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 악을 선으로 (1)

“크하하핫! 거봐! 내가 뭐랬어? 끝까지 가면 타고스가 무조건 이긴다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이제는 타고스가 패배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가지 않나?”
“어허! 이보게, 자네 못 하는 말이 없어! 부정 타기 전에 그만하게!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좋지!”
미다스 스타디움의 정문.
타고스의 검투를 보러왔던 자들이 문을 나서고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그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타고스의 승리에 건 자들인지 하나같이 즐거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터벅- 터벅-
“······.”
하필 문을 나선 타이밍을 잘못 잡은 탓에, 그들과 원치 않은 동행을 하게 된 건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혹은 자신이 앞지르는 메슈바들이 닿을 때마다 언짢은 기색으로 옷깃을 터는 건.
‘······더럽게.’
마음 같아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자신에게서 떨어지게 만들고 싶었으나.
- 이런 더러운 메슈바 새끼가 감히 어딜!
- ······뭐?
성급한 행동이 불러온 결과를 이미 경험한 건은 그저 그들과 한 덩이가 되어 발걸음을 묵묵히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건이 빈민가에 막 접어들며 사방에서 들려오던 기쁨의 콧노래가 점차 잦아들 무렵.
“하아······. 이런 젠장! 이제는 진짜 끝이야! 다 망했어!”
“왜 그래, 또!”
건의 두어 걸음 앞에서 걸어가던 두 명의 사내 중 하나가 못 참겠다는 듯이 외쳤다.
“이번에는 다를 줄 알았다니까! 자그마치 2차 변이자에다 살인자들이 판치는 그 인세니레 출신이 아닌가! 그런 놈이 인간 하나도 못 이기고 그렇게 맥없이 죽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이거, 뇌물이라도 먹인 거 아니야?”
“어허! 목소리 좀 낮춰! 자네, 판돈 다 잃었다고 자랑할 일 있어!”
술 냄새가 찐득하게 풍겨오는 목소리.
줄곧 바닥을 보고 걷던 건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저자는.’
발도 잘 내딛지 못하며 분통을 터트리는 메슈바와, 그를 부축하며 달래는 자.
그들을 지켜보던 건의 눈이 그중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사내에게서 멈췄다.
- 미친개는 매가 약이라더만. 내가 네 그 더러운 성질 좀 고쳐주마.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저 걸걸하고도 무례한 음성.
틀림없었다.
저자는, 검투를 하기 전에 자신과 마찰이 있던 자.
노르딘이었다.
보아하니 받은 돈을 모두 패럴드에게 걸었다 날린 모양.
뜻하지 않은 만남에 호기심이 생긴 건이 귀를 활짝 열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티가 나지 않도록 그들과 두어 걸음 정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르딘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걸었는데······.”
“그러게 왜 갑자기 눈이 돌아서는! 평소 타고스한테만 걸던 자네 아니었나? 화소 좀 얻더니 갑자기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타고스의 패배에 걸더니만, 예정된 결과였어!”
“아니,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할 만했다니까! 그리고 자네, 지금 내 형편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내 딸아이도 곧 있으면 열둘이야! 지금 밀린 빚도 감당이 안 되는데, 딸은 어떻게 키우라는 말이야······! 이렇게라도 승부수를 걸지 않으면, 내 삶은 바뀌지 않는다고! 흐으으······. 태어난 게 죄지 죄야. 노엘······. 그 어린아이가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점차 독백이 되어가는 노르딘의 말투.
이에 그를 나무라던 메슈바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노르딘은 그의 말을 끊어버리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허어······. 이 친구, 또-”
“아니! 어차피 돈도 다 잃었으니 할 말은 해야겠어! 타고스 이 매정한 놈! 한 번쯤은 져줘야 하는 거 아니냐! 너 말고 다른 놈한테 건 자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내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크흑!”
“······.”
눈을 질끈 감는 노르딘.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걸었는데······. 이제 내가 가족들을 어떻게 다시 보겠나.”
“괜찮아, 친구.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 안 그러나? 누가보면 짤린 줄 알겠어! 자네가 지금 이렇게 포기해 버리면, 자네 가족은 누가 먹여 살려? 어서 털어버리고 일어나게!”
메슈바가 노르딘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으나, 노르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걸을 뿐이었다.
허나, 건에게는 그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통쾌했던 까닭일까.
건이 속으로 웃었다.
‘꼴 좋다, 이 개자식아.’
저자가 뮐러에게 돈을 뜯어낸 그때.
그당시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원하고 있었다.
그가 뮐러에게 뜯어낸 돈을 모두 잃기를.
노르딘의 사정?
건에게는 하등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느니, 빚이 산더미처럼 싸여있다느니 등등.
저자의 사연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건에게 있어 노르딘은 뮐러의 재산을 부당한 방법으로 갈취한 메슈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건은, 그저 통쾌할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가뭄의 단비가 내리듯 느껴지는 후련함을 이기지 못한 건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역시 메슈바는 멍청하다니까.”
허나.
“······멍청? 어떤 놈이!”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던 것인지, 노르딘이 고개를 홱 들고는 사나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것은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고, 당황한 건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건이 어버버하는 사이, 고개를 돌린 노르딘의 충혈된 두 눈이 건의 눈과 허공에서 마주치자.
“큭······!”
크게 놀란 건이 그제야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하지만.
“너, 너 이 새끼······! 그때 너구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곧바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 오르는 노르딘.
술에 떡이 된 탓에 못 알아볼 법도 했으나, 우왕좌왕하는 건의 모습으로 확신한 듯했다.
“이······! 예의라고는 밥말아먹은 놈! 아까는 뮐러님께서 중재해주셔서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그 성난 외침을 끝으로 노르딘이 건에게 성큼성큼 다가오자, 그 기세에 눌린 건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젠장······!’
반응을 보아하니 이미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이에 건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르딘을 부축하던 자를 쳐다보았으나.
“너구나, 그 괘씸한 놈이. 넌 맞아도 싸다.”
“······!”
그도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마 노르딘에게서 무언가 들은 게 있었기 때문일 터.
하지만······.
“······뭐?”
괘씸하다.
그 짧고도 강렬한 단어가 건의 머리를 강타하자, 건의 뒷걸음질이 멈췄다.
노르딘을 멍하니 쳐다보는 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어떻게 네놈들이 내 앞에서 그런 말을······!’
건의 입술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지금 왜 이곳에 끌려왔는데.
누구 때문에 가족을 모두 잃었는데.
어떤 놈들 때문에 이지경까지 왔는데······!
괘씸하다?
맞아도 싸?
괘씸한 놈은.
맞아도 싼 놈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저놈들이 아니던가.
잘게 토막 내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놈들에게서 저따위 말을 들으니, 건은 꼭지가 도는 거 같았다.
‘그래, 한 번 보자고. 누가 맞아도 싼지!’
그렇게 끓어오르는 혈기의 노예가 되어버린 건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노르딘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격해진 숨결을 애써 억누르며 외치는 건.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 개자식아!”
그 말을 끝으로 건이 갑자기 앞으로 돌진하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에 노르딘이 움찔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노르딘이 반응하기도 전에 건의 머리가 그대로 노르딘의 복부에 꽂히자.
퍽-
“커헉!”
오만상을 쓴 노르딘이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이에 재빨리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는 건.
그러나.
핑-
“윽······!”
갑작스럽게 올라간 혈압과 머리에 받은 충격 때문인지 순간 머리가 핑 돌며 세상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 여파로 건이 내지른 주먹이 크게 휘며 힘을 잃자.
“이······. 어린 놈의 새끼가!”
이를 놓치지 않은 노르딘이 욕설과 함께 일어나 건의 하체를 걷어찼다.
빠악-
건의 허벅지를 정확히 강타하는 노르딘의 발.
“크악!”
그 발에 실린 어마어마한 힘에 건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허나, 고통이 너무 크면 신음도 내지 못한다고 하던가.
“크으윽······!”
건이 둔부에 이는 극렬한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끅끅댔다.
그 여파로 부들부들 떨리는 허벅지를 붙잡으며.
‘······무슨 힘이!’
발에 철근이라도 심었다는 것인가.
걷어차일 때 순간 엄습해온, 살결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숨이 턱 막힌 건이었다.
덕분에 건이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움찔거리자,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노르딘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그런 형편없는 실력으로 시비를 걸다니······. 예의과 맷집은 없고 심술과 객기만 가득한 놈이구나.”
“다, 닥쳐······!”
이에 건이 한차례 으르렁거리고는 바닥을 밀며 거리를 벌렸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와 건에게 올라타고는 건의 멱살을 붙잡는 노르딘.
그럼에도 기가 꺾이지 않은 건이 노르딘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마침내 노르딘이 큼지막한 주먹을 휘둘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놈!”
빡-
“크악!”
노르딘의 억센 손이 건의 얼굴에 작렬하자, 건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에 건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
“······살해. 애 잡겠······. 그냥 혼쭐만 내······.”
“흥, 이놈이 한 짓에······ ······직 멀었어!”
들려오는 군데군데 끊긴 대화.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을 들어 올리는 듯한 느낌이 들자, 건이 눈을 억지로 떴다.
“······너무 흥분했나.”
건과 눈을 맞추는 노르딘.
생각보다 세게 나간 주먹에 미안했던 것인지, 그가 약간은 누그러진 기세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이쯤에서 멈춰주마.”
허나······.
그 같잖은 낯짝이 꼴도 보기 싫었던 건은, 대답 대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취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노르딘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는 건.
탁-
가래와 흙으로 범벅이 된 침이 사내의 얼굴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크게 일그러지는 노르딘의 얼굴.
건이 잔뜩 부어올라 피가 흐르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엿이나······. 먹어라, 이······ 개자식아.”
“이, 이놈이 아직도!”
씩 웃어주는 건.
그 모습에 결국 폭발한 노르딘도 다시 얼굴이 시뻘게지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의 주먹이 흐릿해지는 것을 본 건이 눈을 감았다.
‘제길······.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그때.
“어? 노르딘 아저씨!”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노르딘의 움직임이 멈췄다.
“······?”
처음 들어보는 상큼발랄한 목소리에 눈을 슬쩍 뜨는 건.
그러자 노르딘의 팔에 매달린 단발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에요?”
활기차면서도 생기 있는 음성.
외모는 꽤 성숙했으나, 얼굴에는 주름이 거의 없어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건이 잔뜩 부어오른 눈으로 노르딘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많이 쳐줘도 스물 후반인데. 누구야, 저년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르딘은 그녀를 보기 무섭게 건의 멱살을 놓고는 미소지었다.
뺨에 묻은 침을 손으로 닦으며.
그 덕에 건은 바닥에 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으나, 노르딘은 개의치 않고 쥐었던 주먹마저 몸 뒤로 숨겼다.
“유, 유스티나! 여기는 어쩐 일이냐?”
마치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잔뜩 움츠러드는 노르딘.
유스티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를 쳐다보자, 노르딘이 땀을 뻘뻘 흘리며 번명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뭐······. 그냥, 간만에 시간이 좀 남아서 아저씨 친구랑 저녁을 같이 했지.”
누가 봐도 수상한 반응이었으나, 유스티나는 바닥에 대자로 누운 건을 힐끗 보고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유스티나가 바닥에 대자로 누운 건을 손으로 가리켰다.
“쟤는 누구예요?”
“아, 그, 그게······.”
노르딘이 쩔쩔매며 말을 잇지 못하자, 유스티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저씨, 설마 또 술 마셨어요?”
“그럴 리가. 이, 이건-”
“술 냄새가 이렇게 진동하는데, 지금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구요?”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노르딘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유스티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술 마시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쌈박질까지 하다니······. 아줌마가 알면 뭐라고 하실까요?”
“······!”
유스티나의 입에서 나온 ‘아줌마’라는 단어에, 노르딘이 기겁하며 유스티나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 그건······! 유스티나! 내가 잘못했다! 마시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참지 못하고 그만······! 하, 한 번만 못 본 것으로 해다오!”
노르딘이 비굴해 보일 정도로 싹싹 빌자, 유스티나가 잠시 고민하는 척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저 친구, 아저씨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쯤하시고 저한테 넘겨주세요. 저 정도 맞았으면 이미 충분한 거 같으니까요.”
“······!”
그 말에 바닥에 멍하니 누워 대화를 듣던 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 내가 물건이냐? 주고 받고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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