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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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선생
그림/삽화
공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21:32
최근연재일 :
2024.07.18 08:00
연재수 :
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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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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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994

작성
24.06.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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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인간 제본 08

DUMMY


“그러고 보니 정무일 씨는 어떻게 된 거지?”


미키는 질문에 답을 받을 수 없었다.


쿠쾅쾅!


연합군 인공위성에서 수직 낙하한 미사일이 황갈색 수송기를 강타했다.


조종실과 몸체의 연결부가 찢어지며 수송기 기체는 두 동강이 났다. 수송기의 머리는 잃어버린 뒤통수를 땅으로 처박으며 코를 하늘로 쳐들었다. 마치 조종실 안에 있던 웨이치와 남태욱, 미키를 떨구려는 듯한 자세로 수송기 머리가 추락하고 있었다.


동체 쪽에 있던 흥진과 유련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잃은 수송기의 동체는 꼬리를 하늘로 쳐들며 지상으로의 추락을 시작했다. 망연하게 서로를 바라보던 흥진과 유련의 귀를 덮친 강렬한 충격음이 시작이었다. 크게 기울어지는 동체에 흥진과 유련은 재빨리 붙잡을 수 있는 것들에 손을 뻗었지만 허사였다. 무중력 공간에 내던져지듯 두 사람의 몸이 떠오르더니 이젠 바닥이 된 치료실 문을 향해 고꾸라졌다.


간신히 벽의 붙박이 선반을 붙잡은 흥진이 떨어지는 유련을 붙잡았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고 동시에 같은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송기가 추락하고 있다.’


조종실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충격에도 조종석의 등받이를 붙잡는 데 성공한 미키는 아득한 지상의 전경이 발아래에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황당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물론 가공할 자유 낙하의 속도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지금의 순간이 꿈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정면에 있어야 할 조종실 전면 창이 머리 위에 있고 조종실로 들어오는 철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 지상의 산맥 줄기가 보이는 상황은 그에게서 현실감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미키의 휴머노이드적 마인드는 이런 와중에도 백색 동공을 쉼 없이 움직이며 90도로 기울어진 조종실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함께 있었던 태욱과 웨이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발아래 펼쳐진 미키의 시야에 동체를 아래로 처박으며 떨어지는 수송기의 윗부분이 얼핏 보였다. 미키는 그곳에 있을 흥진과 유련을 떠올렸다.


그때 머리를 잃은 수송기의 동체 부분에 인공위성 미사일이 한 발 더 떨어졌다. 폭발이 일으키는 가스 구름과 화염의 잔해가 미키의 백색 동공에 또렷이 박혔다.


쿠쾅쾅!


또 한 번의 폭발음과 함께 흥진은 유련의 발아래 쪽, 열려 있는 치료실 문에서 터져 나오는 불기둥을 보았다. 화염의 일렁임이 유련을 가운데 두고 그 아래에서 봄꽃처럼 피어났다. 치료실 전체를 덮칠 기세로 솟구쳐 오는 화염은 유련을 삼키고 흥진을 삼킬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흥진에겐 이 광경이 극도로 느리게 재생되는 영상처럼 보였다.


느림은 끊임없이 이어져 마침내 멈춤에 도달했다.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 삶을 갈구하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 그녀의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불기둥의 향연. 흥진은 이 모두를 시간이 멈춘 회화의 한 장면처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죽음이 확정된 순간 찾아오는 인식의 확장인가? 삶의 마지막 순간이 박제가 되어 내게 영원토록 인지되는 것인가?


흥진은 그와 동시에 오른쪽 손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손에 쥐고 있는 ‘그것’은 흥진을 일깨우려는 듯 빛을 내뿜고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진 시간 속에서 그것은 흥진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총구가 흥진을 향하고 있었다. 유련을 향해 있던 흥진의 시선이 천자총통의 총구로 옮겨졌다. 흥진의 눈과 천자총통의 총구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총구에서 성력으로 충만한 빛이 뿜어져 나온 순간 흥진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이해한 모든 것을 잊었다.


완벽한 이해와 완벽한 몰이해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를 등지고 있지만 결국 하나였다.


빙그르르 돌던 동전이 찰나이자 억겁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뒤집혔다.


찰나이자 억겁의 시간을 견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눈을 뜬 그의 시선에 가장 먼저 보인 건 구불구불한 갈색 서까래 사이를 가로지르는 볏짚이었다. 볏짚은 군데군데 썩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마룻대는 옹골차게 천장의 중심을 떠받치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가 초가 전체를 은은하게 채웠고 볏짚이 새는 자리에 놓인 옹기그릇에 한 방울씩 빗방울이 모여들었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천장을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마룻대를 그는 누운 채로 한동안 응시했다.


“이제 정신이 드시오?”


똑바로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던 그는 말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열려 있는 문풍지 문 너머 마루에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보기 좋게 살이 붙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정수리는 거의 벗겨졌지만 뒷머리를 덥수룩하게 가리고 있는 은빛 머리칼엔 젊은이처럼 윤기가 흘렀다. 보슬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은빛 머리의 남성은 손을 뻗어 빗방울을 가늠하더니 이내 손을 털고는 물기를 바짓단에 쓱쓱 닦아냈다. 남성은 방 안에 누워 있는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빙긋이 웃었다.


“오랜만에 단비가 내리는구려.”


방 안에 누워 있던 사내는 대꾸 없이 마루에 앉은 남성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마루에 있던 남성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문지방을 넘어 그가 누워 있는 곁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누워 있는 상태 그대로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말을 못하시오? 아니다. 한반도 사람이 아닌가? 닌하오? 곤니찌와?”


“한반도 말로 하셔도 됩니다.”


중년의 남성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재롱을 피우는 것이 거북했는지 사내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와 마주 보며 앉았다. 중년의 남성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미소를 은은하게 짓더니 머쓱한 듯 뒷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하하! 거 참, 젊어 보이는데 퍽 과묵하시구먼. 아무튼 정신이 들어 다행이오. 내 이름은 제프리라고 하오. 뭐, 긴 이름도 있긴 한데 그냥 편하게 제프리라고 부르시오.”


제프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던 사내는 제프리의 손을 맞잡았다. 제프리는 사내의 통성명이 이어지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예의 그 과묵함을 자랑하며 아무 말이 없었다. 제프리가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사내는 제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말이 없었다. 제프리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속으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닷가에 쓰러져 있었으니 바다 건너에서 표류해 온 사람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진짜로 여기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말투나 억양을 봤을 때 한반도 사람은 분명해 보이는데······그나저나 사람 목숨을 구해줬는데 이건 완전히 소 닭 보듯 하는구먼. 역시 그냥 버릇없는 과묵한 청년인가?’


“주흥진입니다.”


사내의 과묵한 입이 열렸다. 제프리는 주흥진이라는 이름을 입속에서 잠시 되뇌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 주흥진? 이름이 멋지구려! 과묵한 청년에게 어울린달까? 아무튼 반갑소. 아, 그러고 보니 시장하시겠구려. 차릴 건 별로 없긴 한데 일단 요기라도 합시다. 저렇게 비 오는 마당을 바라보며 마루에서 식사를 들면 맛없는 찬거리도 맛있는 법이지!”


“여긴 어딥니까?”


흥진의 첫 질문에 제프리가 두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호응했다. 묻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은 소통의 첫걸음이 아니겠는가? 제프리가 친절하게 답했다.


“여긴 오라사의 조그마한 갯마을이오. 민가라 해봐야 스무 집도 되지 않는 빈촌 중의 빈촌이지. 이 초가집엔 나 혼자 살고 있소. 그러고 보니 흥진 군은 어찌하다가 이곳 변두리의 바닷가에 쓰러져 있었던 거요?”


흥진은 오라사라는 지명이 퍽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바닷가에 쓰러져 있었다는 제프리의 말에서도 떠오르는 건 역시 없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고, 곧 그것이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벽 앞에 마주 선 것과 같았다. 벽 너머에 무수한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거기에 닿을 방법이 없었다. 흥진은 자신을 과거와 단절시키고 있는 이 거대한 벽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


“기억이 없습니다.”


“응? 기억이 없다고? 어디서부터 기억이 안 나는 거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시종 밝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제프리의 표정에 처음으로 진지한 우려가 피어났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제프리가 입을 열었다.


“방금 본인의 이름을 주흥진이라고 했었소. 그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단 말이오?”


“모르겠습니다. 주흥진이라는 이름도 그저 불쑥 떠올랐을 뿐입니다. 그게 제 이름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프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기억상실이 온 것 같군. 내가 흥진 군-일단은 흥진 군으로 부릅시다-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대에게 큰 상처나 외상은 없었지만, 뭔가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 여긴 요양하기 나쁘지 않은 곳이오. 푹 쉬다 보면 차차 기억을 회복할 거요.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내가 도와주겠소!”


제프리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푸근한 미소를 보였다. 흥진은 그런 제프리에게 은은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흥진의 뜻밖의 미소에 제프리가 그를 따라 웃었다. 부슬부슬 빗소리만이 가득한 초가집에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가의말

'인간 제본'이 끝났습니다. 다음 장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공모전 기간이 끝났네요. 연재는 지금처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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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거짓 넋풀이 04 NEW 9시간 전 3 0 10쪽
71 거짓 넋풀이 03 24.07.17 2 0 12쪽
70 거짓 넋풀이 02 24.07.16 5 0 10쪽
69 거짓 넋풀이 01 24.07.15 5 0 10쪽
68 암살자의 맨얼굴 13 24.07.14 7 0 10쪽
67 암살자의 맨얼굴 12 24.07.13 6 0 11쪽
66 암살자의 맨얼굴 11 24.07.12 6 0 11쪽
65 암살자의 맨얼굴 10 24.07.11 5 0 13쪽
64 암살자의 맨얼굴 09 24.07.10 6 0 13쪽
63 암살자의 맨얼굴 08 24.07.09 7 0 10쪽
62 암살자의 맨얼굴 07 24.07.08 6 0 11쪽
61 암살자의 맨얼굴 06 24.07.07 6 1 12쪽
60 암살자의 맨얼굴 05 24.07.06 8 1 9쪽
59 암살자의 맨얼굴 04 24.07.05 8 1 11쪽
58 암살자의 맨얼굴 03 24.07.04 8 1 11쪽
57 암살자의 맨얼굴 02 24.07.03 8 1 9쪽
56 암살자의 맨얼굴 01 24.07.02 7 1 10쪽
55 최후의 사냥꾼 13 24.07.01 9 1 13쪽
54 최후의 사냥꾼 12 24.06.30 7 1 14쪽
53 최후의 사냥꾼 11 24.06.29 7 1 11쪽
52 최후의 사냥꾼 10 24.06.28 6 1 10쪽
51 최후의 사냥꾼 09 24.06.27 8 1 11쪽
50 최후의 사냥꾼 08 24.06.26 8 1 12쪽
49 최후의 사냥꾼 07 24.06.25 8 1 11쪽
48 최후의 사냥꾼 06 24.06.24 6 1 12쪽
47 최후의 사냥꾼 05 24.06.23 7 1 10쪽
46 최후의 사냥꾼 04 24.06.22 6 1 11쪽
45 최후의 사냥꾼 03 24.06.21 7 1 11쪽
44 최후의 사냥꾼 02 24.06.20 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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