서, 같이 갈 거야 말 거야.”
“아! 당연히 같이 가야지. 우리는 하나라고!”
언제부터 하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퍽 고마웠던 준성은 입꼬리를 올렸다.
“와, 최준성. 드디어 웃네. 너 아까는 진짜 무서웠다고. 특히 준수 너 찾기 전에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어.”
“.....내가?”
“그래. 세상의 빛을 잃은 사람 같았달까. 무서웠지.”
-인정이용.
모두에게 들리진 않겠지만, 벨라도 인정했다.
준성은 그때의 자신이 어땠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세상의 빛이었던 하나뿐인 동생을 잃었는데 어찌 웃을 수 있으랴.
준성은 그 누구보다 아끼는 동생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형을 선택해 줘서.”
준수는 쑥스러운지 말없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런 동생이 귀여웠던 준성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이제 가 볼까? 제대로 시작해 보자.”
“난 찬성!”
“나도!”
-저도 찬성이용!
준성을 필두로 민정, 준수. 그리고 벨라까지.
모두가 외쳤다.
그리고.
“저도 찬성입니다앙! 얼른 가시죠!”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카를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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