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발록(2)

“크롸라라라라!”
“모두 각자의 위치로!”
어느새 주둔지 근처로 다가온 발록.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놈이 이곳을 넘게 두지 않는 것! 그리고 너희의 목숨이다.”
트리스탄은 적의 피를 닦아내지 않은 것 같이 붉은 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그러니··· 지원군이 올 때까지 살아남아라!”
지원군이 오는 건지 온다면 언제 오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주둔지의 총사령관이자 소드마스터인 트리스탄은 발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하하하! 아벨! 큰 거 한 방! 부탁한다!”
바젠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곳엔 참전하지 않은 진이 속한 기사단의 부단장이 보여준 기운보다 훨씬 지독하고 끈적한 기운.
갓 소드마스터에 진입한 하급 소드마스터와 바젠이 싸운다면 솔직히 누가 승리를 거머쥘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바젠의 뒤를 상급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진을 제외하고.
“아벨 님께서 마법을 사용하시는 동안 제가 옆에서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어느 전장이든 마법사만 두고 모두 전장으로 향하는 법은 없다.
언제 뒤를 공격당할지 몰랐고, 마법사는 무방비 상태에서 급습을 당하는 것에 굉장히 취약했으니까.
물론 지금은 발록이라는 괴물 하나를 상대하는 것이기에 결이 조금 다르긴 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상황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벨은 길고 긴 주문을 시작했다.
***
“크롸라라라!”
발록의 포효에는 소드마스터인 트리스탄도 움찔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
물리적이거나 마법적인 무언가가 아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감.
트리스탄은 자신도 느껴지는 본능적인 공포감에 함께 따라온 기사들이 걱정되었다.
“으아아아! 이 정도면 소드마스터가 세 명이 있는 것과 다름없지!”
발록의 포효 이후 들려온 바젠의 악에 받친 포효.
그의 외침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고, 팔에 힘이 빠지려던 상급 기사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바젠의 모습에 피식 웃은 트리스탄이 발록을 노려봤다.
“여기서 더는 못 지나간다!”
검 끝에 맺힌 오러.
트리스탄이 검을 휘두르며 오러를 방출했다.
콰콰콰쾅!
태산이라도 가를 것 같은 날카로운 검기는 포효하는 발록의 얼굴에 그대로 적중했다.
“역시 단장님의 검기! 발록이 쪽을 못 쓰는군요!”
환한 미소로 소리치는 상급 기사.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트리스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온다!”
검기로 인해 자욱해진 먼지가 걷히고,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은 발록의 입에서 짙은 어둠이 모이기 시작했다.
“브, 브레스다!”
트리스탄의 검기에 아무런 피해가 없는 것에 대한 충격을 넘어 발록이 사용하려는 브레스를 보고 당황한 상급 기사들.
트리스탄 또한 아찔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단순히 넓은 평원에서 놈과 전투 중이었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상급 기사들도 얼마든지 브레스를 피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몸을 피했다간···’
그들의 뒤에 있는 주둔지는 물론이고 발록의 브레스가 브륜드 왕국까지 집어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트리스탄이 있는 힘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이거··· 어쩌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군.”
“하하하! 아무리 마물이라지만··· 처음부터 브레스는 반칙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트리스탄은 의외를 눈으로 자신의 옆에서 기운을 끌어내는 바젠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무언가를 바라고 이곳에 선 것이 아님을 확인했기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것만 막아낼 수 있다면 그다음은 우리가 더 유리할 걸세. 그 전지전능했다던 드래곤도 브레스를 여러 번 쏘지는 못했다고 하니까.”
발록의 브레스를 막기 위해 섰던 두 사람의 뒤에 상급 기사들이 모였다.
“저희가 두 분을 지원하겠습니다!”
상급 기사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있어도 발록의 브레스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피할 순 없는 일.
그들은 소드마스터인 트리스탄과 자신들과는 한눈에 봐도 한 단계는 위의 경지인 바젠에게 자신들의 힘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트리스탄은 한순간에 차오르는 힘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기사들을 저지하려던 그때 상급 기사가 말했다.
“지금은 눈앞의 적을 먼저 생각하고, 뒤에서 저희를 믿고 있는 대원들과 국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러 전이는···!”
오러 전이.
전이 대상의 오러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는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기술이다.
최상급 익스퍼트 수준의 기사를 단숨에 소드마스터 급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엄청난 기술이지만, 시전자의 오러가 영구적으로 손상되기에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금지된 기술.
지금 트리스탄과 바젠의 뒤에 있는 기사들은 자신의 오러를 포기한 것이다.
“쿠롸아아아!”
발록의 브레스는 무서운 기세로 쏘아졌고, 트리스탄과 바젠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끄으으아아악!”
오러로 몸을 두르고 브레스를 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보호막을 만들었지만, 발록의 브레스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강력했다.
트리스탄의 드워프가 만든 갑주가 터져나가고, 바젠은 살갗이 찢어져 근육이 드러나고 뼈가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반해 그들의 뒤에 있던 상급 기사들은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거기에 주둔지와 왕국의 피해는 거의 전무했다.
브레스의 대부분을 트리스탄과 바젠이 상쇄했고, 둘이 상쇄하지 못한 브레스조차 옆으로 새어 나가며 그 힘을 많이 잃었다.
끝없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던 브레스의 힘이 점점 사그라들었고, 눈앞을 어지럽히던 벌레들을 처리하지 못한 발록이 다시 한번 포효했다.
“크롸아아아!”
“끄으으!”
“크어억!”
이제는 주둔지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급 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 되어버린 상급 기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들처럼 오러를 잃은 건 아니지만, 사선을 왔다 갔다 하는 바젠 또한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크읏···!”
바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팔에 분한 감정을 숨기려 애쓰며 말했다.
“하··· 하··· 더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주둔지로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상급 기사들도 위급했지만, 바젠의 상태는 비교 대상이 될 수조차 없었다.
“그만하면 됐네. 이제는 내가 최대한 막아보지. 그리고 저기 저 젊고 유망한 친구도 아직 남아있지 않은가?”
트리스탄의 말에 바젠은 어느새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 있는 아벨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질색하면서 고개를 젓던 이유가··· 있었네···”
바젠은 아벨의 모습을 보며 그대로 기절했다.
***
“크으윽!”
진은 힘겹게 아벨을 향해 날아오는 브레스를 막아내고 있었다.
트리스탄과 바젠이 한차례 막아낸 브레스였기에 충분히 약화된 브레스였다.
그럼에도 진에게는 상당히 버거웠다.
“그건 대체 언제 되는 겁니까!”
소문으로 들어본 기억은 있었다.
프리아 제국의 아카데미에선 마법사가 아주 길고 긴 주문을 외워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그리고 그 마법은 일반적인 마법에 비해 훨씬 강력하다고.
상당히 와전된 소문이긴 했지만, 아벨에게 있어선 전부 맞는 말이기도 했다.
“오늘 안에는 완성되는 겁니까!”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 아벨의 모습에 화를 내듯 소리친 진이었지만, 날아오는 브레스를 막아내는 집중력은 전혀 잃지 않았다.
전투 시작과 동시에 아벨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지만, 발록과의 전투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고작 총사령관의 공격 한 번에 발록은 냅다 브레스를 뿜어댔으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발록의 브레스는 그 누구도 죽이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잠깐의 틈.
진은 여전히 주문을 외우고 있는 아벨을 쳐다봤다.
“······ 태양의 분노가 대지를 불태우고······ 적을 재로 만들어······”
그리곤 고요했던 아벨의 주변에 엄청난 힘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으읏···!”
얼마나 강한 힘이었는지 상급 기사인 진이 여파에 조금 밀려났다.
그리고 그 힘은 발록에게까지 전해졌는지 이곳엔 관심이 없던 발록이 고개를 돌렸다.
“치잇···”
트리스탄을 제외한 모두가 부상인 지금 발록이 움직인다면 저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행은 바라지 않을 때, 먼저 다가오는 것일까?
발록은 트리스탄을 바라보던 방향에서 아벨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 하··· 아니지?”
아직 트리스탄이 건재하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놈의 발을 묶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리스탄도 발록이 아벨에게 향하는 건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순식간에 몸을 돌려버린 발록의 앞에 섰다.
“이대로 지나가게 못 두지!”
하지만 트리스탄은 아직 재정비 시간도 갖지 못한 상황.
발록은 귀찮다는 듯 트리스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브레스를 막을 때 힘을 많이 사용했던 것인지 속절없이 밀려났다.
“트리스탄 님!”
“나는 괜찮네!”
트리스탄이 발록의 주먹에 밀려나긴 했지만, 주먹에 밀려 그 자리에서 벗어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아둔한 괴물 녀석아! 나 왕실 기사단장인 트리스탄을 무시한 죄를 달게 받거라!”
트리스탄은 다시 한번 오러가 맺힌 검을 휘둘렀다.
“꾸어어억!”
검기에 직격당한 발록은 뒤로 주춤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상당히 근접한 상태였다는 점이고, 거기서 날린 검기는 온전한 힘으로 발록에 직격했다.
거기에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위력이라 무심코 생각한 발록의 실수도 있었다.
다만, 거기까지.
가지고 있던 힘이 다한 것인지 트리스탄이 무릎을 꿇으며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늙어빠진 몸이··· 하필 지금 발목을··· 붙잡는구나···”
70이라는 나이가 넘어가기 시작한 트리스탄이었기에 소드마스터라는 초인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발록의 공격에 초인의 신체도 점점 한계에 달했던 것이다.
주춤했던 발록은 씩씩거리며 무릎 꿇고 주저앉은 트리스탄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아, 안 돼! 트리스탄 님!”
진이 절규했고, 발록의 커다란 주먹이 트리스탄을 짓뭉개려 할 때, 아벨의 주문이 끝이 났다.
“······ 내 손끝에서 폭발하는 화염의 길이여!”
발록은 자신의 발밑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아벨의 마법이 조금 더 빨랐다.
“블레이즈 번플레어!”
발록의 발밑에 생성됐던 불길은 용암을 분출하듯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콰쾅! 쾅!
“쿠어어어!”
발록이 고통에 몸부림쳤고,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는 진을 향해 아벨이 소리쳤다.
“빨리 트리스탄 님을 데리고 오세요! 이것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처음엔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발록이 점점 익숙해지는지 버둥거림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 틈에 진은 힘겨워하는 트리스탄을 데리고 돌아왔고, 마법의 영향권에서 빠져나온 괴물의 모습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발록의 몸에 난 상처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가 잦아들면서 발록의 상처가 아물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벨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게 발록의 무서운 점입니다··· 저놈은 힘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재생할 겁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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