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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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선생
그림/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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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21:32
최근연재일 :
2024.07.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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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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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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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인간 제본 07

DUMMY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죠? 갑자기 아버지라니.”


수송기 조종실에서 미키가 웨이치와 태욱에게 정무일을 화제로 던지던 순간, 수송기 치료실에서도 같은 화제가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치료실 침대에 누워 있던 유련은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침대 곁 간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흥진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유련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고 있었다.


“별로 놀랍지 않은 얼굴이군요. 덤덤한 흥진 씨 반응에 제가 더 놀랍네요.”


“정 팀장님이 천생원에서 유련 씨를 받아왔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유련은 힘겹게 몸을 가누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왼쪽 견갑골의 통증도 그녀를 다시 눕힐 순 없었다. 흥진의 덤덤한 눈빛을 마주 보며 유련이 말했다.


“정무일은 가임可妊 인간이었어요. 소, 돼지, 말처럼 직접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임 능력이 있는 돌연변이 남녀가 만나 딸을 낳았어요.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천생원에서 태어난 하늘의 자식이 아니라, 인간의 자식인 거죠.”


흥진의 여상스러운 눈빛이 오히려 유련의 말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게 저예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단 말이군요.”


“아! 사실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약간의 의심, 불확실했던 정보,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실들. 짧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무튼 우리가 한성에 오기 전 만났던 전직 경찰국 직원 기억나요? 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에게 통행증을 만들어 준 그녀. 제겐 언니 같은, 아니 엄마 같은 분이시죠. 그분이 마침내 제게 확신을 주셨어요. 아버지란 존재의 확신을.”


유련은 두서없이 말을 중언부언했다. 왼쪽 견갑골의 통증이 그녀에게 주는 미열과 비밀을 털어내는 희열이 겹쳐 그녀의 머리를 뜨겁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뜨거워진 머리와 반대로 흥진의 굳은 얼굴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유련과 흥진은 한순간도 서로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뜨거운 불꽃과 차가운 얼음장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결국 눈싸움 패배를 승복하듯 흥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품에 손을 집어넣어 꺼낸 물건이 그녀의 뜨거운 입을 다물게 했다.


흥진은 손에 천자총통을 들었다.


“우리가 함께 정무일 추적팀을 이룬 것이 행운인 건지 불행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천자총통을 든 채 이야기하는 흥진을 보며 유련은 불안감을 느꼈다.


“정무일은 이제 없습니다.”


유련은 흥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총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쏘았으니까요.”


뜨거운 불꽃과 차가운 얼음장이 마주 보는 자리에 축축한 수증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상념의 수증기인 듯 흥진을 회상에 젖게 했다.




흥진은 오늘 새벽 2시 14분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대성황당 지하 공동시설의 치료실에 있던 흥진이 연합군의 기습을 알게 된 시각이 오늘 새벽 2시 14분이었다. 노법관 유칸은 흥진에게 기습 사실을 전하자마자 연합군 휴머노이드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흥진과 문지기는 간신히 휴머노이드를 제압했지만 지하 공동으로 통하는 철문을 통해 들어온 또 다른 연합군 휴머노이드의 공격으로 문지기 역시 치료실 밖 복도에서 목숨을 잃었다. 복도를 빠져나가려던 흥진은 하릴없이 치료실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치료실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 흥진이 즉각 천자총통을 발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총통의 금룡 장식이 금빛으로 빛났고 총구에선 흰빛이 번쩍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천자총통이 뿜어낸 성력의 총알에 가슴팍을 정통으로 맞았다.


총에 맞아 쓰러진 이는 정무일이었다.


흥진은 경악하며 무일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무일은 흥진의 품에 안겨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흥진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흥진아, 잘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무일에다가 그가 총까지 맞았단 사실에 경황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고매한 술법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흥진은 치료실 문을 닫으며 들어온 또 한 명의 사내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닫힌 문에 기대선 채로 흥진과 무일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수리가 훤히 벗어진 퉁퉁한 살집의 중년 남성은 서글픈 표정으로 겨우 입을 뗐다.


“흥진 군.”


흥진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프리······”


대성황당 지하 공동시설의 치료실에서 마침내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으나 그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제프리는 흥진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무일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무일의 눈을 감겼다. 흥진은 축 늘어지는 무일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제프리가 다시 일어서며 말했다.


“흥진 군. 연합군이 들이닥치고 있네.”


무일을 바닥에 눕힌 흥진이 제프리를 따라 일어났다. 어두워진 흥진의 안색을 살피며 제프리가 말을 덧붙였다.


“세백도, 아니 정무일도 동의했네. 자네도 듣지 않았나, 그가 잘했다고 말한 것을 말일세.”


흥진아, 잘했다.


이젠 유언이 된 정무일의 마지막 말이었다.


흥진은 천자총통을 제프리에게 건넸다. 역겨운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흥진은 총을 보지 않으려 했다. 제프리는 천자총통을 건네받으며 흥진에게 말했다.


“고맙네.”


흥진은 제프리에게 미소를 보냈다. 기괴하게 비틀린 미소였다.


“6년간 나도 고마웠습니다. 이젠 다신 보지 맙시다.”




흥진은 이 일의 시초가 되었던 그날 저녁도 생각했다.


그날은 윤남균 피살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이었고, 퇴근 후 흥진이 적포 클럽을 찾은 날이었으며, 흥진이 마지막으로 제프리와 함께 트윈스의 맥주를 마시던 날이었다.


“흥진 군, 부탁 하나 하고 싶네.”


“뭡니까?”


“정무일 팀장을 찾아주게.”


“왜죠?”


흥진은 제프리가 방음 성법을 구사하는 걸 지켜보았다. 클럽 안 노점상 거리의 한복판인 트윈스의 가게 앞에서 둘만을 위한 방음 성법을 구사하는 건 언제 보아도 신기한 술법이었다. 아무튼 이 아저씨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흥진이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며 제프리가 미소를 지었다.


“흥진 군, 결국 찾았네.”


제프리의 말에 흥진 역시 맥주잔을 기울였다.


“놀라운 일이지. 등잔 밑이 어둡다곤 하지만 이다지도 무지했던 것을 용서하게.”


제프리가 탁자 위에 천자총통을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범인은 정무일이었네.”


“방음 성법까지 치면서 말하는 걸 보니 윤남균 실장님을 살해한 범인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군요.”


“그래, 6년 전, 오라사에서 있었던 일의 범인을 말하는 거네. 그자가 정무일이었어.”


흥진은 제프리가 올려놓은 천자총통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 총으로 정무일을 쏘면 되네.”


흥진이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희한한 살인 청부군요.”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네.”


제프리의 말에 흥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프리가 맥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제 트윈스에 남은 갈색 맥주는 없었다.


“자네의 일 아닌가. 선택권은 오로지 자네에게 있지. 자네의 뜻에 맡기겠네.”




회상이 끝나자 허공에 무의미하게 흩어지던 시선의 초점이 모인다. 또렷해진 흥진의 시선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비를 잃은 그녀가, 울고 있었다. 흥진은 무일이 남긴 유일한 혈육에게, 무일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남겼다.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을 받지 못한 불쌍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마침내 그는 선물을 얻게 되었지만 6년 전 오라사에서 그는 어렵게 얻은 선물을 다시 잃었습니다.”


유련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흥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겐 선물이었던 그것이 누군가에겐 천기를 담은 예언서였다는 사실이 불행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자의 서’라고 불렀습니다.”


유련은 경악에 찬 눈으로 흥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6년 전 오라사에서 누군가 천기를 누설했습니다. 그리고 내 선물이 깨졌습니다.”


유련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천자의 서를 열어본 자, 그리하여 천기를 누설한 자, 그자가 바로 정무일입니다.”




성황은 용일산 타워 지하 5층에 홀로 있었다. 응접실로 꾸며져 있던 지하 5층의 방이었다. 한 달여 전 남태욱을 억류하기 위해 그랬듯 이번에도 성황은 방에 결박의 성법을 걸어 놓았다. 방엔 기다란 탁자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성황은 탁자 위에 올려진 시신 한 구를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세백, 나는 네 삶을 동정한다.”


막랑으로 태어나 세백으로 살았으며 무일로 죽음을 맞이한 사내가 시신으로 누워 있었다. 성황은 오랜 시간 그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노파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성력의 빛무리가 점차 지하 5층의 어둠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세백, 천자총통으로 인해 네 삶의 질곡은 모두 깨끗이 소멸하였다. 티끌 한 점 없이 표백된 너의 텅 빈 삶을 나는 한 권의 책으로 제본할지니 너의 가죽으로 표지를 꾸미고, 너의 고혈로 종이를 짜고, 너의 숨결로 속지를 채우고, 너의 뼈로 책을 엮어, 너의 혼과 백으로 서書를 갖출 것이다.”


시신은 한 알갱이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성력에 휩싸여 빛났다.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났고,


탁자 위에 책 한 권이 남았다. 고풍스러운 갈색 가죽 커버의 서책이었다. 갈색 가죽 커버의 전면부엔 황금색으로 덧댄 직사각형의 빈칸이 있었다. 책의 제목이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성황은 오랜 시간에 걸쳐 책의 제목을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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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거짓 넋풀이 08 NEW 46초 전 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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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거짓 넋풀이 06 24.07.20 5 0 14쪽
73 거짓 넋풀이 05 24.07.19 5 0 11쪽
72 거짓 넋풀이 04 24.07.18 6 0 10쪽
71 거짓 넋풀이 03 24.07.17 4 0 12쪽
70 거짓 넋풀이 02 24.07.16 6 0 10쪽
69 거짓 넋풀이 01 24.07.15 5 0 10쪽
68 암살자의 맨얼굴 13 24.07.14 7 0 10쪽
67 암살자의 맨얼굴 12 24.07.13 6 0 11쪽
66 암살자의 맨얼굴 11 24.07.12 6 0 11쪽
65 암살자의 맨얼굴 10 24.07.11 6 0 13쪽
64 암살자의 맨얼굴 09 24.07.10 7 0 13쪽
63 암살자의 맨얼굴 08 24.07.09 8 0 10쪽
62 암살자의 맨얼굴 07 24.07.08 7 0 11쪽
61 암살자의 맨얼굴 06 24.07.07 7 1 12쪽
60 암살자의 맨얼굴 05 24.07.06 9 1 9쪽
59 암살자의 맨얼굴 04 24.07.05 9 1 11쪽
58 암살자의 맨얼굴 03 24.07.04 9 1 11쪽
57 암살자의 맨얼굴 02 24.07.03 9 1 9쪽
56 암살자의 맨얼굴 01 24.07.02 8 1 10쪽
55 최후의 사냥꾼 13 24.07.01 10 1 13쪽
54 최후의 사냥꾼 12 24.06.30 8 1 14쪽
53 최후의 사냥꾼 11 24.06.29 8 1 11쪽
52 최후의 사냥꾼 10 24.06.28 7 1 10쪽
51 최후의 사냥꾼 09 24.06.27 9 1 11쪽
50 최후의 사냥꾼 08 24.06.26 9 1 12쪽
49 최후의 사냥꾼 07 24.06.25 9 1 11쪽
48 최후의 사냥꾼 06 24.06.24 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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