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계시몽

우리는 어느 마을에 있는 소 방목장에 대량 발생한 D등급 몬스터인 랫맨(쥐 인간)을 퇴치하기 위해 와 있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렛맨의 물량에 우리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김수아 요원이 우리 그룹의 리더라는 점이었다.
그녀의 신기에 가까운 보조 마법이 없었으면 우리는 진즉 전멸했을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착실히 랫맨의 수를 줄여나가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변은 전투가 어느 정도 마무리 정리에 들어갈 무렵에 일어났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마법이 사용됐을 때와 비슷한 파동이 발생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현 요원! 느꼈습니까!? 방금 그건 설마...”
김수아 요원이 다른 요원에게 마력 강화 보조 마법을 걸어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창을 들고 달려드는 랫맨 다섯 마리를 멀티 마나 그랩으로 한꺼번에 붙잡은 뒤, 블레이즈 토네이도로 불태우며 대꾸했다.
“네! 저도 느꼈습니다! 대단한 마력의 폭발이었어요! 누군가 전술급 마법(한 전쟁의 방향을 결정할 정도의 규모)을 쓴 것이 분명해요!”
내 말에 김수아 요원은 반만 동의했다.
“전술급이라는 것은 동의하지만, 마법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겠군요! 그건 분명 마력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순수한 마나가 발생시킨 파동이었죠!”
“그렇지만 마나는 외부에 나오면 마력으로 변환되잖아요! 하물며 전술급 규모의 현상을 만들 만큼의 마나가 사용됐는데 형질을 유지하고 있을 리 없어요!”
김수아 요원은 나에게 마나 회복용 부스트 마법을 걸어주며 대꾸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일어날 리 없는 그 일이 일어났으니 우리는 자세히 알아봐야 합니다!”
“물론이죠! 그 전에 이 빌어먹을 쥐 떼부터 처리하고요!”
다시 한번 블레이즈 토네이도로 랫맨을 불태운 나는 다른 요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내가 남은 랫맨의 숨통을 끊고 난 후 숨을 돌리는 그때 다시 한번 이변이 일어났다.
멀리서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들려온 뒤, 얼마 안 있어 나락화로 인해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거기 요원 두 분! 나락화 측정기 좀 가져와 주세요!”
김수아 요원이 급하게 지시했다.
지시를 들은 차량에서 나락화 측정기를 들고 와 측정을 시작했다.
“공기 중 마나 오염과 측정 결과... 모든 것이 안정됐습니다! 재앙은 끝입니다!”
측정 결과를 들은 김수아 요원은 머리를 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정리되기까지 현장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이 나왔는지 김수아 요원은 기다리던 우리에게 지시했다.
“아무래도 방금 우리가 느꼈던 것과 재앙이 끝난 것에는 상관관계가 있을 겁니다. 따라서 사후 처리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현장을 찾아 조사를 해야 합니다. 이현 요원?”
김수아 요원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나는 정리를 위해 마나 그랩으로 들고 있던 랫맨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네?”
“이현 요원이 우리 중 마나 변화에 제일 민감하죠? 혹시 아까 그 전략급 현상이 어디 부근에서 일어났는지 알겠습니까?”
“네. 정확한 위치까지는 무리지만 대략적인 방향과 거리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김수아 요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요원들에게 말했다.
“그럼 여기 현장 정리가 마무리되는 대로 수색에 들어가겠습니다. 모두 서둘러 주세요.”
그리고 스크린 패드를 가져와 지도를 켜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가 현재 우리 위치입니다. 문제의 현장은 어디쯤일지 알려주세요.”
“그러니까... 방향이 여기 북동쪽이었습니다. 거리는....”
나는 기억을 되살려서 그 엄청났던 파동의 진원지를 예상해서 알려줬다.
현장 정리가 끝나자 내가 특정한 곳까지 이동하기 위해 차량에 탑승했다.
이동을 시작한 지 20분 정도 지나 도착한 곳에서 문제의 장소가 꽤 깊은 산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또 한참 동안 산을 넘어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산속에 들어오고 두 시간가량이 지나 완전히 아침이 밝아왔을 무렵 도달한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이미 흙으로 변해버린 거대한 동물의 사체 위로 꽃과 나무가 만발해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고 있는 반면, 그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는 마나 폐기물이 산처럼 쌓여있어서 모순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거대 동물의 사체에 손을 올리고 혹시라도 남아있는 마법의 흔적을 찾아봤지만,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그런 대규모의 마법 현상에 노출됐는데 이렇게 아무 흔적이 없을 수가 있다니... 김수아 요원 말대로 정말 마법이 아니었단 말이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나는 쌓여있는 폐기물 쪽으로 이동했다.
이미 다른 요원들이 장비로 마나 오염도를 측정하며 조사하고 있었다.
김수아 요원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폐기물 조각 하나를 들어 보이며 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우리가 그렇게 찾던 재앙의 진원지였나 보군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믿기지 않지만요.”
한가득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 위에 올라와 있음에도 마치 성지에 있는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드는 이질적인 상황에 어색해하며 나는 말했다.
“이렇게 대량의 마나 폐기물을 못 찾고 있었다니... 상부에 뭐라 보고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네요.”
“고도의 대 마법용 은폐 마법식이었잖아요. 이런 건 우리 능력으로는 못 찾는 게 당연해요.”
나는 수색 중에 발견한 마법식 장치를 떠올리며 말했다.
누군가 바꿔 쓴 흔적이 있었지만, 그전의 마법식만 봐도 지금 파견된 인원의 능력으로는 찾을 수 있을 레벨의 것이 아니었다.
내 말에 김수아 요원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이현 견습 요원. 잘 들으세요. 위저드에게 있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못했습니다.’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활동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만큼, 반드시 해내야 하다는 마음을 늘 가지도록 하세요. 아시겠습니까?”
“..... 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내 담당 사수다운 옳은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 측정이 끝났는지 한 요원이 다가왔다.
“측정 결과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김수아 요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죠? 뭔가 잘못됐나요?”
“아뇨. 잘못 되지는 않았는데... 이상합니다.”
“이상해요? 뭐가 말이죠?”
“마나 오염도가... 마이너스 15%입니다.”
오염도 마이너스 15%라니...
내가 이곳을 성지 같다고 느낀 것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현재 대도시마다 설치된 현존하는 최고 성능의 마나 정화장치를 최대로 돌려도 오염도를 5%까지 낮추는 것이 한계다.
그것도 외무 마나 유입이 차단된 밀폐된 공간에서 작동해야 나오는 수치였다.
한편, 이 지구상에는 마나가 유난히 순수한 상태로 유지되는 아주 희소한 장소가 있는데 그런 곳을 고대로부터 성지라 부르며 여러 종교의 발상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성지에서 마나 오염도를 측정하면 마이너스로 내려가는 기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 이 폐기물이 가득 쌓여있는 계곡에서 그런 현상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고를 토대로 김수아 요원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사용한 전술급... 기술? 술법? 아무튼 그것은 정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군요. 그것도 오염된 폐기물 터를 성지로 만들 정도로 말이죠.”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괴로운 듯 말했다.
“하아... 미치겠군요. 도대체 저는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하는 걸까요~ 재앙을 정화해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미지의 인물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요!”
그 미지의 인물이 정확히 누구인지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며칠 전, 어느 마을에 나타났다는 신원 미상의 메이지가 이 일을 일으킨 사람과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현장을 떠나야 했다.
이후 잔존 해 있는 몬스터를 모두 토벌하고 최종적으로 임무 종료를 통보받은 우리는 KWA 본부로 귀환하는 전송진에 올랐다.
(물론 돌아가기 전에 남는 멀미약 하나를 도착하자마자 토했던 요원에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귀환 후 본부에 보고한 내용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는데 특히 강력한 메이지의 존재는 KWA 상층부를 절반으로 갈라버렸다.
그 메이지를 찾아 즉시 위저드로 영입해야 한다는 의견과 잠재적인 위험성이 높으니 불법 행위에 책임을 물어 구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말단 견습 위저드에 불과한 나와는 별 상관 일이라 신원 미상의 강력한 메이지에 대한 관심은 이내 내 머릿속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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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다.
솔이는 오자마자 졸리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나 궁금해서 집안을 둘러봤다.
부엌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엄마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엌으로 발을 옮겨 한창 국을 끓이고 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다녀 왔어. 할머니랑 나래 누나는?”
엄마는 콩나물국 간을 보며 대답했다.
“할머니는 복숭아밭에 가셨어. 나래가 이제 안전하다고 해서. 그리고 나래는 마을 주변에 남은 몬스터가 있나 찾아보러 나갔고.”
“그렇구나.”
용건을 마친 나는 부엌을 나가려고 뒤를 돌았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밥은?”
“괜찮아. 조금 피곤해서 잘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깨워줘.”
“잔다고? 웬일이야? 선인인가 뭔가가 됐다고 한 후로 잠자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힘 좀 썼거든.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에 피곤하네. 하하...”
나는 멋쩍게 웃었지만, 엄마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엄마는 그 표정으로 잠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 엄마 왜 그래?”
뭔가 불안해져서 내가 묻자 엄마는 한숨을 쉬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하아... 아들.”
“응?”
“괜찮은 거 맞지?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걱정...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내가 오늘까지 해온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내 목숨을 걸아야 했던... 엄마가 걱정할 만한 일 들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하하.. 당연하지.”
그대로 돌아 부엌을 나오는 내 뒤에서 여러 감정이 담긴 엄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해야 했다.
신내림의 여파로 인해 선인이 된 후로 처음 느껴본 제대로 된 피로감에 나는 오랜만에 깊이 잠을 청하고 싶었다.
작은 숲이 펼쳐져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간 나는, 소나무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솔이의 얼굴을 잠시 살펴본 후, 그대로 바닥에 깔려있는 푹신한 풀밭 위에 몸을 눕혔다.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는 풀들이 내 몸을 감싸자 느껴지는 포근한 온기에 나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분명...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곳에 와 있었다.
잠자는 사이 무의식중에 자연계로 온 것인가 싶었는데, 그렇다기엔 자연계의 풍경이 아니었다.
어느 깊은 죽림 같았는데 안개가 자욱해서 주위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걸어갈 수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마치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인도하듯 대나무 사이에 놓은 오솔길 위로만 안개가 걷혀있었다.
‘꿈인가?’
너무나 몽환적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기에는 피부에 닿는 시원한 안개와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거친 흙의 감촉이 너무나 생생했다.
‘설마... 전이 현상? 아니면 내 신경까지 현혹할 정도로 강력한 환영 마법?’
꿈 다음으로는 어떤 마법 현상에 휘말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이렇게 가만히 서 있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거라 결론을 내린 나는, 내 앞에 놓인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오솔길의 끝에는 안개와 대나무에 둘러싸인 연못 하나가 보였다.
그 연못에는 커다란 연꽃이 가득 피어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연꽃 위에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자세히 보니 새하얀 한복을 입은 어떤 남자였다.
그는 나를 등진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그 남자를 계속 바라봤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바람에 흔들려 부딪히는 대나무 소리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그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가까이 와~”
할머니가 사용하는 익숙한 사투리 말투가 들리자 내 긴장감이 살짝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누구십니까?”
남자는 여전히 나를 등진 채 내 물음에 대꾸했다.
“내가 누군지는 별로 안 중요 혀. 중요한 건 네가 누구냐는 거제.”
“.....?”
“뭐 자세한 건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 허자고. 얼른 와~”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나는 남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몸을 띄워 연못을 가로질러 날아가 남자가 앉아있는 거대 연꽃 위에 올라탔다.
그 순간, 내 무게 때문에 연꽃이 가라앉으며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앉아있던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요령이 필요 할거여. 연꽃에 타는 거 말이여.”
“그래 보이네요. 완전히 앉는 게 아니라 몸을 계속 띄운 채 앉는 척만 하는 거였군요.”
내 말에 남자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응? 아닌디? 진짜로 앉는 건디?”
“네? 그래요? 어떻게요?”
“글씨다... 네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면 금방 할 수 있을 거구먼.”
“내가... 누구인지?”
남자는 계속 영문도 알 수 없는 말을 이어갔다.
“너는 누구여? 어디서 온 거여?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
나는 질문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러면서 자세히 보게 된 그의 얼굴이 말투에 비해 굉장히 젊어 보인다는 것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 어디선가 만났었던 것 같은 익숙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상한 기분에 밀려 나는 남자에게 다시 물어보게 됐다.
“그래서... 도대체 누구십니까? 저를 아시나요?”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와하하하하하!”
그러더니 갑자기 나에게 불쑥 다가와 내 양어깨를 잡으며 크게 소리쳤다.
“아니여! 그게 아니여! 그러니까 그 질문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해야 한다니께!? 너는! 누구여!”
“......!!”
나를 붙잡은 그의 두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그의 손을 통해 뭔가 그의 간절하기까지 한 뜨거운 마음이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마음이 뭔지 아직 나는 이해하지 못하긴 했지만, 왠지 대답해야 할 것 같았던 나는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저는... 유가람... 정기술사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남자는 만족한 듯 씩 웃더니 나를 놔주고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럼 이제 알겄제. 어뜨케 하면 연꽃 위에 앉을 수 있을지 말이여.”
“.... 아뇨, 잘 모르겠지만, 해보겠습니다.”
내 대답과 물 위에 뜬 연꽃에 안정적으로 앉는 것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나는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정기술사... 정기술사는 합일을 이룬 사람. 하늘, 땅, 자연... 모든 존재와 합일을 이루는 것... 그것이 정기술. 그렇다면...’
나는 눈을 뜨고는 조용히 읊조리듯 혼잣말을 했다.
“내가... 연꽃이 된다.”
그리고는 온 정신을 연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연꽃의 꽃잎 하나하나가 마치 내 몸처럼 느껴질 만큼 집중을 한 뒤, 조심스럽게 연꽃 위에 앉았다.
그러자 연못에 파동 하나 만들지 않고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앉을 수 있었다.
그걸 본 남자는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조용히 말했다.
“그려... 그거면 된 거여. 잘 혔다.”
“하하...”
남자의 칭찬에 어쩐지 쑥스러워진 나는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때 남자가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조롱박을 반으로 잘라 만든 작은 바가지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마셔.”
“이게... 뭔가요?”
“마셔보면 알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남자를 보니 뭔가 수상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액체를 마셨다.
그러자 그것이 첫입은 달콤한 듯하다가 곧바로 쫓아오는 씁쓸함에 인상을 저절로 찌푸리게 되는 바로 그 액체... 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푸웁!! 콜록! 콜록!!”
나는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지도 못하고 뱉고 말았다.
그 모습에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와하하하하하!!”
“콜록!... 뭘 마시게 하는 겁니까? 이래 봬도 저 아직 미성년자라고요.”
“미성년자? 네가 몇 살인데 으른이 아니라는 거여?”
“19살이요.”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하! 세상이 요상하게도 변했구먼. 옛날 같았으면 벌써 장가가서 애 셋은 나을 나인디.”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요즘 세상엔 요즘 법이 있는 거라고요.”
“하하하~ 그런 거냐? 그거 아쉽게 됐구먼.”
남자는 정말 아쉽다는 표정을 하며 나에게 이어 말했다.
“싫었다면 미안허다. 죽은 아들내미하고 이렇게 술 한잔해보는 게 소원이었어서...”
“어.... 그렇군요.”
아버지 없이 자란 나에게 있어서 그 말은 내 마음을 무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는 남자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마실게요. 대신에 딱 한 잔만이에요!”
“히히히! 그려, 알았다. 자 여기~”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술이 든 바가지를 건넸다.
나는 뭔가 당했다는 기분을 느끼며 그 잔을 받았다.
남자는 자기 손에 들린 바가지를 내 바가지에 살짝 부딪히더니 시원하게 들이켰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최대한 맛을 느끼지 않도록 한 번에 들이부었다.
그러자 목구멍에 불이 통과하는 듯한 강력한 느낌이 지나갔다.
“콜록! 콜록!! 크으으으.... 도대체 이게 뭔 맛이야.”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가지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하하하! 아직 이 맛을 모르는 것을 보니께 애는 애구먼!”
“어휴...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은 맛인걸요.”
내 말에 남자는 웃음기가 조금 가라앉은 진지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이 맛을 알아야 인생의 무게를 알 수 있는 것이여.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억지로 힘겹게 들이키다가 결국 취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 이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란 말이여.”
“아...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남자는 다시 웃더니 나에게서 눈길을 떼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기억혀라. 무아불망아(無我不忘我)... 그럼 네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여. 말이 길어졌네. 이제 가봐라.”
나는 연꽃에서 일어나 연못을 가로질러 오솔길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려 하자 남자가 나를 등진 채 나에게 말했다.
“우리 나래... 잘 부탁혀.”
“......”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길을 따라 되돌아 왔다.
그리고 눈을 떠졌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한 시간 정도 지났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솔이의 모습을 내려다 봤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머리를 짚으며 생각했다.
‘정말 꿈이었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내 입에서 남아있는 알싸한 술의 잔향이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 아니 그분이 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무아... 불망아. 나를 잊되 나를 잊어버리지 말라는 건가?’
대단히 모순되는 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모든 의미가 피부에 다가오듯 이해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엎드려 절을 올리며 말했다.
“예...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유덕형 할아버지.”
그렇게 할아버지께 절을 하고 있는데 마침 잠에서 깨어난 솔이가 나를 보다니 물었다.
“뭐해? 가람?”
“.... 절하고 있지.”
“?.... 누구한테?”
“유덕형 할아버지께...”
“.....”
솔이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방문을 열고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가람이 이상해! 어디 아픈가 봐!”
그 말에 엄마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 왜!? 어디가 이상해!?”
“몰라! 갑자기 뭐가 보이나 봐! 어떤 할아버지한테 절하고 있어!”
이번에는 할머니가 그 말에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 할애비 기일도 아닌데 갑자기 웬 절이래?”
솔이의 호들갑에 한바탕 난리가 난 바깥을 보며 나는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 왔다.
- 작가의말
날씨가 점점 더워지네요. 모두 건강 조심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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