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발록(3)

“으으으··· 루치우스··· 이건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태양의 기사단과 함께 숲속을 걷고 있던 소피아는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나는 네가 실습을 나가고 싶다고 말해서 아카데미에 추천했는데, 여기서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돼?”
루치우스의 말에 소피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인상을 찌푸렸다.
“뉘에뉘에··· 상급 기사님이 하시는 말씀인데 미천한 아카데미 학생은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지요.”
소피아의 반응에 다른 기사들이 쿡쿡 웃었다.
“아이고. 우리 대장님의 미래가 훤~ 하네.”
“태양의 기사단 신고식과 우리 대장님의 결혼식을 거의 동시에 하는 건가? 으하하핫!”
루치우스와 소피아의 관계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유명했고, 기사로서 더욱 유명해진 루치우스의 이야기는 기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하··· 이거 참. 다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루치우스는 그리 싫지는 않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루치우스와 달랐다.
“어허이! 기사님들! 그거 아니라니까요?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다들 왜 이러십니까?”
장난치는 것 같은 말투와는 다르게 진지한 분위기에 기사들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그럼, 둘의 관계와 소문은···?”
“소꿉친구! 그리고 소문은 무슨! 그렇게 따지면 내가 아벨이랑 더 소문이 났어야죠! 안 그래요?”
일부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수긍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들과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던 기사들은 그게 말이 되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이야 아벨이 용병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지만, 아카데미 시절의 행보만 봐도 떠들썩했다.
그런 아벨에게 온갖 찌라시가 따라다녔지만, 그중 소피아와 관련된 찌라시는 단언컨대 1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사들의 표정이 조금은 이상해지는 것 같자 소피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튼! 우린 친구고 앞으로도 친구니까! 그렇게 아세요! 계속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소피아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고, 루치우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무언가 묘한 분위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침묵은 한참 이어졌다.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침묵은 내부가 아닌 외부의 충격으로 깨지게 되었다.
구구구구궁!
움직임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연히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진동.
거기에 이상할 정도로 기분 나쁜 기운을 루치우스가 감지했다.
“다들··· 느끼셨습니까?”
하급 기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중급 기사들 중 일부는 루치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세하긴 하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쁜 느낌이었습니다.”
한 기사가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저곳에서 느껴진 기운이었습니다.”
“저곳은··· 브륜드 왕국이 있는 곳인데?”
브륜드 왕국 쪽에서 느껴진 이상한 기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곳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생각에는 임무는 여기서 중단하고··· 브륜드 왕국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곳에서 상급 기사는 루치우스뿐.
말도 안 되는 것만 아니라면 그의 명령으로 브륜드 왕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치우스는 기사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물었다.
“우리의 대장은 루치우스 님입니다. 명령만 내려 주시죠.”
“어차피 이번 임무는 대장님의 환영식 겸 우리의 합을 맞출 겸 하는 임무였으니, 중단한다고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하급 기사들 또한 별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서 임무를 수행하나 브륜드 왕국으로 향하나 달라지는 건 지역밖에 없었으니까.
루치우스는 자기 말에 흔쾌히 동의해 준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들 감사합니다. 쓸데없는 느낌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저곳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상급 기사의 느낌이 어떻게 쓸데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이 기분 나쁜 기운의 정체가 궁금하긴 합니다. 호기심이 아니라··· 정말 기분 나쁜 기운이니까요. 혹시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곳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
“이대로면 주둔지가 뚫리는 건 시간 문제야···”
진은 거의 다 회복한 발록을 보며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브륜드 왕국의 소드마스터인 트리스탄이 제대로 된 힘도 못 쓰고 물러났다.
최상급도 아닌 상급 익스퍼트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발록의 기운을 억지로 버티는 것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본능은 공포를 불러왔고, 자연스레 진의 몸은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벨은 그런 진을 슬쩍 쳐다보다 힘겨워하는 트리스탄에게 포션을 건넸다.
“이건··· 상급 포션이 아닌가?”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겨워 보이는 트리스탄은 아벨이 건넨 상급 포션을 놀랍다는 듯 쳐다봤다.
“얼른 드세요.”
아벨의 배려에 트리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은혜는 내 언젠가 갚도록 하지.”
포션을 단숨에 들이킨 트리스탄.
자잘한 상처는 단숨에 치유됐고, 팔 하나 겨우 움직일 수 있었던 기력은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트리스탄의 회복에 맞춰 발록의 회복 또한 끝이 났다.
트리스탄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발록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조금 전 그 마법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그것은···”
아벨이 주위를 둘러봤다.
이전과 달리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트리스탄 그리고 진뿐이었다.
“더 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벨은 마나 검을 만들어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트리스탄이 놀랍다는 눈으로 아벨을 쳐다봤다.
“검을 사용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기운은 아벨의 검술 또한 마법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트리스탄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고, 진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주둔지로 돌아가 부상자들의 회복에 신경 쓰고 언제든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게. 내 따로 명령을 내리진 않을 테니··· 자네가 준비된다면 그때 합류하게나.”
트리스탄의 말에 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상냥하게 한 말이었지만, 지금 이 전장에서 빠지라는 말이었으니까.
평소라면 그럴 수 없다며 소리쳤을 일이었지만, 진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발록이 브레스를 쏠 때부터 진이 다른 상급 기사들과 함께 있었다면 이렇게 절망적인 표정을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또한 남들과 같이 오러를 잃었겠지만,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과정을 눈으로 보고 발록이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봤기에 한번 밀려온 공포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진의 도움은 오히려 발목 잡히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진은 힘없이 주둔지로 돌아갔고, 트리스탄과 아벨은 발록을 노려봤다.
“자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나를 따라와야 할 걸세. 속도를 맞출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벨의 말을 들은 트리스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발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주는 건 발록에게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트리스탄의 출발에 맞춰 아벨 또한 발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온갖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한 아벨은 소드마스터인 트리스탄만큼은 아니었지만, 최상급 익스퍼트에 준하는 바젠 정도의 움직임까지는 흉내 낼 수 있었다.
트리스탄이 발록의 오른쪽으로 돌았고, 아벨은 곧장 왼쪽을 향해 돌았다.
발록은 순식간에 시야의 양옆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포효했다.
“크롸아아아!”
여전히 줄어들지 않은 포효의 힘.
하지만 두 사람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는 힘이었다.
“언제까지 네놈의 괴성에 움츠러드는 줄 아느냐!”
트리스탄의 거대한 검기는 다시 한번 발록의 안면을 강타했다.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얼굴이 반쯤 갈리듯 긴 절상이 생겼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발록은 괴성을 지르지도 움찔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면에서 연기가 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가 깔끔하게 돌아왔다.
그리곤 어이없다는 듯 발록을 쳐다보던 트리스탄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콰앙!
지면이 터져나갈 정도로 강력한 일격.
아주 잠깐 정신을 놔버렸던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발록의 주먹은 피했지만, 터져나간 지면의 파편이 트리스탄의 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크어억!”
그대로 트리스탄을 끝내기 위해 다시 주먹을 내지르려던 발록은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데 고개를 휙 돌렸다.
“내가 있는 거도 잊으면 안 되지! 파이어 랜스!”
세 개의 파이어 랜스가 발록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파이어 랜스는 발록에게 생체기도 낼 수 없을 정도의 마법.
발록은 벌레를 쫓아내듯 손으로 파이어 랜스를 튕겨냈다.
“이 틈을 기다렸다.”
발록의 시선이 파이어 랜스로 향한 아주 작은 틈.
“극염일섬(極焰一閃)”
아벨은 하나의 불꽃이 되어 발록의 발목을 스쳐 지나갔다.
촤아악! 화르르륵!
발록의 거대한 발목이 한 번의 공격으로 잘리진 않았지만, 발목의 상처는 트리스탄의 검기로 인해 생긴 상처처럼 금방 회복되지는 않았다.
상처가 난 순간 불이 붙어버렸으니까.
발록은 고통에 몸부림치듯 아벨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쾅! 쾅!
주변이 초토화될 정도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발목의 상처로 보폭이 좁아진 발록은 아벨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다만, 아벨 또한 더 이상 발록을 향한 공격을 지속하기 힘들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한순간에 모든 힘을 폭발하듯 끌어내는 기술인 극염일섬.
아카데미 시절 본웰 교수가 섬광의 아벨이라는 이름을 듣고 아벨만을 위해 고안한 기술이었다.
기사나 무사와는 다르게 검을 수행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을 순 없었던 아벨이었기에 복잡한 검술은 모조리 집어치우고 하나만 연습하게 된 결과물이었다.
말 그대로 일격필살.
‘확실히 효과가 있지만···’
체력 소모가 너무나도 극심했다.
‘두 번은 안 되겠··· 이크!’
잠시 다리를 삐끗한 사이 연이어 내지른 발록의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스톤월!”
트리스탄처럼 검으로 발록의 주먹을 막는 건 아벨은 불가능한 일.
온갖 마법을 사용해 발록에게서 멀어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만 말이야!”
어느새 정신 차린 트리스탄이 달려와 발록의 너덜너덜해진 발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트리스탄의 검기는 발록의 발목을 자른다는 기색으로 날아갔고, 발록 또한 그것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인지 날개로 몸을 감싸 발목을 보호했다.
발록은 발목을 보호했지만, 트리스탄의 검기에 의해 날개가 반으로 잘리는 것을 막진 못했다.
“크와아아악!”
트리스탄과 아벨은 발록의 터질 것 같은 괴성에 살짝 주춤했고, 그들이 주춤했던 아주 짧은 순간에 전황이 많이 바뀌었다.
발록의 입에선 이전과는 다르게 아주 작은 힘이 아주 짧은 순간에 모였고, 그 힘은 멀리 보이는 브륜드 왕국의 왕성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