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와 반역 04

허상수는 대성황당 지하 공동으로 차출된 이래 처음으로 임시 치료실에서 환자를 받았다. 존재 자체가 극비인 이 공간에 손님이 올 일은 없었고 이곳에서 부상자를 발생시킬 전투가 벌어질 일은 더더욱 없었기에 치료실은 사실상 허상수의 개인 사무실 노릇을 했다. 따라서 유칸 법관의 연락을 받았을 때 허상수가 허둥지둥한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그는 진정으로 임시 치료실에 환자가 오리라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는 오른 어깨의 총상과 함께 후두부 열상裂傷이 심한 상태였다. 두 상처 모두 시간이 오래 지나 진득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상처 부위를 깨끗이 닦아낸 상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깨 쪽 총상은 오른쪽 어깨의 삼각근에 맞아 큰 혈관이 다칠 염려가 없었지만 후두부의 열상은 상처가 상당히 깊었다. 피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출혈이 지속됐으면 됐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말라붙어 지혈될 열상이 아니었다.
‘뭐, 잘 됐으면 된 거지.’
상수는 큰 고민 없이 환자의 응급처치를 마친 후 그를 회복 침대에 눕혔다. 태욱의 방문에 급히 자리를 비켜 줬던 상수는 유칸 법관을 비롯한 사람들이 치료실에 모여드는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거긴 말만 치료실이지 내 공간이라고!
다행히 치료실의 부산스러운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태욱이 자리를 뜨고 유칸도 뒤이어 치료실을 나왔다. 총을 든 사내 둘이 치료실 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은 환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있던 문지기들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환자가 잠이 들었다는 말에 상수는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실 안에 들어섰다. 이제 다시 자신의 개인 공간이 된 그곳으로.
치료실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몸을 돌리자마자 상수는 얼어붙듯이 멈춰 섰다. 두 팔을 힘없이 들어 올리는 상수의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치료실의 존재 의의를 처음으로 일깨운 상수의 첫 환자, 주흥진이었다. 흥진은 천자총통을 상수에게 겨누고 있었다. 상수가 비명을 지르지 못한 건 흥진이 왼손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입 벙끗하면 쏜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분명히 전해지는 의사 표시였기에 상수는 입을 다문 채 들어 올린 두 팔을 벌벌 떨었다. 제기랄, 이런 짓거리에 신물이 나서 이곳 지하 공동 차출에 자원한 건데. 지하 공동에 차출된 자는 다시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무법의 세상에 환멸을 느낀 상수가 선택한 건 남은 인생의 평온이었고 그래서 선택한 지하 공동의 삶이었다. 한데 그 평온이 지금 깨지고 있었다.
흥진은 최대한 문 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짓으로 상수를 치료실 안쪽까지 이끌었다. 캡슐이 열려 있는 회복 침대 뒤편에서 흥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말만 잘 들으면 아무 일 없다. 내 옷에 있던 무전기 어디 있지.”
“저, 저기 밖에 있는 문지기들이······”
흥진이 총구를 까닥거렸다. 총구는 문지기들이 서 있을 문 쪽을 향해 있었다. 상수는 흥진의 의도를 곧바로 간파한 눈치 빠른 자신을 원망했다. 두 사람은 다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악! 환자가 죽었다!”
치료실에서 들려온 벼락같은 외침에 문지기 두 명은 즉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으헉!”
먼저 들어간 사내는 금룡 장식이 휘감긴 천자총통의 손잡이에 턱을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다. 흥진은 곧바로 뒤에 있는 사내를 벽 쪽으로 몰아붙인 뒤 미간에 총구를 겨눴다.
“무전기 어디 있지.”
미간에 총구를 겨냥당한 사내가 쓰러진 사내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쓰러진 사내를 향해 흥진이 몸을 움직이는 순간 빈틈을 노려 제압하겠다는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흥진은 총을 겨누고 있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이봐, 의사 양반. 저 남자 품에서 무전기 좀 찾아봐.”
상수가 쓰러진 사내의 품을 뒤지는 걸 보면서 문지기는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상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흥진에게 건넸다. 흥진은 왼손으로 무전기 전원 버튼을 켜는 순간에도 벽에 기대 있는 문지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파탐지국에서 매일 만지던 무전기였다. 보지 않고서도, 왼손으로도 무전기를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아아- 흥진이다. 호출 바람.”
“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응답이 왔다. 미키의 목소리였다.
유련이 암실 회의 참석을 위해 방을 나간 후 통령실 손님용 숙사에서 미키는 홀로 있었다. 유련을 만난 이상 이제 남은 사람은 흥진이었다. 무일과 함께 있었던 공원 정자에서 한 차례 흥진과 교신에 성공했던 터라 미키는 여러 번 무전기로 교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꺼져 있는 무전기는 당연히 응답이 없었다. 미키는 무전기를 켜둔 채로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흥진의 무전이 온 것이었다.
“미키. 나는 공로 클럽을 빠져나왔다. 여긴 대성황당 지하로 추정되는 곳이다. 남태욱 국장이 나를 이곳으로 안내했다. 탕!”
“진!”
총성과 함께 흥진의 교신이 끊어졌다. 미키는 낭패감에 빠져 어쩔 줄 몰랐다. 무전기를 붙잡고 수차례 교신을 시도했지만 무응답이었다. 총성은 흥진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무전기를 향한 것인가.
흥진은 열려 있는 치료실 문 너머로 몰려온 정장 차림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선두에 서 있는 남성의 총구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왼손에 있던 흥진의 무전기는 부서진 채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주흥진, 우리가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얌전히 있는다는 조건 아래서다. 총 치우고 물러나라.”
흥진은 문지기의 미간을 겨누던 총구를 거두고 치료실 안쪽으로 물러났다. 신기할 정도로 몸을 떨고 있는 상수가 그들 뒤로 몸을 숨겼다.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우면 총을 압수하겠다.”
사내들은 쓰러진 문지기를 수습한 뒤 문을 닫았다. 치료실엔 남은 건 흥진뿐이었다.
흥진이 치료실에 격리된 그 시각 유련이 회의를 마치고 미키가 있는 숙사에 복귀했다. 유련은 미키에게서 흥진과의 교신 내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대성황당 지하라고 했다고요?”
“그래요! 도대체 어쩌다가 거기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진이가 지금 거기 있답니다. 당장 구하러 가요! 총성이 울리고 무전이 끊겼어요. 위험한 상황인 게 분명해요!”
유련은 길길이 날뛰는 미키를 진정시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는 암실 회의에서 들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 밤 진리의 왕홀을 회수하기 위해 대성황당에 대한 공격이 예정돼 있다.’
통령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보고와 명령, 회의와 접견 속에서 간신히 잠깐의 휴식 시간을 얻었다. 암실 회의가 끝난 직후였고 다행히 통령의 집무실을 찾기로 예정된 약속은 이후 삼십 분 동안은 없었다. 그러나 휴식 시간에도 통령은 ‘중차대한 일’의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되새기고 점검했다.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손쉬운 과정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시나리오가 그려진다는 상황 자체에 있다. 그것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러한 시나리오를 그리기 위해 그는 한평생을 바쳤다.
“각하, 남태욱 국장입니다.”
호출기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비서의 목소리가 통령의 휴식 시간을 금세 뺏었다. 통령과 마찬가지로 제 나름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 인물, 남태욱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응접용 소파에 몸을 누이고 있던 통령은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를 맞았다. 한 달여간 실종되었던 경찰국 국장과 나눌 수 있는 소소한 환담이 이어졌다. 짧은 환담을 마무리하며 통령이 먼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고생 많았습니다. 한성에까지 와서 정무일을 체포한 경찰국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정무일은 이제 웨이치에게 넘기고 국장께선 어서 암담으로 돌아가세요. 암담의 상황이 시시각각 위태로운 이때 하루라도 빨리 경찰국이 국장 부재 상황에서 벗어나야지요.”
최초에 윤남균 피살사건 범인으로 정무일 체포를 지시한 건 통령실이었고 태욱이 정무일 체포 지시를 용일산 타워에 대한 점거로 확대시켰을 때 이를 허가한 것 역시 통령실이었다. 하지만 태욱이 돌연 사라진 뒤 통령실은 경찰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정무일 신원 확보를 위해 자체적으로 움직였다. 게다가 성황의 명을 받은 천자교 비밀 결사의 법관들 역시 정무일을 노리기 시작했다. 태욱은 통령실과 법관들의 움직임을 모두 주시하며 결국 정무일의 신원을 먼저 확보했다. 태욱이 통령실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걸 통령이 모를 리 없었다. 통령에 장단을 맞추듯 태욱 역시 본론으로 들어섰다.
“각하, 제가 정무일을 넘기면 정무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태욱은 소파에서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통령은 태욱의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며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고생했습니다. 이제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속히 복귀하세요. 경찰국에 남 국장의 힘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따스하게 부하를 다독이는 상관의 모습이었다. 태욱은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범의 탈을 쓴 뱀. 누군가가 말했던 통령에 대한 인물평이었다.
“각하, 직접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제가 사라진 후 각하께선 자체적으로 정무일의 신원을 확보하기 위해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성황 역시 정무일의 신원을 확보하려고 했었고요.”
통령은 여전히 따스한 눈길로 태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태욱이 말을 이었다.
“제가 각하께 정무일을 넘기면 각하는 정무일을 성황에게 넘기시는 겁니까?”
채광창에 드는 햇살의 기울기가 점점 완만해졌다. 해가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각하, 성황과 무슨 밀약을 하신 겁니까?”
해가 넘어가려는 시간은 힘겹게도 길 테지만, 일단 넘어간 해는 금세 밤을 부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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