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노력과 동정

김호석은 자신의 마법을 막은 조이현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조이현!”
그러나 조이현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헐떡이고 있는 나에게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마주친 조이현의 눈에서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슬픔은 다음 순간 이어진 격노에 삼켜져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조이현은 김호석과 일당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세상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픈 애 건드리지 말랬지. 이 쓰레기들아.”
그 말에 김호석은 앞으로 한발 나서며 여전히 떨리는 맞받아쳤다.
“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이 노마 새ㄲ를 죽이든 살리든 네가 무..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나 조이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덤비라는 듯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그 도발적인 행동에 김호석과 일당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이 건방진 ㄴ이! 저자세로 나가주니까 진짜 네가 무서워서 그런 줄 알아!?”
“네가 아무리 영재다 뭐다 여기저기 떠받들어지는 ㄴ이라도 우리 다섯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아!?”
김호석과 일당은 각자 공격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 적을 태우는 불꽃이라!”
“이것은 내 적을 얼리는 냉기라!”
“이것은 내 적을 꿰뚫는 송곳이라!”
그러나 그들의 주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조이현이 손을 뻗자 다섯 명 모두 갑자기 발생한 엄청난 바람에 나가떨어지며 바닥 뒹굴었다.
조이현이 사용한 것은 심지어 마법 주문조차 아니었다.
단순히 손에서 발산한 마력에 의해 공기가 밀려나 강한 폭풍을 일으킨 것뿐이었다.
나는 새삼 조이현의 저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미 엑스퍼트 위저드 급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떨어진 다섯 명은 꽤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조이현은 그런 다섯 명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너희는 마법을 쓸 자격이 없어. 두 번 다시 마법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모두 부러트려 줄게.”
“히... 히이익!”
살벌한 말에 김호석을 뺀 다른 네 명은 기겁하며 도망치려 했다.
“얼어라. 아이스 바인드.”
조이현이 단축 영창으로 주문을 외우자 도망가던 네 명의 발밑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그 자리에 꼼짝 못 하게 됐다.
발을 붙잡은 얼음은 점점 그들의 몸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얼어붙은 몸 곳곳에서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악! 아.. 아파!! 엄마!! 살려줘!!”
김호석은 자기 친구들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실금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이현은 달리고 있는 김호석 쪽을 보지도 않고 손만 뻗은 채 주문을 외웠다.
“잡아라. 마나 그랩...”
그러자 김호석은 일전에 교실에서 조이현에게 당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힌 채 공중에 서서히 떠올랐다.
“시... 시ㅂ!! 이거 놔! 괴물 같은 ㄴ아!!”
김호석은 눈물 콧물을 쏟으며 버둥거렸다.
조이현은 마나 그랩에 더욱 마력을 부어 넣어 강도를 올렸고 김호석의 몸은 점점 찌부러지고 있었다.
한순간에 지옥도로 변해버린 이 공간에 압도돼 넋을 잃고 있던 나는, 김호석이 지르는 끔찍한 비명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현아! 그.. 그만해! 그러다가 진짜 죽어버리겠어!!”
나는 아픈 몸을 일으키며 힘겹게 소리쳤다.
너무 갑자기 소리를 질렀더니 상처가 울려 욱신거렸지만, 다행히 내 목소리가 닿았는지 조이현은 김호석과 다른 네 명에게 걸었던 마법을 풀어주었다.
마법이 풀리자 그대로 정신을 잃었는지 다섯 명은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이현은 쓰러져 있는 그 녀석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
나는 통증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으... 응. 괜찮지는 않지만... 괜찮아. 그런데 나보다 얘네들이 더 큰일인데?”
내 말에 조이현은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흥... 신경 쓰지 마. 널 죽이려고 했던 애들이니까.”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러다 얘들이 죽으면 네가 살인자가 되는데!”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거였다.
이런 놈들 때문에 앞으로 뛰어난 위저드가 될 재목인 조이현이 살인자가 돼서는 안 됐다.
“쟤들이 아니라 나를... 걱정한 거야?”
조이현이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지. 잠시만 기다려봐. 구급차 부를 테니까.”
나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마나폰을 꺼내 119에 연락을 했다.
“여보세요? 119죠? 여기 그.. 사람이 한 다섯 명 정도 다쳤는데요. 네... 그러니까 여기가요...”
그렇게 통화를 하며 문득 조이현을 봤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이 살짝 상기돼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통화를 마치자 한동안 나와 조이현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이현과 제대로 이야기 나눠볼 기회가 온 것임을 깨닫고 힘겹게 침묵을 깨며 물었다.
“저기...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지난번에도 그렇고.”
“응...”
“우리 되게 오랜만에 이야기 나누는 것 같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이렇게 물어보는 건 좀 이상한가?”
조금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 같아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조이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야. 안 이상해. 오랜만인 건 사실이잖아. 나는... 잘 지냈어.”
“그.. 그렇구나. 나도 잘 지냈어... 하하... 아닌가? 못 지낸 건가? 아무튼... 그래....”
그리고 뒤를 이어 또다시 이상한 침묵이 흐르고 말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그 침묵을 깼다.
“그..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별로 의미 없이 한 내 질문에 조이현은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으... 응? 어? 그게.. 어... 그러니까.... 아! 우... 우연히 지나가다 봤어! 이 근처에 볼일이 있었거든!”
갑자기 당황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구나.”
이번에는 조이현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나 봐? 맥스웰 버거에서.”
“응, 맞아.”
“갑자기 왜? 혹시 돈이 필요한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 그게 그러니까...”
나는 조이현에게 보조 마도구 개조 계획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조이현은 그 계획이 꽤나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구나. 확실히 그런 장치를 만들 수 있다면 좀 더 복잡한 마법도 구사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괜찮겠어? 마도구를 개조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텐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응, 실은 나도 그게 걱정이긴 한데. 개조용 마도구도 같이 살 거니까 엠튜브 찾아보면 어떻게든....”
하지만 나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내 연락에 119구급차가 오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구급차가 아닌 경찰차 사이렌 소리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햄버거 가게 점장이 내가 하도 안 돌아와서 나와봤다가 조이현이 살벌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결국 나와 조이현은 경찰서로 연행됐고, 김호석 외 네 명은 뒤이어 도착한 구급차 다섯 대에 각각 나눠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솔직히 뉴스에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큰 이 사건은 놀랄 만큼 조용히 묻어졌다.
그 이유는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조이현이기 때문이었다.
조이현이 경찰에 연행되자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그녀의 가족도 학교 선생님도 아닌 KWA에서 파견된 위저드들이었다.
KWA에서는 이 사건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길 원하고 있는지 경찰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그런 뉘앙스의 말로 압력을 넣었다.
이건 내 예상이지만, 아마 이런 사건 기록 하나하나가 앞으로 조이현이 위저드로 활약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싹을 잘라놓으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조이현 한 사람 때문에 협회가 뒤에서 움직이는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며 새삼 그녀가 앞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위저드가 될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KWA의 압력으로 경찰서 조사가 빨리 끝나자 나는 그 위저드들의 차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그리고 조이현은 집으로 가게 됐다.
모든 치료 비용은 KWA에서 지불해 준 덕분에 나는 최고 수준의 치유 마법을 받아 순식간에 상처가 나아 그날 바로 제법 늦은 시간이었지만 바로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냐고 엄마에게 혼났지만, 협회에게 입막음 당한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김호석 외 네 명도 등교해있었다. 모두 팔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당했던 일에 비해 굉장히 멀쩡한 모습인 것으로 봐 내가 받았던 그 최고 수준의 치유 마법을 얘들도 받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입막음까지도 나와 똑같이 당했는지 나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바로 눈을 돌리며 무시했다.
아르바이트는 당연히 잘렸다.
평소와 같이 출근을 하니 점장이 나를 조용히 불러 해고 사실을 전해줬다.
그런 소동을 벌였으니까 잘리는 건 당연한 거라고 스스로 납득하고는 신세 많이 졌다고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한 달 일한 급여는 들어왔지만, 내 계획을 위한 물건들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새로운 알바를 구하려고 고등학생을 받는 다른 가게를 돌아다녀 봤지만, 그 가게 점장을 만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라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계획은 시도조차 못 하고 무산될 거라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내 방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아들, 택배가 왔는데?”
“응? 택배? 나한테? 누가 보냈어?”
“몰라. 발송인이 안 쓰여있는데?”
나는 엄마가 건네주는 수상한 상자를 받아들고 뜯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혹시... 김호석같은 애들이 복수하려고 마법 폭탄이라도 보낸 거 아니야!?’
그런 불안감이 생기자 서둘러 인터넷을 뒤져 함정류를 감지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았다.
제법 복잡한 마법진을 그릴 필요가 있었지만, 다행히 학교에서 배운 범위 내에서 그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불안에 떨며 난리를 친 후에야 겨우 함정 감지 마법을 사용해 내용물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결과는 들인 시간이 허무해지게 그 어떤 위험 요소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상자의 봉인을 뜯고 안을 살펴봤다.
안에는 완충재가 가득했는데, 그 사이를 뒤져보니 투명한 비닐에 낱개로 포장된 마나리움 배터리가 20개 정도 들어있었다.
심지어 모두 새것처럼 보였다.
나는 배터리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누가 이렇게 많은 비싼 배터리를 나에게 보냈는지는 아주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내 계획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말고 조이현이 유일했으니까.
그냥 어린 시절 친구를 도와주는 거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너무 과한 호의였다.
김호석에서 나를 구해줬던 일도 그렇고 이렇게 배터리를 보내 준 것도 그렇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던 나는, 직접 그녀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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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점심시간에 나는 조이현이 있는 4반으로 향했다.
그러나 교실에서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4반은 우리보다 먼저 먹어서 교실에 있을 줄 알았는데... 화장실이라도 갔나?’
그렇게 내가 기웃거리고 있으니까 교실에 있던 여자애들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더니 다가왔다.
이름표를 보니 ‘김수아’라고 적혀있었다.
김수아가 나에게 물었다.
“뭐야? 누구 찾아?”
“어? 어... 그 혹시 이현이 어디 있는지 알아?”
“이현이? 아까 오면서 보니까 등나무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네? 근데 이현이는 왜?”
“응? 아... 아니야. 알려줘서 고마워.”
그 여자애가 우리 둘 사이를 수상하게 생각하는 듯이 보여서 나는 그냥 얼버무리며 그 자리를 피했다.
괜히 나 때문에 이현이가 곤란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계단을 내려간 나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운동장 건너편에 있는 등나무 쪽을 바라봤다.
누군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지만, 너무 멀어서 그 사람이 조이현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직접 확인해 보기로 하고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앉아 있는 사람은 조이현이었다.
내가 갑자기 인기척을 내며 나타나자 조이현은 깜짝 놀란 눈으로 뒤돌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뛰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말했다.
“허억.. 헉.. 안녕. 이현아.”
“어... 가람아. 안녕. 무슨 일이야? 그렇게 숨까지 차서 뛰어오고...”
“그게... 헉...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
아무래도 조이현은 내가 뭘 물어볼지 이미 알고 있는 듯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해 호흡을 정리한 뒤 물었다.
“저기... 나한테 마나리움 배터리 보낸 사람... 이현이 너야?”
“..... 응.”
“역시 그랬구나...”
그러나 막상 조이현이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들 뭐라고 할지 다음 말을 생각해두지 않은 탓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 조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혹시 부담됐어?”
“응? 어... 으응. 솔직히 너무 비싼 물건을 받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구나. 그렇지만, 부담 안 가져도 돼. 나 KWA 시설에서 살잖아. 그거 거기서 폐기하려는 배터리를 받아온 거거든.”
“폐... 폐기? 거의 새거나 다름없었는데?”
“KWA에서는 그 정도 사용한 배터리는 폐기처분 하나 봐.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써주면 좋겠어.”
“.....”
조이현의 말에 나는 일단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알겠어. 그럼 고맙게 받도록 할게.”
“응.”
“그런데...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그러니까 그게....”
그러나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한 채 뜸을 들이며 ‘왜 이렇게 나에게 잘해주냐?’는 이 질문을 정말 해도 되는지 고민이 돼 망설이고 말았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조이현은 이상하다는 듯 눈만 깜박이며 내 말을 기다렸다.
결국 물어보지 않기로 한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고마워! 배터리 잘 쓸게!”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돌아왔다.
.
.
.
종례시간이 끝나고 청소 당번이었던 나는 내 구역인 학교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집에 가서 보조 마도구를 개조할 생각에 잔뜩 신나 있던 나는, 빨리 청소를 끝내려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해서 후문으로 가려는데 가정실습실 앞을 지나다가 문득 말소리가 들려 무심코 안을 들여다보게 됐다.
그 안에는 여학생 둘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조이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까 나에게 조이현이 있는 곳을 알려줬던 김수아라는 애였다.
‘이현이잖아? 이런 데서 뭐 하는 거지?’
조금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훔쳐 듣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 그냥 가던 길을 서두르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안쪽에서 내 이름이 들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왜 자꾸 유가람... 그 아이와 엮이시는 겁니까?”
김수아는 같은 반 친구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보기 힘든 말투로 조이현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반인과는 최소한의 교류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허가했습니다. 잊으셨습니까? 조이현 양.”
“내가 뭘 얼마나 교류를 했다고 그래요?”
“시치미떼지 마세요. KWA에서 폐기하려던 마나리움 배터리 20개... 이현 양이 빼돌려서 유가람에게 보내지 않았습니까? 정말 모를 줄 알았습니까?”
“흥... 어차피 버릴 거 필요한 사람한테 준 게 뭐 그렇게 나쁜 일이라고...”
조이현의 비꼬는 태도에 김수아는 기분이 상했는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하아... 지난번 폭력 사건도 유가람이 관련된 일이었잖습니까? 도대체 그 아이와 무슨 관계길래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겁니까? 설마... 좋아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몰래 듣고 있던 모태솔로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조이현은 나와 다르게 침착한 목소리로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제가요? 설마요.”
“아니 그럼 뭡니까? 왜 그렇게까지 그 아이한테 상관하는 거냐고요.”
“그냥... 그냥... 불쌍해서 그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불쌍하다고요? 그냥 동정심에 그랬다는 겁니까?”
“그렇잖아요. 요금 같은 시대에 마나 없이는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게 불쌍해서 조금 도와주는 것뿐이에요.”
조이현의 말에 김수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집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배터리 건은 그냥 넘어갈 테니까, 더 이상 유가람에게 관여하지 마세요. 자꾸 이러시면 계약에 따라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 알았어요.”
나는 두 사람이 안에서 나오려는 기척이 느껴지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후문으로 나가 학교 뒤편 그늘에 몸을 숨긴 채, 큰 충격에 빨리 뛰고 있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졌다.
분명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마음 깊은 한구석에서 조금은 그녀와 더 특별한 사이가 되는 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이겨냈던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그런데 꿈을 향한 나의 필사적인 노력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조이현에게는 한낱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위저드가 돼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소년은, 이제는 그저 불쌍한 노마일 뿐인 것이다.
결국 나는 자꾸 입 밖으로 자꾸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억누르며, 그늘 속에서 얼굴을 감싼 채 한심하게 울고 말았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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