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4)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는 레이븐.
“크으······.”
털썩-
어느새 그에게 다가온 디안나가 손을 하늘로 뻗자.
키이이잉-
공간에 가득했던 불순물들이 그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허나 방금 벌어진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발톱의 얼굴은 어둡다못해 시커멨다.
마치 화가 스파이기를 잡아버린 그 날에 지었던 표정처럼.
그리고 이는 뮐러도 마찬가지.
얼굴이 흙빛이 된 뮐러가 속으로 탄식했다.
‘허어······. 저 정도의 정밀도라면 3차 변이에 든 지 꽤 되었다는 증거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최소 3차 변이의 끝을 보고도 남았겠군.’
인간인 줄로만 알았던 화의 정체는 둘째치고, 저 어린 나이에 헤레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숙함.
여지껏 적지않은 세월을 살아온 뮐러였지만,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어린 소녀가 헤레브를 저렇게나 잘 다루는 광경은 그도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을 때까지 수련해도 헤레브를 얻지 못하는 메슈바들이 수두룩한 곳이 바로 이 나페스토 대륙 아닌가.
이처럼 평생을 노력해도 얻을까 말까 한 그 무기를, 마치 오랫동안 연마해온 것처럼 유려하게 다루는 소녀라니······.
꿈에서나 볼법한 진경이었다.
게다가 저 아이가 사용하는 헤레브의 형상.
다름아닌 페스카즈가 아닌가······!
차렷 자세를 취한 채 움직임이 없는 화를 뮐러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인간 고유의 단검을 헤레브로 취한 메슈바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허나, 그 후에 뮐러가 느낄 충격에 비하면 이는 약과였다.
팔짱을 낀 채 말이 없던 디안나가 갑자기 외쳤다.
[스트라토스? 다 보고 있지? 나와 봐. 대화를 좀 해야겠어.]
“······!”
스트라토스.
그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에 뮐러가 입을 떡 벌렸다.
‘······뭐, 뭐라?’
카셀도 매우 놀랐는지 두 눈을 크게 치켜뜬 채 중얼거렸다.
“스, 스트라토스? 지금 스트라토스라 하셨습니까?! 카바에르를 제외한 그 광포한 인세니레 메슈바들을 모두 지휘했던 까닭에 ‘군대’라고도 불리는 메슈바? 얼마 전에 영멸당했다는······?”
카셀이 버벅거리자, 디안나가 싱긋 웃었다.
“아, 내가 말 안 해줬구나? 걔 안 죽었어. 목숨줄이 어찌나 질긴지.”
그 말에 뮐러의 눈이 깊어졌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건만, 설마 스트라토스가 그녀 안에 깃들어 있을 줄이야······! 이거 큰일이다!’
그녀의 정체와 말루스, 페스카즈의 형상을 취한 헤레브, 그리고 스트라토스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문제들에 뮐러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때.
“기대 이상이군.”
“······!”
중저음의 잘생긴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지자, 모두의 이목이 그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쏠렸다.
“이렇게까지 구미가 댕기는 놈은 처음이다.”
그곳에는, 한쪽 눈이 주황빛으로 물든 화가 있었다.
옷깃을 털며 바닥에 쓰러진 레이븐을 힐끗 바라보는 스트라토스가.
그들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스트라토스가 턱을 치켜든 채 그들을 오연하게 노려보자, 트리가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털썩-
이에 퍼뜩 정신을 차린 카셀과 뮐러도 그에게 예의를 표했다.
상대는 발톱의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자.
거기다 그 광포한 인세니레 출신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바짝 엎드려야 했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디안나가 뮐러에게 말했다.
“영감, 내가 말했었지? 소개시켜줄 애가 있다고. 잘 봐둬. 앞으로 내 뒤를 이어 크리마타에 파견될 인재 중의 인재니까. 아, 유배라고 말하는 게 적절하려나?”
그 말에 골든 쉴드들의 고개가 더욱 깊어지자, 디안나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그쯤하고 이제 일어나. 어차피 나중에 질리도록 인사할텐데, 뭘 벌써부터 그렇게 유난을 떨고 그러니?”
스트라토스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디안나.
“그래서, 어때? 이년의 능력을 직접 본 소감은?”
“······.”
허나 스트라토스는 대답 대신 뮐러를 비롯한 골든 쉴드들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고.
그 의미를 알아챈 디안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너희 위에 군림할 놈이야. 이쯤하면 인수인계는 잘 됐겠지? 이제 그만 꺼져!”
키이이잉-
하루빨리 스트라토스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탓일까.
디안나의 앙칼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루스가 그들을 위협하듯 뿜어져 나오자, 뮐러가 고개를 숙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헤레브부터 스트라토스까지. 얽혀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타고스에게 뭐라고 전해야 할지······.’
그의 뒤로 레이븐을 부축해 걸어나오는 카셀과 트리가가 언뜻 보였다.
그렇게 폐허가 된 훈련실에 오직 두 명만이 남았을 때.
디안나가 물었다.
아까 전의 활기찬 음성은 어디가고 힘이 쭉 빠진 목소리였다.
“하아······. 빌어먹을. 넌 뭐가 보였니?”
이번에도 예상을 뛰어넘어도 한참은 뛰어넘은 화의 활약에 기가 찼던 것일까.
그녀의 얼굴은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한 표정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스파이기를 단신으로 잡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크리마타에서 한따까리 하는 3차 변이자마저 잡아버린다고?’
아무리 무력이 낮은 크리마타라고는 하지만, 어느 곳에나 실력자는 존재하는 법.
레이븐은 그리 가볍게 넘길 상대가 아니었다.
헤레브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메슈바이자, 크리마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자.
그 자가 바로 레이븐 아니던가.
웬만한 자는 옷깃조차 건들지 못하는 그 괴물을, 이 어린 년이 한순간에 잡아버리다니······.
디안나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저년의 스타일······. 틀림없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암살자의 방식과 똑같다.’
기척을 지우는데 능하고, 정교함이 요구되는 암기술에 통달한 움직임.
게다가 상대를 급습하고 정면으로 부딪치길 꺼리는 전투방식까지.
암살자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허나, 그렇기에 파훼법 역시 명확했다.
어떻게 습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살수(殺手)들의 장점을 빼닮은 이상 맹점 역시 비슷할 터.
그녀 역시 여느 암살자처럼 탁 트인 공간을 선호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치고빠지는 게릴라전에서 유리한 그들의 특성상, 이런 개방된 공간일수록 제힘을 못 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이를 잘 알았던 디안나였기에, 일부러 화를 이곳으로 불렀다.
그녀가 이러한 모래주머니를 차고 레이븐에게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러나······.
버티는 것이 아니라 레이븐을 아예 부숴버리는 화를 보며, 또다시 경악하고야 마는 디안나였다.
‘상대의 방심과 지형지물을 활용해서 상황을 한순간에 엎어버렸다. 변수창출에 능한 암살자······. 대체 누가 저런 괴물을 길러낸 거야?’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디안나.
하지만 이는 스트라토스도 마찬가지였던 것인지,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어마어마한 그릇의 크기부터 이 근원을 알 수 없는 힘까지. 내가 바로 본 게 틀림없다. 이년, 탐나는군. 양분으로 삼기 아까울 정도로. 그리고 말루스의 존재감마저 지워버리는 저 능력······. 듣도보도 못한 능력인데.”
나페스토 대륙에서 암살자에 대한 평가는 변이 단계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1차, 2차 변이자들은 암살자를 그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반면, 3차 변이에 오른 자들은 대놓고 무시하는 게 다반사.
후자는 그렇다 쳐도, 전자인 1차, 2차 변이자가 암살자를 두려워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들이 암살자 최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은신술과 잠행술 등 자객 고유의 기술들에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피에 깃든 말루스를 ‘감지’하고 이를 다루는 법을 깨우친 자들이기에.
그래서 상대의 말루스도 ‘감지’할 수 있었기에, 이들 앞에서는 암살자가 무슨 짓을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기척을 숨긴다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말루스를 간파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이렇듯 변이 단계가 올라갈수록 암살자의 한계도 극명히 드러나기에, 실력자들일수록 암살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덕분에 방금 전투는 사실상 화가 버티는 것만 해도 용하다 할만한 전투였으나······.
모든 예측을 뒤엎어버린 화를 보며, 난생처음으로 깊은 호기심이 드는 스트라토스였다.
‘3차 변이자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은신술을 겸비한 암살자라······. 어쩌면 이년 하나로 암살자에 대한 인식이 바뀔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그가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자, 그건 나도 봤으니까 거두절미하고, 다른 거 뭐 알아낸 거 없어? 있으면 좀 말해봐.”
성격 급한 디안나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러자 되묻는 스트라토스.
“네가 알아낸 것은?”
디안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이년이 어마어마하게 강하다는 거? 그거 말고는 잘 모르겠는데. 난 이런 쪽으로는 영 아니어서.”
그 말에 스트라토스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마치 화에게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다.
[디안나를 죽여라.]
“······!”
그러자.
키이이잉-
또다시 화에게서 무언의 아우라가 스멸스멸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미지의 기운은 이번에도 잠시 잿빛을 띠는 듯하더니, 이내 주황빛으로 탈바꿈하며 그녀의 주위로 안개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그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한 디안나가 더듬거렸으나, 화는 멈추지 않았다.
스릉-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암살자로 변모해 자세를 낮추는 그녀.
이번에는 자줏빛이 아닌, 주황빛의 두 단검을 늘어뜨린 채였다.
그렇게 화가 달려들려 할 때.
[그만.]
들려온 스트라토스의 명령에 그녀의 단검이 스르르 사라졌다.
어느새 다시 돌아온 스트라토스가 디안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러자.
키이이잉-
“감히······. 발톱을 우롱해?”
뒤늦게 분노한 디안나가 으르렁거렸다.
동시에 실내에 어마무시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으나, 스트라토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는 스트라토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군.”
“······?”
“꼭두각시.”
“······!”
“이년, 시스템 자체가 이렇게 되어있다. 누군가의 통제를 받으면 내면에 잠들어있던 힘이 발현되게끔.”
그 말에 디안나의 기운이 주춤하자, 스트라토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년의 기억도 이상하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 뚝 끊겨있더군.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잘라낸 것처럼. 아마 이년의 말루스와 힘도 그 사라진 기억과 연관되어있겠지.”
“흐응······. 그래?”
그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든 것일까.
디안나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또 뭘 해볼까? 이년이 뭘 그리 숨기고 있는지 궁금하네?”
하지만 스트라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잿빛의 말루스를 확인한 이상, 이년이 루시퍼님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은 확실하니까.”
“······.”
“게다가 이제는 내가 함부로 잡아먹을 수도 없다. 루시퍼님의 권속일 수도 있으니······.”
“흐응······. 그럼 어떡하지?”
스트라토스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지금으로써는 유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유다? 아! 그러고 보니까 유다가 있었지!”
그 말에 손뼉을 치는 디안나.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근데, 물어보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
“유다 걔 지금 크리마타에 없거덩.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어.”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스트라토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흠······. 어쩔 수 없나. 그렇다고 함부로 건드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니,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지 뭐.”
디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무언가가 생각나기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스트라토스가 물었다.
“얼마나 걸리지?”
“뭐가?”
“유다.”
“글쎄. 그놈의 의중을 알 수가 없으니 잘 모르겠네? 한 달? 두 달?”
그러자 스트라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 됐군.”
“······?”
“네 유혹의 권능, 상대를 무의식 속에 강제로 가둘 수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본인의 의지로 나오게 만들 수도 있나? 자신이 원할 때 들락날락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스트라토스의 질문.
디안나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럴······수도 있지. 근데 갑자기 왜?”
“화를 그렇게 만들어줬으면 좋겠군. 이년이 무의식 속의 세계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말이야. 나도 원할 때 이년에게 말을 걸 수 있게 해주면 좋겠는데.”
“너······. 무슨 짓을 벌이려고?”
디안나 스트라토스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쓸데없는 생각 마라. 이년이 루시퍼님의 권속이건 아니건, 이년의 자아를 깨뜨려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야 이년을 둘러싸고 있는 방어막이 약해지니까.”
“근데 그게 권능이랑 뭔 상관인데?”
“도와줘야지. 그년이 망가지도록. 그렇게 된다면 너도 복귀가 앞당겨지는 것 아닌가?”
“······!”
그 말에 디안나가 씩 웃었다.
“흐응······. 마음에 드는데.”
키이이잉-
곧바로 말루스를 뿜어내 작은 가시를 만드는 발톱.
스트라토스가 그 가시를 빤히 쳐다보자, 디안나가 말했다.
“뭘 그렇게 관심을 가져? 일종의 열쇠라고 생각해. 이게 박혀야 너나 그년이나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까, 경계 좀 그만 풀지?”
그 말을 끝으로 손짓하는 발톱.
그러자 가시가 화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으나.
텁-
맨손으로 그 가시를 붙잡은 스트라토스가 물었다.
“만약 이 가시가 뽑힌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순간 디안나의 표정이 짓궂게 변하자, 스트라토스가 그녀를 노려보고는 말했다.
“경고를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 혹여나 나중에 그 가시를 뽑게 됐을 때 이년이 어딘가 잘못된다면, 루시퍼님의 그 후폭풍을 모두 받아낼 자신이 있나?”
“······.”
“뒷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박아라.”
그러자 디안나가 입맛을 다셨다.
“쳇, 심장에 박아야 가장 효과가 확실한데. 물론 박힌 곳이 심장인 만큼, 가시가 뽑히는 순간 죽지만 말이야. 뭐, 어쩔 수 없나.”
“······.”
그 말에 스트라토스가 디안나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노려보자, 디안나가 싱긋 웃었다.
“알써. 장난도 못 하나. 흐응······. 어디에 꽂는 게 좋을까?”
스트라토스의 주위를 빙빙 도는 가시.
그러다 마침내 적당한 곳을 찾았는지, 가시는 이내 화의 새끼손가락에 박혔다.
푹-
그 가시가 점차 희미해지는 것을 본 디안나가 손을 털며 말했다.
“이제 가능할 거야. 근데 너는 그렇다 쳐도, 화 그년이 무의식에는 왜 들어가게 해준 거야?”
그 말에 스트라토스가 씩 웃었다.
“무의식이야말로 나의 집과 다름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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