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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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선생
그림/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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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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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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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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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총통 03

DUMMY

이상군은 지난 44년의 세월을 회고해 보았다. 의식적인 회고는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파노라마와 같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암담이 진양특별구역으로 개발되기 이전 그의 고향은 평화로운 어촌이었고 상군의 아버지는 어부였다. 소금기가 묻어나는 바닷바람의 상쾌한 비린내는 어부의 아들로서 자란 그의 유년기를 불러일으키는 향수香水였다.


무명의 어촌이었던 그의 고향이‘절망의 열도’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 제8군단의 한반도 최초 상륙지로 낙점된 순간 그의 인생에 제2막이 열렸다. 어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항만 인프라를 조성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 곳곳에서 연합군은 전쟁을 수행 중이었고 연합군 휴머노이드의 상당수는 군사 병력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공사 현장에 현지 사람들을 징발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그런 시대의 수혜를 입었다.


서암담이 감내항으로 개발된 것이 휴머노이드들의 작품이라면 동암담의 진양 항만 인프라는 상군을 비롯한 인간들의 작품이었다. 그는 항만접안시설을 개발하는 견실한 업체를 꾸렸고 항만 인프라 조성의 공을 인정받아 연합군 임시 특별본부와 정기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동암담에 진양특별구역이 공식적으로 생기면서 연합군의 임시 특별본부는 치안대 본부로 격상되었고 상군은 연합군 치안대 본부에 정식 채용되었다. 암담시 연합군의 중장비를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AI와 휴머노이드로 구성된 연합군 조직에서 인간의 비율은 채 10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상군은 그 10퍼센트에 속한 선택받은 인간이었다. 어부의 아들이었던 그가 진양특별구역 내에서도 고급 주거단지인 진양 5번가 생봉 단지에서 아내와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삶 자체가 그의 선택받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어젯밤 야간근무를 마치고 그는 오전 내내 단잠에 빠져 있었고 아내는 동네 친구들과 카페에 수다를 떨러 나갔다. 누군가가 잠을 깨우던 그 순간까지도 그는 선택받은 삶의 안온함을 의심할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은 다짜고짜 상군을 때렸다. 미처 잠이 깨지 못한 정신에 황당함과 공포가 뒤섞여 살려달란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이 터지고 눈두덩이가 부어오른 채로 식탁 의자에 묶였다. 마주 앉은 갈색 머리의 남성을 겨우 바라보고 있는 지금까지도 상군은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하지 못했다. 다만 지난 44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날 뿐이었다.


“이,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끄어억!”


마지막 힘을 짜내 내뱉은 상군의 말은 옆에 서 있던 사내의 발길질에 무참히 뭉개졌다. 잠에서 깨어난 상군의 정신은 비로소 인지되기 시작한 공포에 짓눌리고 있었다.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호흡은 불규칙하게 가빠졌다.


시청 경비단 부단장 빅토르는 상군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상군 씨, 잘 협조하면 별일 없을 거야. 민철용이라고 알지?”


“미, 민철용?”


상군은 기갑 로봇을 대여하러 왔던 시청 경비단 간부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 민철용을 왜 죽인 거지?”


“죽······여? 몰라, 난 몰라! 난 민철용이 죽은 것도 몰랐어!”


옆에 있던 사내 둘이 각자 몽둥이와 단도를 꺼내 들었고 상군은 기겁하며 몸부림을 쳤다. 빅토르가 손을 들어 둘을 제지했다.


“민철용이 어제 저격수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몰랐나?”


“모, 몰라!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자네가 민철용한테 협박을 했다던데? 감히 연합군이 내건 조건을 어겼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말이야.”


“무, 무슨 소리야! 연합군 장비나 관리하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


“그래? 그럼 기갑 로봇 80기를 빌려줄 때 적포 클럽의 리더는 살려두라는 조건을 내건 것도 모르는 일인가?”


막힘없이 항변하던 상군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빅토르는 상군의 반응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조건을 내건 것 자체는 사실이란 말이지? 빅토르는 갈색 수염을 어루만지며 순수하게 호기심 차원으로 물어본다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래, 그래, 알겠어. 민철용의 죽음과는 관계가 없다? 일단 믿어주지. 하지만 대여 조건을 내건 건 사실이다, 이 말이지? 당신 말마따나 연합군 장비나 관리하는 사람이 로봇 반납 잘 됐으면 그만인 일에 왜 그런 조건을 걸었을까? 응? 누구 지시로 그런 걸까?”


세 명의 남성이 자신을 엉망으로 두들겨 팬 뒤 둘러싸고 있는 이 기이한 상황과 빅토르의 평안한 호기심은 기괴한 불균형을 일으키며 상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상군은 떨리는 턱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다급히 말을 꺼냈다.


“그, 그, 누구인지는 나도 몰라!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갈색 수염을 어루만지던 빅토르는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으로 상군의 턱을 부여잡았다. 부들거리는 턱의 떨림이 빅토르의 손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알아, 알아, 시키는 대로 하시는 거. 그러니까 누가 시켰냐고. 아는 대로 다 털어놓자고. 좋은 말로 할 때 말이지.”


빅토르의 손아귀를 느끼며 상군은 이를 악물었다. 옆에 있던 사내의 단도가 그의 목덜미에 소름 끼치는 차가운 감촉을 전달했다. 목까지 올라오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상군이 말했다.


“지, 진짜 몰라! 연합군 허가 코드를 받은 자들이었어! 다, 당연히 연합군의 허가를 받은 거라서 시, 시키는 대로 했어!”


빅토르는 상군의 턱을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질문을 이어 갔다.


“연합군 내에서 직접 내려온 명령이 아니라 허가 코드를 받은 놈들의 사주란 말이군. 외부에서 온 놈이란 말이잖아. 놈들의 정체에 대해 짐작하는 게 있었을 텐데.”


상군은 민철용 이전에 자신을 찾아온 자들을 떠올렸다.


“차, 찻잎을 취급하는 도매상이라고 했어!”


“에이 썅, 피를 좀 더 봐야 얘기할 마음이 생길 건가 보군.”


단도의 칼날이 상군의 경동맥을 짓눌렀다. 상군이 비명을 토해내자 빅토르의 두꺼운 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을 벌린 채 멍한 시선을 던지던 상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흐르기 시작했다. 상군은 울먹이며 자신도 모를 말들을 마구 쏟아냈다.


“정말이야······찻잎을 유통하는 업자들이라고 했어. 놈들에게 케모마일 차를 몇 포 받아먹기도 했어. 연합군 기갑 로봇 정비창엔 살아있는 인간이라고는 나밖에 없어! 휴머노이드 놈들이 차를 알겠어? 정말 귀중한 차였다고! 내 생전 케모마일 차를 마셔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불법 법관 놈들이 밀수품 취급하는 건 공공연하게 다 알려진 사실이잖아. 놈들은······”


빅토르가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잠깐, 불법 법관? 놈들이 법관들이었다는 건가?”


“인간이라곤 나뿐인 그곳에 차를 끓이는 다기茶器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녀석들은 큰 대접에 찻잎을 넣고 물을 붓고 나서는 성법으로, 그 반짝거리는 성력의 빛으로 차를 만들었어. 노, 놈들은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 생각했겠지만, 나, 난 봤어! 케모마일 차를 한 잔 비우고 나면 감쪽같이 한 잔이 다시 생기곤 했어! 나, 난 그저······”


심문은 그 후로도 좀 더 이어졌지만 이미 패닉에 휩싸인 상군에게서 더 이상의 가치 있는 정보를 얻긴 어려웠다. 불법 법관? 빅토르의 머릿속에 없던 새로운 후보군이었다. 법관들을 소탕하기 위한 기갑 로봇에 관여한 자들이 같은 법관들이었다고?


적포 클럽의 비밀 정보를 입수한 것도, 기갑 로봇 80기 대여권을 따낸 것도 미켈슨이 홀로 해낸 일이었다. 미켈슨이 부단장인 자신과도 상의하지 않고 홀로 일을 처리하는 건 예외적인 일이었다. 심지어 적포 클럽 소탕 작전 때도 빅토르를 비롯한 최측근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자꾸 등장하는 ‘불법 법관’이란 이름이 빅토르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적포 클럽의 비밀 정보를 아는 이는 당연히 불법 법관들일 것이다. 그리고 상군의 말을 빌리자면 기갑 로봇 80기 대여에도 불법 법관들이 관여돼 있다. 둘 다 시장님이 단독으로 처리한 일들이었지.’


빅토르는 이상군의 처리를 수하들에게 맡겨 놓고 식탁 테이블에 앉았다. 재갈을 물린 상군의 입에서 끔찍한 신음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빅토르는 식탁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찻잎 통을 보았다. 상군이 이야기하던 케모마일 찻잎이었다.


‘시장님은 경찰국 국장을 붙잡아 두기 위해 직접 용일산 타워에도 가셨었지. 적포 소탕 작전 당일 시장님은 타워에 있었다. 타워엔 누가 있는가?’


누르죽죽한 찻잎을 보며 빅토르의 심증은 하나로 모아졌다.


‘불법 법관의 우두머리, 성황이 있다. 그녀가 배후다.’


상군의 집에서 빅토르가 생각하고 있던 두 명의 인물, 미켈슨과 성황은 그 시각 공교롭게도 한자리에 있었다. 용일산 타워, 성황의 응접실에서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연합군의 생각을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성하.”


미켈슨의 말에 성황은 찻잔에 얼마 남지 않은 케모마일을 모두 마셨다. 그녀는 특유의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지금 저자들의 소요는 그저 힘없는 사람들의 넋두리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더 애쓰시면 상황이 좋아질 겁니다.”


미켈슨은 성황을 보며 마주 웃었다.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다.


“성하, 나는 우리 시청이 자멸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이후에 행동에 나서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미켈슨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염려는 꽤 진지한 것이었다. 현 사태에 대한 경찰국과 연합군의 방관은 그에게 있어 암담 시청의 자멸을 의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시청의 힘은 강대합니다. 괜한 걱정입니다, 시장.”


“성하, 애초에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연합군이 든든한 뒷배가 돼줄 것이라고 암시하신 건 성하셨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저희가 적포 클럽을 굳이 무리하게 습격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치안 공백이나 생길 게 뻔했죠. 그럼에도 저희들은 성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얻기 위해······”


성황이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빈 사기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 미켈슨은 입을 다물었고 성황은 그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녀의 불쾌한 감정을 깨끗이 감추는 미소였다. 근본이 길바닥의 양아치인 녀석은 어쩔 수가 없구나. 성황은 케모마일 차를 내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차 대접을 하는 자신의 처지를 동정했다.


“그래서 이 노파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연합군의 힘입니다. 오늘도 치안대 본부를 찾아갔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입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하께서 제게 넌지시 암시하셨던 사항입니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성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일깨워 드리는 겁니다.”


미켈슨은 담백하고도 직설적으로 성황에게 말했다. 연합군의 개입. 지금 사태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성황은 내려놓은 찻잔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내 미력하나마 힘을 써보겠습니다.”


미켈슨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황은 푸근한 미소로 화답했다. 분명 비어 있던 그녀의 찻잔에 어느새 케모마일 차가 가득 차 있었지만, 미켈슨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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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거짓 넋풀이 05 24.07.19 3 0 11쪽
72 거짓 넋풀이 04 24.07.18 5 0 10쪽
71 거짓 넋풀이 03 24.07.17 4 0 12쪽
70 거짓 넋풀이 02 24.07.16 6 0 10쪽
69 거짓 넋풀이 01 24.07.15 5 0 10쪽
68 암살자의 맨얼굴 13 24.07.14 7 0 10쪽
67 암살자의 맨얼굴 12 24.07.13 6 0 11쪽
66 암살자의 맨얼굴 11 24.07.12 6 0 11쪽
65 암살자의 맨얼굴 10 24.07.11 6 0 13쪽
64 암살자의 맨얼굴 09 24.07.10 7 0 13쪽
63 암살자의 맨얼굴 08 24.07.09 8 0 10쪽
62 암살자의 맨얼굴 07 24.07.08 7 0 11쪽
61 암살자의 맨얼굴 06 24.07.07 7 1 12쪽
60 암살자의 맨얼굴 05 24.07.06 8 1 9쪽
59 암살자의 맨얼굴 04 24.07.05 9 1 11쪽
58 암살자의 맨얼굴 03 24.07.04 8 1 11쪽
57 암살자의 맨얼굴 02 24.07.03 9 1 9쪽
56 암살자의 맨얼굴 01 24.07.02 8 1 10쪽
55 최후의 사냥꾼 13 24.07.01 10 1 13쪽
54 최후의 사냥꾼 12 24.06.30 7 1 14쪽
53 최후의 사냥꾼 11 24.06.29 8 1 11쪽
52 최후의 사냥꾼 10 24.06.28 7 1 10쪽
51 최후의 사냥꾼 09 24.06.27 9 1 11쪽
50 최후의 사냥꾼 08 24.06.26 9 1 12쪽
49 최후의 사냥꾼 07 24.06.25 9 1 11쪽
48 최후의 사냥꾼 06 24.06.24 7 1 12쪽
47 최후의 사냥꾼 05 24.06.23 7 1 10쪽
46 최후의 사냥꾼 04 24.06.22 7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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