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물든 선택 (3)

유페미아가 받은 의뢰는 걱정했던 것보다 어렵거나 위험하지 않았다.
그냥 가끔가다가 물건을 누군가에게 배달하거나 마도구를 옮기는 일이 다였다.
비싼 아공간 주머니를 배달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어때 할만 하지?"
대머리 남자가 씩 웃었다.
"... 네."
"거봐 우리도 양심이 있지 말도 안 되는 일은 시키지 않는다구."
대머리 남자가 돈주머니와 아공간 주머니를 건넸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하지."
대머리 남자가 유페미아의 어깨를 솥뚜껑 같은 손으로 툭툭 치고 골목길로 사라졌다.
유페미아가 돈주머니를 열어 봤다.
'딱 아빠 약 값이네.'
대머리 남자의 일 만으로는 아카데미를 생활할 때 필요한 돈을 모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페미아는 모험가 길드 의뢰를 받아 하나씩 완수하며 적지만 돈을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거리를 찾기 위해 길드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모험가 길드 의뢰로 돈을 버는 것에만 몰두했기 때문인지, 도시에서 입학시험 전야제 축제가 열리고 있는 기간인 줄도 몰랐다.
“맞아 축제가 열리는 게 당연한 건데.”
유페미아는 길을 걸으며 가족 단위로 모여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빠가 건강했다면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한가로이 축제를 즐겼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축제를 즐기려 가득 찬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치이다 길을 잃고 두리번거리며 걷던 유페미아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덩치 큰 사람과 부딪혔다.
“어! 조심!”
쿵.
“아앗!”
“아야!”
덩치 큰 사람과 부딪힌 유페미아는 뒤로 밀려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유페미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제야 덩치 큰 사내가 울상을 하며 유페미아를 보고 말했다.
“아니요. 제가 앞을 제대로 못 봐서 죄송합니다.”
서로 사과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세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유페미아는 부딪힌 남자에게 사과했다.
뒤늦게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귀족님이 시종과 호위 기사를 거느리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혹시라도 처벌이나 배상을 요구할까 봐 두려웠다..
“아 아니에요. 저도 못 봤는걸요.”
바닥에 나뒹구는 고기구이와 울상을 한 덩치 큰 사내를 보자니 미안함에 어쩔 줄 몰랐다.
그때 화려한 금발의 귀족 소년이 온화한 미소로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저희 일행이 실수했습니다. 혹시 다친 곳이 있나요?”
마치 태양처럼 환히 빛나는 사람이었다.
“아. 아니요.”
정신 차린 유페미아가 머리를 붕붕 저었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딴 곳을 보다가 그만. 저 때문에 고기구이가···.”
유페미아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내려 땅에 떨어진 고기구이를 보았다.
“고기구이는 괜찮습니다. 다시 사면 되니까요. 그러니 리오 너도 사과드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들떠서···.”
유페미아는 속으로 놀랐다.
물론 모든 귀족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만하고 지나치게 귀족 다운 것에 집착하며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다고 알았기 때문에 그런 귀족의 사과는 충격이었다.
"아니에요. 정말 저도 죄송합니다. 근데 혹시 모험가 길드 위치 아시나요? 제가 일행과 떨어져서···.”
대신 말을 돌릴 겸 유페미아가 모험가 길드 위치를 물었다.
“아. 거기라면 여기 큰길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깃발이 걸려있는 곳입니다.”
친절하게도 금발의 귀족 소년은 모험가 길드 방향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날 유페미아는 자신과 다르게 저렇게 멋지고 친절한 귀족들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험가 길드에 가자, 축제 덕분인지 사람으로 북적북적했다.
“오! 유페미아 왔구만.”
“유페미아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길드 의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모험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함께 임무를 하며 친해진 모험가들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유페미아! 오! 사랑스런 하플링이여.”
축제에서 길거리 공연을 본 것인지 장난기 많은 모험가가 우스꽝스러운 연기 톤으로 말했다.
“장난 그만하세요.”
“풋!”
“미안 미안. 오늘도 일거리 찾으러 온 건가?”
모험가를 살짝 노려본 유페미아가 한숨 쉬었다.
“··· 네.”
“그럼, 이번에 같이 하수도 랫맨 사냥이나 할래?”
“우리도 혹시나 해서 후방에서 지원해 줄 만한 사람을 찾고 있는 거거든.”
“유페미아가 팀원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맞아 얼마 전에 하수도가 이상하다는 소문도 돌았고 말이야.”
“음···. 먼저 게시판에 붙어있는 의뢰부터 확인해 볼게요.”
“그래. 한 번 살펴보고 오라고.”
“네. 감사합니다.”
등급이 낮은 의뢰서들 대부분은 단기적으로 축제 동안 일손을 도와줄 도우미나, 재료 채집, 잡다한 심부름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상시 임무로 나와 있는 랫맨 사냥이 축제 기간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도록 평소보다 추가금을 준다고 쓰여 있었다.
‘확실히, 채집보다도 랫맨 사냥이 돈을 더 주네.’
원래 축제로 복잡해진 도심에서 일하는 것 말고 비교적 안전한 채집 의뢰나 하려고 했는데 의뢰서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카데미에 다니려면 돈이 더 필요해.’
그렇게 축제 동안 유페미아는 모험가 길드에서 랫맨 사냥과 일거리를 받아 돈을 벌었다.
며칠이 지나고 입학시험 날이 되었다.
“유페미아 시험 잘 보렴.”
“누나! 힘내!”
“고마워요. 엄마. 콜린.”
인사를 나누고 방 한편에 누워있는 아빠를 보았다.
"다녀올게요."
1차 시험은 순조로웠다.
빠르게 문제를 풀고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했지만 시험장엔 자신보다 빨리 푼 사람은 없었다.
'나 혼자 다 푼 건가?'
"거기 하플링 학생. 다 풀었으면 답안지 제출하고 퇴실해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시험지와 답안지를 제출하고 홀로 대기실에 있을 생각을 하니 왠지 우쭐해졌다.
그러나 1차 시험을 빨리 마치고 간 대기실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축제 때 보았던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귀족 소년이어서 더욱 깜짝 놀랐다.
'어? 저 귀족 소년은 그때?'
귀족 소년이 자신을 기억하는지 미소 지어 주었다.
그의 미소에서는 왠지 모르지만, 안도감을 주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2차 실기 시험 중 시험의 미궁에서 상냥한 귀족과 같은 조가 되어 시험을 보게 되었다.
'어? 귀족 소년과 같은 조네?'
왠지 모르지만 2차 시험을 잘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당당하게 마도 총을 다룰 수 있다고 말한 것치고는 시험을 보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도 총을 제대로 쓸 일이 없네....'
시험을 보는 동안 별로 활약을 못 해 점점 위축되어 있었는데 에드리안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었다.
유페미아는 에드리안과 아르쟌이 찾아낸 환풍구 같은 구멍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뭐야 설마 이 구멍으로 나가라는 건가?”
모두가 구멍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
“우리 중의 한 명 가능한 사람이 있잖아.”
에드리안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유페미아에게 꽂혔다.
“에. 에엑?! 저, 저인가요?”
“응. 유페미아가 저기로 가줬으면 해.”
“어 어어.”
“설마 싫은 건가?”
“아, 아 아니요!”
유페미아가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그럼 부탁할게. 저 통로로 가면 반대쪽에서 아마 문을 열어 줄 수 있을 거야."
“다녀오겠습니다. 근데··· 저 좀 올려주세요···.”
“오! 내가 올려드리지.”
아르쟌이 유페미아를 번쩍 들어 통로에 놔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기다리겠소.”
“유페미아만 믿을게요.”
“부탁하지.”
“···.”
팀원들의 인사를 받고 유페미아가 좁을 통로를 기어갔다.
환풍구처럼 생긴 통로는 구불구불한 작은 미로였다.
'빨리 찾아야 해.'
중간중간 갈림길이 있어 잘못 고르면 되돌아오게 되는 함정이 있었다.
아주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지체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길이 아니야?'
하지만 유페미아는 재빠르게 기어가며 가던 길이 막히더라도 신속히 되돌아가 길을 찾아냈다.
'괜찮아. 침착하게 가자.'
통로를 나왔을 때 온몸이 검댕과 먼지 그리고 오래된 거미줄이 붙어 꼴이 엉망이었지만 대충 털어내고 팀원들이 갇힌 문을 열어낼 수 있었다.
“여···. 열었다.”
이때부터 2차 시험 동안 좀 더 당당하게 나설 수 있었다.
에드리안 덕분에 자신감을 얻은 유페미아는 이제 에드리안 팀장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자기 확신을 가지고 팀원을 지휘하여 시험의 미궁 문제를 풀어내고, 마지막 시험에는 용기를 가지고 환상적인 피닉스를 소환해 고대 거대 골렘까지 무너뜨리는 에드리안이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유페미아의 눈에 에드리안은 정말 모든 것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로 보였다.
‘세계가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면 저런 사람이겠지?’
유페미아의 안에서 에드리안은 격차가 너무 커서 질투심이 생길 여지도 없이 경외심이 먼저 떠올랐다.
2차 시험이 끝나고 유페미아는 에드리안에게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기다렸다.
“저, 저기···. 도움이 별로 못 되어서 죄송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지금보다 도움이 될게요.”
두 주먹을 꼭 쥔 유페미아가 다짐하듯 말하곤 치료소를 나갔다.
유페미아는 시험을 보며 빚진 것을 갚기 위해 아카데미를 다니며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입학식이 끝나고 홀로 남았을 때 아카데미 안에서 누군가 찾아왔다.
“유페미아양 아카데미 입학을 축하합니다.”
검은 복면인을 보고 유페미아는 왠지 모를 섬뜩함에 뒷걸음질 쳤다.
“이런···.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단지 유페미아양의 의뢰인에게서 온 의뢰를 전달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의뢰인이라니요?”
유페미아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반응하자 복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벌써 잊으신 겁니까? 돈을 먼저 받았으니 이제 일을 해야 할 시간이지요.”
“···. 네?”
그제야 떠올랐다.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돈을 받고 계약했던 것을.
"저기 그 일은 다 끝난 거 아닌가요?"
"유페미아 양. 겨우 짐 조금 옮겼다고 선금을 그 정도로 줬을 거라 생각했나요?"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아카데미 안에서 이런 식으로 찾아온 건지 무서워졌다.
“허허허. 유페미아양. 너무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의뢰인이 전달한 물건을 아카데미 곳곳에 놓는 것이 다입니다. 어때요. 참 쉽죠?”
복면인이 음침하게 웃으며 작은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주머니를 받은 유페미아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잊지 마세요, 유페미아양. 마법 계약으로 묶여 있는 당신에게 거부권은 없다는 걸.”
“···.”
“자세한 위치나 설명은 의뢰서에 쓰여 주머니 안에 있습니다.”
“···.”
복면인의 말에 유페미아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돌돌 말린 의뢰서를 꺼냈다.
“의뢰서를 펼치면 빠르게 숙지하세요. 펼친 후 잠시 후에는 불타 사라지도록 마법 처리가 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고요.”
“···.”
유페미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의뢰서를 쥐었다.
“그럼, 다음 지령이 있을 때 찾아오겠습니다.”
“···.”
스르륵.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춘 복면인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날부터 유페미아는 온전히 아카데미 생활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솔스티스 하우스에서 열린 환영회에서도.
첫 수업을 들으면서도 나날이 두려워졌다.
"유페미아 괜찮아?"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기숙사 친구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며 유페미아는 애써 미소 지었다.
하루하루 계약에 묶여 아카데미 강의실과 외진 곳곳에 수상한 장치를 직접 설치할 때마다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마력 계약서에 서명한 유페미아는 의뢰를 거부하려 해도 심장에 얽힌 마나의 사슬 때문에 강제될 수밖에 없었다.
거부하려 하면 할수록 마력이 뒤틀리고 그다음은 온몸에 타들어 가는 고통을 주었다.
그제야 유페미아는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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