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트리스탄

발록을 상대하기 위한 7써클 마법사 중 이덴 파라우튼 브륜드 아카데미 총장은 제외한다.
아벨이 알고 있는 그라면 절대 가담할 일이 없을 테니까.
‘전생처럼 그자의 연구 시설이 파괴된다면··· 도와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불확실함에 기댈 순 없지···’
다른 국가의 소드마스터와 고위 마법사를 기다리는 것 또한 불확실한 가능성이긴 했지만, 이덴 파라우튼이라는 괴짜의 합류를 바라는 것보다는 훨씬 희망적이었다.
이덴 파라우튼을 제외하고 브륜드 왕국에서 발록의 발을 묶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브륜드 왕국의 왕실 기사단장.
전생에 철혈의 기사라 불렸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발록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인물이다.
그 외에는 바젠 정도가 아니라면 방해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국가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 기사들의 대처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바젠 용병단도 브륜드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보태겠다는 겁니다!”
트리픈이 도움을 주겠다며 소리쳤지만, 그의 앞을 막아선 기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허! 어딜 돈만 밝히는 용병 나부랭이가! 나라를 지키겠다는 개소리를 표정 하나 변화 없이 말하는 건가!”
“돈을 벌기 위해 용병질을 하는 것도 맞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오! 나라가 멀쩡해야 우리가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돈을 벌 것 아니오!”
떠돌이 용병이라면 브륜드 왕국이라는 나라가 망해도 그저 돈벌이 장소가 하나 사라지는 것 뿐이었지만, 브륜드 왕국을 거점으로 삼고 있는 바젠 용병단에게는 그 수단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트리픈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기사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허! 안 된대도! 감히 용병 따위가 기사들의 행사에 끼어들 권한은 없다! 썩 물러나거라!”
국가를 넘어 대륙적인 위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을 그저 기사들의 행사로 치부하는 모습에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기사가 몇 없는 모양이구나···’
오러를 익힌 기사의 수가 가장 많은 국가라고는 하지만 수준이 뛰어난 기사가 많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자신의 수준이 낮음을 드러내는 기사의 말에 주변의 많은 기사들이 낄낄거리는 것이 눈에 거슬릴 정도로 많았다.
단호한 기사의 대응에 트리픈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바젠 용병단 단장인 바젠은 분노를 삼키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기사의 막무가내에 한 용병단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들여보내 달라 사정하게 된다면 그보다 우스운 꼴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기사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가 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지 않는 이유는 상황이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벨은 어이없는 상황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트리픈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
트리픈을 상대하던 기사는 아벨의 얼굴을 보더니 이제는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제는 이런 꼬맹이를 내세워 사정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큭큭큭큭.”
“용병이 그렇지 뭐.”
기사의 반응에 주변에서 조롱 섞인 말이 들렸다.
아벨은 조용히 기사의 앞에 다가가 섰다.
“어··· 어···”
용병들 뒤에 있을 땐 몰랐는데 기사의 앞에 바짝 다가와 선 아벨은 투구를 쓰고 있는 기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아벨은 기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피의 복수 용병단 소속 떠돌이 용병인 아벨이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사는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얼굴 가리개를 내리며 소리쳤다.
“고작 떠돌이 용병인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리 고개를 뻣뻣하게 드는 것이냐!”
“제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찾아왔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무, 뭐라?”
아벨의 당돌한 대응에 오히려 말문이 막힌 기사.
주변의 기사들도 아벨의 기세에 눌려 잠시 뒤로 주춤하는 모습이었다.
“네, 네 이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기사님은 제가 누구인지는 알고 계시는 겁니까?”
“이, 이! 용병 나부랭이 새끼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기사는 앞뒤 사정 안 가리고 검을 뽑았다.
오러를 익히고 기사가 된 자라면 위협을 가하지 않은 일반인에게 먼저 검을 들이밀어선 안 되는 일.
아벨을 제외한 바젠 용병단 전원이 무기를 꺼냈고, 한 기사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주변의 기사들은 얼떨결에 검을 뽑아 들었다.
상황이 급박한 전장에서 기사단과 용병단의 충돌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당사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먼저 검을 뽑아버린 이상 자신이 먼저 물러날 수는 없는 일.
기사는 검을 뽑은 채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리치려 했다.
“네놈을 본보기로···”
“아벨?”
기사들의 뒤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고, 그를 본 아벨은 씩 미소를 지었다.
기사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뒤에서 달려오는 기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디, 딜런 님!”
딜런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당황한 표정이었다.
기사단 회의를 하고 나오던 도중 큰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처음엔 그저 돈을 위해 찾아온 용병과 그들을 내쫓기 위해 소리치는 기사의 일인 줄 알았다.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기사들이니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일까.
언성이 조금씩 더 높아지더니 이내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당황한 얼굴로 그곳을 보던 딜런은 용병들 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 큰 충격을 선사해줬던 인물.
그리고 자신에게 항상 정중함이라는 것을 몸에 달고 살 수 있게 일깨워준 인물.
섬광의 아벨이 그곳에 서 있었다.
거기에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그 섬광의 아벨의 목에 브륜드 왕국의 기사가 검을 겨누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씩씩거리는 한 명의 기사와 당황한 기사들.
그리고 언제든 목숨을 내놓겠다는 듯 고요한 분노를 내뿜는 용병들.
자초지종을 듣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상황.
자신은 그러지 않으려 평생을 노력하며 지냈지만, 다른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편견.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딜런은 아벨의 목에 검을 겨눈 기사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끄어어억!”
기사단의 직위는 오로지 기사의 능력으로 결정된다.
하급 익스퍼트라면 하급 기사.
중급 익스퍼트라면 중급 기사.
상급과 최상급은 같은 상급 기사이지만, 대우 자체는 확연히 달랐다.
용병과 대치하고 있던 기사들은 한 기사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잡아챈 딜런의 모습에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이곳에 있는 하급 기사들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엄연히 중급 기사인 딜런은 평소에도 자신보다 아래 단계인 하급 기사들에게도 친절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큰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었던 딜런이었기에 이들은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디, 딜런 님··· 이 손 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딜런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이것은 더 이상 하급 기사들의 일만이 아니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빠르게 중급 익스퍼트가 된 딜런은 왕실 기사단장인 트리스탄의 눈에 띄었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중급 기사임에도 기사단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이유였고, 기사단 회의에는 당연하게도 기사단 단장인 트리스탄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기사단의 일이자, 제자의 일에 귀를 기울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오히려 좋군.’
아벨이 용병을 무시하는 기사에게 접근한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상당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천막에서 딜런이 나오는 모습을 보았고, 딜런이 최소한 눈앞의 기사들보다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거기에 아카데미에서 봤던 딜런이라면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소란을 피웠고··· 그것이 성공했다. 거기에 대어까지···’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인물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그만하면 되었다 딜런.”
딜런은 트리스탄의 목소리를 듣곤 파랗게 질려가는 기사의 손목을 놓은 뒤 트리스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소란을 피웠습니다.”
“스승님이라 부르라 했거늘··· 아무튼 이건 넘어가고···”
트리스탄은 자신의 기운을 조금씩 뿌리며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트리스탄의 싸늘한 말에 기사들은 여전히 검을 뽑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빠르게 검을 내렸다.
기사들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난 이후에 용병들 또한 무기를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 트리스탄은 다시 한번 말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내게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단 말이냐!”
소드마스터의 호통.
겨우 하급 익스퍼트에 머물러 있는 기사들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용병들 또한 마찬가지.
본격적으로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기운이 아니었음에도 바젠과 아벨은 제외하곤 꽤나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딜런은 스승이자 기사단장이 나선 일이었기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벨은 하급 기사들 중 트리스탄에게 보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곤 트리스탄을 향해 걸어갔다.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트리스탄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아벨.
트리스탄은 그런 아벨을 보며 감탄한다.
“호오? 이 정도 기운에 이리 멀쩡히 버티다니··· 그래. 자네가 한번 설명해보게.”
트리스탄의 눈에는 이곳에서 자신의 기운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바젠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아벨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먼저 이 기운을 좀 거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여기 계신 기사분들도 그렇고··· 저희 용병들도 더 이상 버티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의도를 가진 기운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소드마스터가 작정하고 내뿜은 기운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거품 물고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의 힘.
트리스탄은 아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기운을 거두자 그 자리에 주저앉는 기사들과 주저앉지는 않고 숨을 길게 몰아쉬는 용병들.
여기서 다른 의미로 트리스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딜런.”
“예. 단장님.”
“······ 이번 일이 끝나면 훈련을 세 배로 늘리도록 하라.”
트리스탄의 말에 하급 기사들은 경악했고, 딜런은 용병들 쪽을 잠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트리스탄의 말을 들은 아벨은 속으로 하급 기사들을 애도했다.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오러도 사용하지 못하는 용병들도 멀쩡한 기운을 제대로 버티지 못했으니··· 자업자득이지.’
물론 바젠 용병단의 용병은 투박하지만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용병들이 많긴 했다.
하지만 그런 용병들 이외에도 오러의 ‘오’자도 모르는 용병들 또한 멀쩡했으니 어쩌면 훈련이 세 배로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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