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소환

바젠은 우울한 표정으로 커다란 맥주 통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곤 아벨을 구원자를 보듯 눈동자를 빛내며 바라봤다.
“고맙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네.”
“어이쿠! 이 사람이? 많이 취했네 그려. 이봐 트리픈! 바젠 좀 데리고 가게나!”
“으어어어··· 고마아아압네! 아베에엘! 우우웁!”
“으아아악! 이 미친 단장이? 내 가게에서 토하지 마!”
트리픈이 헐레벌떡 뛰어와 바젠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바젠도 술에 취할 수 있는 사람이었군요?”
아벨은 바젠이 술에 취하는 모습은 평생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하하! 단장도 인간이지. 강한 힘을 사용한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 암살단 놈들을 단숨에 쓸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사용한 부작용이 고작 술에 취하는 거라면··· 그걸 부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까?”
아벨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점주는 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단장은 의뢰를 끝내고 술을 마시는 낙으로 사는 사람이야. 술을 많이 마시지 못 한다는 점에서 그 낙의 반을 잃은 셈이나 마찬가지지!”
그게 무슨 부작용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더 말했다간 입만 아플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그럼, 바젠은 언제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겁니까? 아무래도 또 다른 부작용이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글쎄··· 보통은 일주일 안으로 컨디션을 되찾았네. 뭐 이번에는 그리 큰 힘을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금방 돌아오겠지.”
“그렇군요.”
아벨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젠 용병단은 어찌 보면 아벨의 의뢰를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의뢰는 안톤에 대한 조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젠 용병단은 안톤이라는 인물을 조사하기도 전에 그의 조직을 부숴버리는 짓을 저질렀다.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한 조직을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급박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상대의 유인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바젠 용병단의 실수로 일어난 일.
모든 것이 바젠 용병단의 실수였고, 아벨이 그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이유는 없었다.
“용케도 바젠 용병단을 다시 믿을 생각을 했군?”
“그래도 지금 당장 브륜드 왕국에서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바젠뿐인걸요. 뭐··· 그라면 안톤을 직접 만나도 쉽게 당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좀 있고···”
점주가 호탕하게 웃으며 아벨의 등을 두드렸다.
“하하하하! 그래! 길게 봐야지. 눈앞의 작은 일에 연연하면 큰일은 해낼 수 없지!”
안톤이 아닌 그의 조직원을 상대했다고는 하지만 놈들을 한 명도 살려서 보내지 않은 것만 해도 바젠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고용할 가치가 있었다.
***
“준비가 끝났습니다. 총장님.”
“이 일을 참여하게 된 소감이 어떤가요?”
교수는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이런 기념비적인 일에 동참할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고작 소환 마법진을 발동하는 것인데 기념비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총장의 말에 교수는 말도 안 된다며 소리쳤다.
“고작 소환 마법진이라니요! 총장님께선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신 겁니다! 정령왕이라니요! 최상급 정령도 수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다는데 그보다 더욱 상위의 존재라니··· 어떤 존재가 소환될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대해 주신다니 제가 더 기쁘군요.”
교수는 마법진을 감격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기에 총장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찢어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총장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교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기념비적인 첫 소환의 순간을 교수님께서 직접 경험해보시겠습니까?”
교수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 쳤다.
“제가 어떻게 총장님께서 누려야 할 영광을 누리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소환진이 한 번 사용한다고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절 도와주신 교수님께 드릴 수 있지요. 사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기도 하고요.”
교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연신 총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제 아내와 아이에게 꼭 전하겠습니다!”
“아아··· 그거 너무 신나는 일이군요. 정말 기대가 됩니다.”
교수의 말에 총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음 목표가 정해지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럼, 마법진 위로 올라가 최대한 마나를 끌어올려 주세요.”
교수는 총장의 말을 따라 가슴에 양손을 얹었다.
기념비적인 이 순간을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마나를 끌어모았다.
“그럼, 이제 소환을 시작하겠습니다. 끌끌끌.”
교수는 총장의 기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섬뜩한 웃음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도 하기 전에 자신의 가슴이 무언가에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퍼억! 파바바바밧!
6개의 기둥이 마법진이 그려진 바닥에서 튀어나와 교수의 몸을 가로질렀다.
“끄으어어···”
제대로 된 비명을 지를 세도 없이 교수는 피 눈물이 흘러내리는 충혈된 눈으로 총장을 쳐다봤다.
“끄흐흐흐··· 끄흑··· 흐흐흐하하학! 그래! 이거지! 이거야!”
총장의 웃음소리에 그제야 총장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교수의 눈에선 더욱 많은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총장은 자신을 죽일 듯 쳐다보는 교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교수님 몸에 박힌 그것들 전부 봉인석이니까요.”
이전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준비한 장치는 총장의 마음에 쏙 들었다.
교수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는 어느새 마법진 전체를 피로 물들일 정도로 퍼졌고, 봉인석으로 흡수된 마나가 그대로 마법진에 전달되었다.
“아직 살아 있으시죠? 이제 정말 기념비적인 일이 일어날 겁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맞이하세요.”
교수의 눈에는 절망이 서렸다.
마법진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음산한 기운이 지하 공간 전체를 감쌌다.
공간이 찢어지고 그 속에서 거대한 손이 튀어나왔다.
“으하하하하! 보이십니까! 파괴만을 위해 태어난 마물! 발록이!”
절망적인 눈으로 공간을 찢고 나오는 발록을 본 교수는 발록과 눈을 마주치자 눈이 녹아내리더니 그의 신체가 물처럼 녹아내렸다.
쿵! 쿵!
공간 저편에서 두 다리까지 넘어온 발록이 포효했다.
“크롸라라라라!”
***
점주의 말대로 바젠이 강한 힘을 사용하고 4일 차의 아침.
“몸이 상쾌하고 통쾌한 것이 오늘은 안톤을 만나도 손가락 하나로 짓누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술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모습과 달리 바젠의 컨디션은 최상을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날! 빠져선 안 되는 것이 있으니!”
바젠은 일어나자마자 맥주 통의 뚜껑을 따고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이 맛이지!”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나는 이런 모습을 본 것 같은데···?”
바젠의 아침 루틴.
그는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
“아벨! 얘기는 잘 들었다!”
“솔직히 브륜드 왕국에서··· 아니 용병계에서 바젠 용병단보다 강한 용병단을 찾는 것이 더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으하하하! 당연한 소릴! 내가! 이 바젠이 있는 바젠 용병단이 최강의 용병단이지!”
당장 게오르그만 데려와도 바젠은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떼야 했지만, 향후를 생각한다면 바젠은 얼마든지 게오르그의 아성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안톤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텐데요.”
부하와 은신처를 모두 잃은 안톤이다.
만약 그의 은신처에 바젠 용병단의 흔적이 남아있었다면 안톤이 벌써 이곳을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 말은 그가 바젠 용병단의 흔적을 찾지 못했고 그 후로 모습을 감췄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있나? 우리가 가장 잘하는 걸 해야지!”
“가장 잘하는 거요?”
바젠이 팔 근육을 자랑하며 말하려던 그 순간.
-크롸라라라라!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대기가 무언가의 포효에 흔들렸다.
“이, 이건!”
포효의 근원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마경에서 느꼈던 검은 마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운.
“어이 아벨. 이건··· 안톤이 문제가 아닌데?”
바젠은 심각한 표정으로 검은 기운이 솟구친 곳을 바라봤다.
바젠의 말을 인용해보면 안톤이라는 암살자 따위는 이제 세간의 관심을 받을 레벨이 아니었다.
아벨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바젠이 고개를 돌렸다.
아벨은 경악한 표정으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근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뭔지··· 아는 건가?”
저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표정.
아벨의 머릿속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졌다.
전생에 마족 전쟁이 극에 치닫고 인류가 멸망의 길에 한 걸음 더 다가갔던 이유.
마신의 게이트가 열린 그날에 모두가 피폐해져 있었던 이유.
‘검은 마나를 가진 파괴의 마물··· 발록!’
잊을 수 없는 기억.
수많은 영웅이 죽음을 맞이했고, 많은 도시와 나라가 파괴되고 멸망했다.
수십 명의 소드마스터와 고위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도 겨우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 괴물이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그때보다 기운이 약한 건 사실이야.’
십여 년 뒤에나 나타날 발록이 그 세월을 거슬러 일찍 나타났기 때문일까?
‘지금도 끔찍한 기운이긴 하지만··· 그때의 발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약한 기운이기도 하네.’
잊을 수 없는 발록의 포효가 아니었다면 대륙의 절반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파괴의 마물 발록을 떠올리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바젠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기회?”
“이 정도면 브륜드 왕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폴리타 공국에서도 감지했을 겁니다.”
“그래서?”
“대륙의 모든 소드마스터와 고위 마법사가 지금 이 기운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깁니다. 기운의 충돌이 예상되는 마경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마경을 제외한다라··· 그럼, 생각보다 많지는 않겠는데?”
현재는 마경의 이상 현상으로 인해 생각보다 많은 인력이 마경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용병왕 게오르그는 물론이고 마경 접견국의 도움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나마 바랄 수 있는 것은 각 마탑의 마탑주와 각국의 왕실 기사단장이었다.
“얼마나 많은 국가가 파견을 보내줄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아니 여섯 정도만 있어도 저놈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겁니다.”
“여섯이라··· 그럼, 둘은 이미 채워졌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아벨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중 한 명은··· 브륜드 아카데미 총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그가 전생의 전쟁 영웅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족과의 전쟁이 터지고 수많은 나라가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그는 전쟁을 곧바로 돋지 않았어.’
무슨 이유로 전쟁에 참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그의 모습을 봤던 사람들의 말로는 굉장히 분노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의 심경을 건드리는 트리거가 없다면 발록을 저지하는 일에도 절대 참여하지 않겠지···’
아벨은 그의 실력은 믿었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바젠도 마찬가지였다.
“이덴 파라우튼? 그자는 아카데미가 저 괴물 같은 놈에게 박살이 나도 힘을 보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왕실 기사단장님을 제외한 다른 한 명이 또 있는 겁니까?”
일전에 봤던 부단장을 말하는 것일까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바젠의 말에 아벨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벨 너. 그리고 나 바젠! 우리 둘이 합치면 한 명의 소드마스터 급은 되지 않겠나!”
순진하게 미소를 짓는 바젠을 보며 아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일반 병사가 수십만이 있으면 소드마스터와 비슷하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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