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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드
작품등록일 :
2024.05.09 14:51
최근연재일 :
2024.06.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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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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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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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6)

DUMMY

그렇게 시간이 흐르길 얼마.

불현듯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영영 말하지 못할 거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일까.


“어머니랑 같이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화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아픈 과거들을.


“갑자기 메슈바들이 침입했고, 그들로 인해서 제 삶은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제 가족들과 친구들······. 심지어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제 곁을 떠났고, 가족은 저와 제 오빠만 남았어요.”


수도 없이 싸워왔던 자신의 아픈 기억들.

화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때······. 오빠는 많이 힘들어했어요. 자신이 그때 배 안에 숨어서 기도하지 않고 무언가를 했었더라면, 아버지는 살릴 수 있었을 거라고. 내가 어리석었다고······. 자책하면서 말이에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제가 니힐에게 죽을 뻔했을 때······. 오빠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힘으로 저를 구해줬어요. 아마 데우스님께서 도와주신 거 같아요.”


‘회상’이라는 쓰디쓴 독주를 들이키면 들이킬수록, 그녀의 목소리에는 점차 감정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안나라는 그 여자······. 그 메슈바 때문에 오빠는 정신이 붕괴될 뻔했어요.”


그래서일까.


“후에 이 도시의 왕이라는 자도 만났어요. 정말 무례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는 자였어요. 인간을 어찌나 그리 무시하던지.”


어느새 그녀는 분노하기도 하고.


“가니한테 들었는데, 스파이기를 제가 잡았데요. 저는 그때의 기억이 없는데,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하나같이 제가 그 괴수를 잡아버렸다고 했어요. 오직 단검 두 자루로요.”


자신은 기억나지 않는 상상 속의 무용담을 풀기도 하면서.


“그리고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디안나는 저를 자꾸만 사지로 몰아넣어요. 마치 제가 하루 빨리 죽기만을 바라는 거 같아요.”


자신의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스트라토스라는 메슈바도 자꾸만 질문을 던져서 저를 시험해요. 제가 데우스님을 불신하고 의심하도록. 근데, 저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어서 반박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화가 그녀의 여정을 끝마쳤을 때.


“그래도 이곳······. 이 꿈속에는 제가 사랑하는 자들이 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목이 잘리지도 않고.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지도 않는, 나의 사람들이 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그녀의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고.


호흡은 불안정했으며.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아마 자신의 고달픈 이야기를 쏟아내며 알게 모르게 감정을 많이 쏟았으리라.


그리고 아하바는, 때로는 그의 편을 들어주고.


어떨 때는 공감해주며.


또 어떤 때는 묵묵히 들어주면서······.


그녀의 긴 여정에 같이 동참해주었다.


그리고 화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하바도 그녀에게 깊이 공감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팔을 쭉 뻗는 아하바.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


아하바의 품에 안긴 화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으나.


토닥-


“······!”


주름진 그의 손이 화의 등을 두드리자.


토닥-


“대견하구나.”


그의 목소리가 공간을 타고 고요하게 울려퍼지자······.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화야.”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십 번.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 어려운 순간들을. 그 견디기 힘든 태풍과도 같은 일들을, 오직 홀로. 그것도 온몸으로······. 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냈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씩씩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대견하구나. 참으로 힘들었겠어.”


넝마가 된 화의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의 따스한 말들.


화의 등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하자, 아하바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네 아픔을 보았고 네 눈물의 기도를 들었다. 그러니 네가 그 모진 일들을 겪으며 받은 아픔과 슬픔. 절망과 좌절. 그리고 받은 모든 상처들······. 한 방울도 빠짐없이 모두 다 나에게 쏟아내거라. 데우스님께서······. 네게 너무도 큰 기대를 하고 있구나.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라. 화 너는 그 모진 일들을 잘 이겨냈고, 잘 이겨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이겨낼 것이다. 자랑스럽구나. 네가 그런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문 아하바가 화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그 상한 심령을 어루만지는 듯한 위로의 손길에.


녹슬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그녀의 내면을, 부드럽게 터치(touch)하는 아하바의 목소리에······.


화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꾸욱-


어느새 아하바의 품에 몸을 맡긴 채 그의 옷가지를 꽉 붙잡는 그녀.

화의 손이 덜덜 떨렸다.


툭-


투둑-


새하얀 토가를 적시는 화의 눈물.


그녀가 속으로 조용히 외쳤다.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이를 악물며.


‘데우스님······. 어디 계세요······. 저 좀······. 저 좀 도와주세요······. 부탁드려요. 저······. 저 너무 힘들어요······.’


내심 바라고 있었다.


원하고 있었다.


찾고 있었다.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자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를.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는 자를.


그러나 크리마타에는 화가 원했던 자 따위는 없었고.


그녀는 희망을 접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자를 만나.


예상치 못하게 이야기를 쏟아내고.


예상치 못한 기도를 하면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은 화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화의 속에서 요동치던 감정의 파도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무렵.


지평선 아래로 침몰하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던 화에게 아하바가 말했다.


“어느 왕이 있었단다.”

“······?”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화가 아하바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아하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왕은 한 가지 원하던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붙들 수 있는 좌우명을 가지는 것. 그것이 왕의 소원이었단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던 왕은, 결국 자신의 머리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

“그래서 왕은 궁중의 세공인을 불러 명한단다. 자신을 위해 반지를 하나 만들되, 반지 안쪽에 글귀를 써넣으라고.”

“글귀······.”


화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아하바가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 좌우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거였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고,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도 결코 좌절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그런 좌우명을 말이다.”

“······.”

“하지만 그 세공인도 마땅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았는지, 글귀를 채워넣는 대신 지혜롭다고 소문난 왕자를 찾아간단다. 그리고 그 왕자가 무어라 말하자, 세공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귀야말로 자신의 왕이 찾던 좌우명이라면서.”


아하바가 화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묻는 아하바.


“그 왕자가······. 무어라 말했을까? 네 생각이 궁금하구나.”


하지만 마땅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았던 세공인처럼,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음······.”


화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기자, 아하바가 잔잔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가득 담긴 그의 시선.


그 눈빛은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과 매우 닮아있었다.


그러나 생각에 몰두한 화는 이를 깨닫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하지만 화의 입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아하바가 입을 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싱그러운 바닷바람을 타고 하늘에 가득 울려퍼지는 그의 음성.

아하바가 말한 문장을 곰곰이 생각하던 화가 말했다.


“마법의 문장······이네요.”


정말 왕이 요구했던 대로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 문장의 뜻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즐거움의 순간들도.

영원할 것만 같은 어두운 순간들도, 모두 언젠가는 끝난다는 뜻이었으니까.


환호와 기쁨이 교만과 자만으로 변질되는 것을 저지하는 글귀이자, 감당할 수 없는 큰 시련 속에 놓이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도와주는 문구.


모든 상황에 적용이 가능한 마법과도 같은 구절.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하바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화도 그의 눈길을 따라 파도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하바가 말했다.


“살다보면, 지치고 지쳐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고통을 호소하는, 그런 순간이 있기 마련이란다. 큰 슬픔과 아픔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그런 시기 말이다.”

“······.”

“매일의 삶이 눈물로 이어질 때. 고단하고 피곤해 버틸 힘마저 소멸해갈 때······. 너 자신에게 스스로 되뇌이면 좋겠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는 화.

아하바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버티기가 힘들다면, 이 바닷가로 와 나를 찾거라.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주마. 나에게 너의 모든 아픔과 눈물, 그리고 속마음을 털어놓아라. 나는 이곳에서 너를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말이 화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되었던 탓일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그 후 또다시 얼마간 말이 없는 그들.


무언가를 생각하던 화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왕······. 이름이 뭐예요?”


아하바가 대답했다.


“다윗이란다.”


그때.


“화! 날이 늦었다! 어서 들어와라!”


언제 집에서 나왔는지, 저 멀리서 그들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류 철이 화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하바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은 채 그를 노려보는 류 철.


“당신······.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기어코 또 왔소?”

“······.”

“당신 때문에 지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피해를 보고 있는지 아시오? 그리고 우리 딸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접근한 거요!”


류 철이 으르렁거리자, 아버지의 처음 보는 사나운 태도에 놀란 화가 류 철의 팔을 붙잡았다.


“아, 아빠! 왜 그래요! 제, 제가 불렀어요!”

“······뭐?”


그러자 못 믿겠다는 듯 화와 아하바를 번갈아 바라보는 류 철.

허나 그녀의 말이 거짓인 거 같지는 않았는지, 류 철이 마지못해 말했다.


“······아무튼, 화 너도 저 사람과 너무 오래 있지 마! 위험하니까.”


류 철이 화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늦었다.”

“······.”


류 철에 억센 손에 끌려 엉거주춤 일어나는 화.

그녀가 아하바에게 살짝 인사했다.


그 순간.


쿠구구구구-


“······!”


또다시 세상이 진동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그들이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아하바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이미 한번 들은 적이 있는 음성.

화는 직감했다.

이제 자신이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아하바를 만나니.]


화가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잘 있어, 아빠. 다시 올게.”

“······?”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는 자라.]


쿠구구구구-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는 세계.


고개를 돌린 화가 인사했다.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아하바에게.


“······다시 올게요, 아하바님.”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팔을 흔드는 아하바.

그 모습을 끝으로 화의 기억은 끊겼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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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4) 24.06.24 33 1 12쪽
58 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3) 24.06.24 28 1 11쪽
57 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2) 24.06.21 37 1 17쪽
56 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1) 24.06.21 28 1 18쪽
»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6) 24.06.20 23 1 12쪽
54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5) 24.06.20 25 1 12쪽
53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4) 24.06.19 25 1 15쪽
52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3) 24.06.19 22 1 12쪽
51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2) 24.06.18 23 1 14쪽
50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1) 24.06.18 20 1 15쪽
49 향후 방향 공지 +2 24.06.17 49 1 2쪽
48 Ep 10. 미련함으로 지혜를 (3) 24.06.17 28 1 12쪽
47 Ep 10. 미련함으로 지혜를 (2) 24.06.14 27 1 15쪽
46 Ep 10. 미련함으로 지혜를 (1) 24.06.14 23 1 12쪽
45 Ep 9. 개화(開化) (4) 24.06.13 23 1 17쪽
44 Ep 9. 개화(開化) (3) 24.06.12 24 1 23쪽
43 Ep 9. 개화(開化) (2) 24.06.11 23 1 16쪽
42 Ep 9. 개화(開化) (1) 24.06.11 23 1 14쪽
41 Ep 8. 악을 선으로 (7) 24.06.10 27 1 11쪽
40 Ep 8. 악을 선으로 (6) 24.06.10 23 1 15쪽
39 Ep 8. 악을 선으로 (5) 24.06.10 24 1 18쪽
38 Ep 8. 악을 선으로 (4) 24.06.07 24 1 16쪽
37 Ep 8. 악을 선으로 (3) 24.06.07 21 1 17쪽
36 Ep 8. 악을 선으로 (2) 24.06.06 25 1 16쪽
35 Ep 8. 악을 선으로 (1) 24.06.06 23 1 14쪽
34 Ep 7. 작은 불꽃 하나가 (5) 24.06.05 24 1 15쪽
33 Ep 7. 작은 불꽃 하나가 (4) 24.06.05 20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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