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2)

또각- 또각-
“뭘 그렇게들 놀라? 내가 다 무안하게.”
매력적이면서도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
디안나였다.
그녀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오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뮐러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그러자 뮐러가 인사하기 무섭게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골든 쉴드들.
디안나가 싱긋 웃었다.
“흐응······. 얘네는 기강이 똑바로 잡혀서 좋다니까. 안 그래, 고기?”
다른 자들과 달리 자리에 얼어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보니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문제들이 떠올라 짜증이 난 것일까.
키이이잉-
디안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렬한 말루스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말루스.
화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그 순간.
“어인 일로 이 늙은이와 골든 쉴드를 소집하셨는지요? 설마 이 아이를 소개해주시려 부르신 것은 아니리라고 여겨집니다만.”
“······.”
뮐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지자, 말루스가 멈칫했다.
한동안 화를 표독스러운 눈빛을 쏘아보다 이내 말루스를 거두는 디안나.
그녀가 빈 의자로 걸어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고기 네년 때문에 일이 커진 것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찢어 죽여버리고 싶지만······. 하필 루시퍼님과 연관되어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짜증나네 진짜!’
아몬이 탄생시킨 괴물의 잠재력을 평가하고, 화에게 박힌 스트라토스의 씨앗이 발아(發芽)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것이 크리마타에서 자신의 마지막 임무였다.
하지만 화의 예상치 못한 활약으로 숨겨진 문제들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면서, 손꼽아 기다려오던 자신의 복귀도 섣불리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주인인 쾌락의 드래곤, 아바돈마저 관심을 가지는 듯했으니까.
- [헤레브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니. 전례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키오노스까지······. 흥미롭구나. 그 인간의 비밀을 더 파헤쳐보도록 하라. 연구가치가 있는 놈이니 목숨은 보존하도록.]
그래서일까.
디안나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불쾌했다.
자신이 관심도 없는 년의 비밀을 변태마냥 파헤쳐야만 하는, 이 상황이.
그렇게 잔뜩 심술이 난 디안나가 탁자를 노려보고 있을 때.
뮐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설마 아직 도착하지 않으신 겁니까? 어느 정도의 거물이시길래 저와 골든 쉴드의 유일한 3차 변이자 두 명을 모두 불러모으신 것인지 궁금하군요.”
그 말에 디안나가 손뼉을 치고는 뮐러에게 말했다.
아까와는 딴판인 활기찬 목소리였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내가 소개시켜준다고 했었지. 근데, 일단 나중에. 먼저 확인해봐야 할 게 있거든.”
“······?”
“영감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당신이 아니거덩.”
화에게 고개를 돌린 디안나가 명령했다.
“고기, 무기 아무거나 하나 짚고 공터 가운데에 서. 그냥 가서 서도 되고.”
“······!”
그 말에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직감한 것일까.
화가 주춤거리며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디안나가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흐응······. 강제로 하기는 싫은데. 어떡한담?”
키이이잉-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안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말루스.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세였다.
“아, 알았어요!”
이에 놀란 화가 딸꾹질을 하며 일어나 공터로 걸어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작은 단검 하나를 집어 든 채였다.
당황한 뮐러도 다급하게 입을 열었으나.
“디, 디안나님 설마······!”
디안나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트리가에게 명령할 뿐이었다.
“트리가. 너도 가서 서.”
그러자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공터로 발걸음을 옮기는 트리가.
이를 바라보던 뮐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다른 자들도 아니고, 골든 쉴드를 지탱하는 강대한 두 축인 트리가와 레이븐을 모두 불러낼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건만······.
설마 그 상대가 이 어린 소녀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 소녀가 류 건의 동생이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타고스에게 그녀의 비보(悲報)를 전할 수는 없었던 뮐러의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생각하길 얼마.
뮐러가 잠시 눈치를 보고는 디안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디안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사오나, 다른 자도 아니고 트리가의 기용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심이······. 저 어린아이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레이븐도 아깝습니다. 차라리 카셀을 사용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
그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카셀이 본인을 손으로 가리키며 의문을 표했지만, 디안나는 단호했다.
“아니, 저걸로는 안돼. 트리가는 되야 저년을 감당할 수 있을걸? 잘하면 레이븐까지 합세해야 할 수도 있어.”
“그, 그건 단순한 우려 아닙니까. 그러한 상황이 당도한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시는 게······.”
“······”
계속되는 참견에 살짝 짜증이 난 것일까.
디안나가 팔짱을 끼고 뮐러를 째려보았으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차라리 레이븐을 먼저 기용하시는 게······. 크리마타에서 트리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혹여나 트리가가 잘못되면 골든 쉴드가, 아니 크리마타 전체가 휘청일 수 있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생각을······.”
고개를 푹 숙이는 뮐러.
그의 말에 어폐가 딱히 보이지는 않았던 것일까.
잠시 말이 없던 디안나가 화를 차갑게 쳐다보곤 툭 내뱉었다.
“참 애쓴다 애써. 바도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대체 그놈의 크리마타에 왜 이리 환장하는지.”
“······.”
디안나가 레이븐에게 눈짓했다.
“가서 서. 트리가 넌 들어오고.”
그 말에 레이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뮐러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최악은 면했군. 그보다 발톱이 화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저 소녀에게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인가.’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의 잠자리 상대 외에는 모두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발톱이 바로 디안나 아니던가.
게다가 그 잠자리 상대마저 하루가 지나면 쳐다도 보지 않는 메슈바가, 한낱 인간 따위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나중에 생각해봐도 늦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류 건의 동생, 류 화의 생사(生死).
이것이 뮐러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레이븐이 검을 다잡는 것을 본 뮐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최선이다. 이제 저 아이가 살아남길 기도하는 수밖에······.’
이러한 뮐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안나가 입맛을 다시며 명했다.
“흐응······. 시작은 약하게 가자고. 이게 되려나? 레이븐, 저년을 죽여.”
“······예?”
“뒷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앞뒤 가리지 말고 죽이라니까?”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디안나의 명령.
레이븐이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칼을 집어들었다.
“날 원망 마라, 꼬마야.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니까.”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레이븐.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던가.
방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모습에, 단검을 쥔 화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저자······. 진심이야! 정말로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레이븐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살기.
맥박이 미친 듯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왜, 왜 나에게는 이런 일들만······!’
부모의 죽음과 오빠와의 이별, 그간 숱하게 겪은 모욕과 수치.
그리고 이제는 죽음의 위기까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연쇄적으로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의 굴레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어떤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일들만 계속해서 벌어진다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마음 깊은 곳에서 억울함과 분노가 솟아올랐다.
꾸우욱-
단검을 죽어라 붙잡은 화가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며.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항상 자신의 곁을 지키던 오빠 류 건마저 없는 지금,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몸이 반으로 쪼개질 거 같았으니까.
“후우······. 후우······.”
화가 터질 거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검을 들어 올리는 레이븐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피해야 해!’
그렇게 화는 자신을 덮쳐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꾹 누르며 자리에 우뚝 섰으나······.
그녀의 연약한 의지는 본능을 이겨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흡······!”
레이븐의 기합과 함께 화를 향해 쇄도하는 검.
두 눈을 부릅뜬 그녀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쇄애액-
‘주, 죽는다······!’
죽음.
들려오는 스산한 소리에, 화는 뇌리에 각인된 ‘죽음’이라는 그 단어를 본능적으로 떠올렸고.
그 여파로 인해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 안돼!’
동시에 그녀를 잠식하는, 지극히 원초적인 죽음의 공포에 그대로 굳어버리는 몸.
결국 칼을 휘두르기는 커녕,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은 화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그렇게 레이븐의 검이 그녀에게 쇄도했으나.
턱-
“역시.”
화가 느낀 것은 칼날의 차갑고 예리한 감촉이 아닌 서늘한 바람뿐이었다.
“······?”
눈을 슬쩍 뜨는 화.
자신의 눈 바로 앞에 멈춘 검이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도록 검날을 한 손으로 잡아 세운 디안나 역시.
디안나가 고개를 까딱였다.
“혹시나 해서 실험해 봤는데,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한 건 확실하네.”
“······?”
그 말에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디안나를 쳐다보는 레이븐.
디안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왜? 설마 내가 이년을 상대하라고 널 부른 거 같아? 조금만 기다려. 네가 붙어야 할 괴물은 따로 있으니까.”
디안나가 화에게 말했다.
“고기, 미안하지만 다시 들어가 줘야겠어.”
“······?”
키이이잉-
“······!”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형성되는 날카로운 가시.
무언가를 직감한 화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 이러면 스트라토스를!’
그때도 그랬었다.
스파이기에게 찢겨 죽을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 어머~ 벌써 왔구나? 이렇게까지 빨리 올 줄은 몰랐는걸?
- 키이이잉-
저 불길한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자신은 스트라토스와 조우했고.
- 가엽게도······. 너는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거 같구나. 아울러 데우스의 사랑 역시.
깊은 회의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서일까.
화가 다급하게 외쳤으나.
“아, 안돼! 그, 그것만은 제발-”
푹-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시가 화의 목에 박히며, 그렇게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털썩-
화가 바닥에 쓰러지자, 디안나가 레이븐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안 그러면 너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
곧바로 화에게 명령하는 디안나.
권능이 깃든 음성이었다.
[일어나 똑바로 서라.]
그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화가 움찔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북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쪽 눈이 자줏빛으로 물든 채.
“······?”
분위기가 아예 달라진 그녀를 뮐러와 골든 쉴드들이 멍하니 쳐다보자, 디안나가 레이븐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눈 앞에 있는 놈, 보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화.
디안나가 다시 명령했다.
[······죽여라.]
그러자.
사아아아-
또다시 불길한 소리가 피어오르며 그녀에게서 희뿌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잿빛을 띠는 듯하더니, 이내 짙은 자줏빛으로 탈바꿈하는 기운.
그 현상이 가지는 무게를 알았던 것일까.
줄곧 표정 변화가 없었던 트리가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레이븐 역시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 말루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연기가 걷히기 무섭게 모습을 드러내는 짙은 자줏빛의 단검.
카셀이 입을 틀어막았다.
“헤, 헤레브!”
경악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뮐러 역시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어린아이가 3차 변이자였다니······. 그래서 트리가를 원했었구나!’
말루스로 만들어진 메슈바 고유의 무기, 헤레브.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저 아이에게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화는······.
3차 변이자였다.
‘저 소녀가 메슈바라 치더라도, 어떻게 저 어린 나이에 헤레브를!’
입을 다물지 못한 뮐러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디안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거봐, 놀랐지? 나도 놀랐다니깐! 저년이 저런 힘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키이이잉-
급변한 화의 분위기에 경각심이 든 것일까.
레이븐도 그녀의 헤레브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자신의 말루스로 붉은 양날검을 만들어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헤레브를 화에게 겨누는 레이븐.
화도 이에 화답하듯 자세를 낮추자.
드드드드드-
서로를 향한 지독한 살기에 공간이 전율하기 시작했다.
그 심상치 않은 진동에 퍼뜩 정신이 든 카셀이 외쳤으나.
“자, 잠깐! 이곳에서 모든 힘을 개방해버리면 공간이 버티지 못할 텐데요!”
디안나는 태연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고기. 내가 있는 한 니들이 죽을 일은 없으니까.”
디안나가 탁자에 놓인 다과를 집어들었다.
다과를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리는 디안나.
“자······. 그때는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확인을 못 했으니, 이제 한 번 보여줘 봐. 네 힘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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