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의문(1)

바젠의 배려로 주점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된 아벨.
하지만 아벨은 주점의 분위기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으하하하! 마셔라! 마셔! 이보게 주인장! 여기 술이 떨어지고 있다네!”
“네네~ 갑니다~ 여기 통째로 드릴 테니까. 천천히 드슈.”
“으하하하! 고맙네 주인장! 이보게 아벨! 자네도 여기 와서 내 술이나 한잔 받게나!”
아벨은 새로 가져온 오크통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버린 것을 보며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는 술을 쳐다보기만 해도 속에서 무언가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더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아벨이 술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는 것을 느낀 바젠이 거대한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우더니 소리쳤다.
“으하하하! 이 친구 이거!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약골이었구만! 암! 아암! 우리는 술도 못 마시는 삐약이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는 불한당이 아니지! 얼른 가서 쉬시게! 우리는 조금 더 즐길 테니! 하하하하!”
다시 자리로 돌아간 바젠은 또다시 주인장에게 술을 달라 소리쳤다.
아벨은 그들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나 방금 위에서 자고 내려온 거야··· 이 주정뱅이들아···’
온몸이 오싹해지는 느낌.
아벨은 새로운 술통을 가지고 와 술을 퍼마시는 바젠 용병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주점을 빠져나왔다.
해가 능선을 넘어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각.
아벨은 울렁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은 다 저런 건가···? 어제 하루 종일 마셨는데··· 잠도 안 자고 또 마시는 거야?”
피의 복수 용병단도 틈만 나면 술을 마셔댔으니, 어쩌면 용병의 피는 술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포도주는 사실상 용병의···?”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걷던 아벨은 본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반년 전 졸업했던 제국 아카데미와는 또 다른 느낌의 브륜드 아카데미.
‘겉모습은 다른데··· 알맹이는 거의 비슷하네.’
브륜드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대륙의 모든 아카데미에는 제국 아카데미에 펼쳐진 결계와 같은 결계가 처져있었다.
6년 전 마족 침공 사건 이후, 엘포드 교수와 유베리우스 흑색 마탑주는 그들이 만든 결계의 술식을 다른 왕국과 아카데미에 배포했다.
독자적으로 결계를 펼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직접 가서 결계를 펼치기도 했다.
‘그 말은··· 결국 내가 브륜드 아카데미의 담을 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륜드 왕국의 문을 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부턴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카데미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아벨에게 다가왔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언제든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눈빛.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에 숨어든 기척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경비병의 교육이 잘 되어있네?’
이미 6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경비에 소홀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브륜드 왕국 내에서 일어난 사건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국 아카데미와 아카데미 서열 1, 2위를 엎치락뒤치락하는 관계였기에 그들의 대처는 상당했다.
아벨은 자신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경비병에게 통행 허가서를 건넸다.
하크왈드 상회의 상호가 적힌 통행 허가서가 위조가 아니라는 것까지 밝혀지자 경비병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하크왈드 상회의 사람이었군요. 처음 보는 얼굴이라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인데요. 그럼, 저는 아카데미로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얼굴은 기억해뒀으니, 언제든 방문하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어느새 숨어든 기척들 또한 사라져 있었다.
경비병들의 신속한 움직임에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프리아 제국보다 익스퍼트 급 기사들이 많다고 하더니··· 경비병의 수준도 상당하구나.’
눈앞의 경비병 또한 아벨이 검으로만 상대한다면 호각을 이룰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카데미의 문을 넘은 아벨은 하크왈드가 준 지도를 살폈다.
하크왈드의 정보원이 갈 수 있는 곳은 전부 그려져 있는 지도.
숨겨진 장소나 아카데미의 교수들만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레이의 주요 동선까지 체크되어 있었기에 아벨이 레이를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레이···’
아벨은 레이를 본 순간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얼굴이 아닌 뒷모습만 본 것이지만, 그가 레이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벨은 레이의 뒤를 천천히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기척을 완전히 숨겼기 때문에 기가 약하거나 눈치가 없는 사람들은 바로 옆을 지나가도 아벨이 지나갔다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레이는 사람들을 피해 가며 한참을 걸어갔고, 그가 어느 장소에 도착하자 아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쓰레기장···?’
아카데미 내의 시설이었지만, 주요 건물들과는 한참 떨어진 장소에 위치한 쓰레기장.
‘아카데미 내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 정도였나?’
물론 레이가 학생임에도 다른 학생의 괴롭힘으로 쓰레기장을 자주 간다는 내용은 하크왈드의 정보원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말로 들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쓰레기를 버리고 있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계속 숨어서 쳐다보고만 있지 말고 나오시죠?”
‘내가 있는 걸··· 알고 있다고?’
누군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 듯한 목소리에 아벨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5써클 마법사이며, 보유한 마나는 어지간한 마탑의 마탑주들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였다.
그런 아벨이 작정하고 기를 숨긴다면 최소한 7써클을 앞둔 마법사이거나 최상급 익스퍼트가 아니라면 아벨을 눈치채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물며 레이는 5써클인 아벨과는 다르게 3써클을 겨우 만들어낸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벨이 눈치채지 못한 장소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나름 숨는다고 숨었는데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단 말이냐?”
온몸을 검은색으로 두른 백안의 사내가 아벨의 반대편 나무 위에서 사뿐히 내려왔다.
사람이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조용한 동작.
이 세상과는 다른 곳에서 걷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대체··· 누구지?’
레이가 자신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긍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남자의 신원을 모르는 이상 그가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벨은 여차하면 자리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항상 그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부른 것입니다. 그렇게 기척을 숨겨버리시면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실없는 농담을 한 번 해본 것이다. 그나저나 네놈이 나를 먼저 찾다니? 별일이 다 있구나.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냐?”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오늘 안톤 님께서 오신다는 건 모르고 있었습니다. 알 방도가 없지요. 다만, 누구든 상관없으니 만나야만 했습니다.”
“아카데미에 변화라도 있는 것이냐?”
레이가 품속에서 검게 변해버린 양피지를 안톤에게 건넸다.
양피지를 조심스레 살핀 안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이건··· 교단 놈들의 것인데? 색이 이렇게 변했다는 건··· 놈들이 아카데미에 침입했다는 말인가?”
안톤은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듯 살기를 뿜어댔다.
안톤은 개인적으로 암흑교단에 대한 감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 또한 암흑가의 사람이며, 돈만 있다면 누구든 처리하는 암살자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먼저 침을 발라둔 장소에 발을 얹는다면 개인적으로든 조직적으로든 나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네놈이 교단 놈들과 거래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는 아무리 네놈이라도 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안톤의 살기는 암흑교단의 양피지를 들고 있던 레이에게 향했다.
“쿠흡! 큽! 커헉!”
안톤의 살기를 버티지 못한 레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토했고, 레이의 안색이 새파래지자 그제서야 안톤이 살기를 거뒀다.
“커헉! 컥··· 하아··· 하아··· 말은··· 끝까지··· 들었어야죠···”
안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싶지만, 마지막으로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 그동안 우리 조직에 준 도움에 대한 보답이다.”
피가 묻은 입가를 닦아낸 레이가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런 식으로···! 하아··· 아무튼 이건 교단에서 한 짓이 아닙니다.”
“교단의 짓이 아니다? 지금 네놈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건가?”
“어느 누가 안톤 님을 앞에 두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교단에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
레이의 말을 들은 아벨은 경악하다 못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안톤? 저자가 그림자 안톤이라고?’
마족 전쟁 당시 인류의 수많은 익스퍼트와 소드마스터의 목숨을 앗아 간 인물.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듯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목표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하여 붙은 이름.
‘그런 놈이 대체 왜 레이랑···?’
하지만 안톤과 레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저건 또 왜···?’
검게 변한 양피지.
거리가 멀어 정확히 어떤 장치가 담긴 양피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면 마기를 흡수하는 양피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암흑교단에서 주로 마기를 저장할 때, 사용하는 양피지가 마기를 흡수하면 딱 저런 모습이었으니까.
거기에 충격적인 정보.
‘암흑교단이 움직인 것이 아니란 말이야?’
안톤의 살기를 버텨가며 해명하는 레이의 말에 아벨의 혼란스러움은 사라지질 않았다.
일단 아벨이 아는 안톤은 암흑교단 소속의 암살자였다.
돈이면 뭐든 다 해버리는 암흑가의 암살자 집단과는 다르게 안톤을 포함한 몇몇의 암살자들이 암흑교단의 지시를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전혀 다른 집단. 적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공생하는 건 더더욱 아닌 관계···’
안톤이 암흑교단의 양피지를 들고 있던 레이에게 보낸 살기는 진심이 아니라면 뿜어내기 힘든 수준으로 강력했다.
아마 전생의 안톤이었다면 레이는 진즉에 거품 물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의문점.
‘암흑교단의 짓이 아니라면 저 마기는 대체 어디에서···’
아벨이 들었던 정보에는 레이가 아카데미 외부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며, 극단 사건이 터지기 한참 전부터 레이가 외부로 나갔다는 기록은 없었다.
‘아카데미 내부에 마기가···? 어떻게? 대체 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복잡한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국 아카데미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마족을 소환하기 위해 암흑교단 놈들이 수를 썼다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레이의 말대로 현재의 안톤이 암흑교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레이가 안톤에게 거짓을 말했을 리는 없었다.
한 시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암살자가 상대가 하는 거짓에 당할 리가 없었을 테니까.
아벨은 복잡해지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지금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어··· 생각보다 정보가 부족해.’
하루 종일 레이를 따라다니며 녀석이 가는 곳을 샅샅이 뒤지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레이가 양피지에 마기를 담았던 장소로 또다시 갈지는 미지수였기에 그 방법은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휴가가 길어지겠네.’
본능적으로 브륜드 왕국에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체류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레이와 안톤이 떠난 자리에서 아벨도 스르륵 사라졌다.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