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그러나, 고단한 삶에 지친 당신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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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드
작품등록일 :
2024.05.09 14:51
최근연재일 :
2024.06.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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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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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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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3)

DUMMY

하이로드의 저택, 화의 방.

방문을 열고 들어온 화가 침대에 몸을 힘없이 던졌다.


털썩-


매트리스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는 그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어떻게 하면 그 정도의 신뢰가 쌓일 수 있는 걸까.”


- 데우스님께서 자신들을 위험에서 반드시 건져내실 것이라는 믿음. 그들에게는 이 귀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끝까지 데우스님만을 붙들 것임을 고백했다. 실로 대단한 고백이지.


방으로 걸어오며 거듭 생각했었다.


과연 자신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그들의 ‘절대적인 신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화는 줄곧 고민했었다.


하지만 데우스는 고사하고 비블리온도 잘 몰랐던 그녀가 이를 생각해낼 리는 만무했고.


그 긴 고심 끝에 남은 것이라곤 오직 짙은 의구심과 답답함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난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문득 이런 자신에게 실망한 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철컥- 끼이이익-


“······?”


방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오셨어요? 아가씨.”

“······!”


성숙하고도 상냥한 목소리.

가니였다.


“외출은 어떠셨나요? 즐거우셨나요?”

“······.”


가니가 방을 정리하며 가볍게 묻자, 어느새 몸을 일으킨 화도 그녀에게 웃음으로 화답해주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뮐러와. 그리고 아하바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도통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 문지르는 그녀.


그런 화를 힐끗힐끗 쳐다보던 가니가 결국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스타디움에서.”

“······!"


그러자 화들짝 놀란 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


속내를 들키기 싫어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피우는 화였으나, 이를 모를 가니가 아니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화에게 공손하게 묻는 가니.


“······옆에 앉아도 될까요?”


화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가니가 그녀의 곁에 슬며시 앉으며 입을 열었다.


“말씀해보셔요.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


그러나 화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말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를걸.”

“그건 들어봐야 알겠죠?”


화를 빤히 쳐다보는 가니.

그 총명함이 가득한 눈빛에 순간 혹한 것일까.


화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니,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 알아?”


그 말에 가니가 싱긋 웃었다.


“······글쎄요?”

“거봐. 내가 모를 거라고 했잖아.”


그 애매모호한 대답에 김이 샌 화가 퉁명스레 대꾸했으나, 뒤이어 들려온 가니의 차분한 음성에 그녀의 입은 꾹 닫혔다.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끝없는 기다림의 땅에 갇혔던 사람이었죠.”

“······?”

“그 사내는 데우스님께서 차기 왕으로 점찍으신 자였어요. 데우스님께서는 그에게 왕위를 약속하셨고, 사내 또한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그 당시의 왕은 데우스님의 총애를 받는 그 사내를 시기했죠. 그래서 그를 죽이려 들었어요. 덕분에 사내는 자그마치 십 년 동안 광야를 누비며 도망쳐다녀야 했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왕위를 약속하셨던 데우스님의 크나큰 계획을 신뢰하며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그 험난하고도 고된 광야 생활을 견디며 겪었을 사내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듯, 가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깊고도 깊은 자줏빛의 눈동자를 깜빡이며 다시 입을 여는 가니.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십 년이 지난 후, 사내를 도망자로 만들었던 왕이 마침내 죽습니다.”

“······!”

“그러자······. 사내가 물어요.”

"······?”

“그 후에 그가 데우스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데우스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그가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가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문장들.

그 예상치 못한 구절에 크게 놀란 화가 입을 틀어막고 가니를 쳐다보았다.


‘비, 비블리온? 가니도 인간이었어?’


화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으나,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니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자그마치 십 년을 기다렸고. 십 년을 광야에서 훈련받았으며, 십 년을 오직 데우스님만 바라본 그에게······. 데우스님께서는 그 나라의 수도가 아닌, 지방의 조그만 도시 헤브론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


화를 따스하게 쳐다보며 묻는 가니.


“사내는 묻고 싶지 않았을까요?”

“······?”

“십 년을 기다렸는데.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인내하며 참았는데······. 왜 ‘아직이다’라고 말씀하시는지. 왜 더 기다리라고만 하시는지 말이에요.”

“······.”

“하지만, 그는 ‘아직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헤브론에서. 그 기다림의 땅에서, 또다시 칠 년 육 개월을 인내하며 ‘왜’가 아닌 한 편의 시를 써내려갑니다.”

“······?”


시.


그 낮설고도 익숙한 단어에 숨을 죽이고 듣던 화가 가니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서 그 시를 읊기를 기다리며.


이에 가니도 옅은 미소를 지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자······.


“데우스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데우스를 향한 사내의 무한한 사랑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主)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자신의 신을 향한 사내의 굳건한 믿음과 신뢰가, 가니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실내를 가득 채우는 가니의 힘있고도 고요한 목소리.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니가 말했다.

마치 데우스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데우스님께서 사내의 그러한 고백을 들으셨을 때······. 얼마나 기쁘셨겠어요? 그리고 그 사내를 얼마나 어여삐 여기셨을지 짐작이 가시나요? 멀게만 보이는 데우스님과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는 그 사내를 말이에요.”

“······.”

“그래서일까요? 그 후 채 십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사내는 결국 왕국 수도에 입성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왕으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그리고 데우스님께서는, 그런 그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옅은 미소와 함께 속삭이듯 말하는 가니.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 근데 그 왕······. 이름이 뭐예요?

- 다윗이란다.


“······!”


다윗.


아하바가 말했던 그 왕과 사내의 이름이 정확히 일치했던 까닭일까.


화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자, 가니가 싱긋 웃고는 말했다.

화의 무릎에 그녀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으며.


“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설사 내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지라도, 내가 꿈꿨던 계획보다 더 크고 놀라운 뜻을 계획하시는 데우스님을. ‘나무’가 아닌 ‘숲’을 보시는 데우스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인내하는 것. 이것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가 아닐까요?”


그 말을 끝으로 가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나, 너무 당황하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 하던가.


말문이 막힌 화가 그녀를 멍청하게 바라보자, 가니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늦었네요, 아가씨. 주무셔요. 내일 다시 올게요.”


끼이이익- 쿵-


“가니도······. 인간이었어?”


굳게 닫힌 방문을 망연하게 쳐다보는 화.

아마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화가 넋을 잃고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사아아아-


스산한 소리와 함께, 지금 들려와서는 안 되는 음성이 방에 울려퍼졌다.


“가니라······. 그놈도 인간인 거 같군.”

“······!”


그녀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 잘생긴 음성에 화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


그러자.


“다, 당신······!”


무엇을 본 것일까.


화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다, 당신이 어떻게!"


그곳에는······.


자신이 있었다.

주황빛 동공을 번뜩이며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는 스트라토스가.


“왜? 내가 현실에 구현된 게 이상하나?”

“······.”


높낮이 없는 스트라토스의 어조.

그 대꾸에 기가 막힌 화가 입을 뻐끔거렸다.


‘지, 지금 말이라고······!’


그녀가 곧바로 입을 열었으나, 스트라토스는 화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현실로 나-”

“끔찍이도 좋아하더군.”

“······?”

“네 무의식 속에 발현된 세계 말이다.”


무의식 속에 발현된 세계.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던 화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또 어떻게······!”


그러자 스트라토스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네 무의식 속에 깃든 이상, 넌 나고 난 너라고. 덕분에 치가 떨릴 정도로 느꼈다. 네놈의 그 같잖은 가족애 말이다.”

“······.”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네 아비와 어미를 어찌나 그리워하던지. 보는 내가 다 딱해서 말이야.”

“······!”


짐짓 슬픈 표정을 짓고는 화를 힐끗 흘겨보는 스트라토스.

그러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꾹 쥐었다.

아마 빈정거리는 그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큰 모욕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터.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던 화가 차갑게 내뱉었다.


“가족애를 ‘같잖은’과 ‘치가 떨릴 정도’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을 보니, 당신에게 부모라는 존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짐작이 가네요.”

“······!”

“당신은 모르겠죠. 그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아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라요. 당신은 사랑과 애정이 결핍된 가정에서 자랐을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을 앙다문 화가 스트라토스를 쏘아보자, 스트라토스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호오······. 마냥 여리기만 한 핏덩이인 줄 알았더니, 나름의 강단과 패기까지. 이거 탐나는군.’


결국 두 손을 드는 스트라토스.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난 단지 네가 아비와 어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 했을 뿐, 네 아픈 손가락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만약 내 말이 거슬렸다면 사과하지.”

“······.”


스트라토스의 말투에 진심이 그리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화가 대꾸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자, 스트라토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

“앞으로 네 가족들을 원없이 볼 수 있을 거다. 네가 원할 때마다 말이야.”

“······?”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네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 그 무의식 속의 세계. 그 세상을 이제는 네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을 거다. 그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네 손에 있으니까. 어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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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3) 24.06.24 27 1 11쪽
57 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2) 24.06.21 35 1 17쪽
56 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1) 24.06.21 26 1 18쪽
55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6) 24.06.20 21 1 12쪽
54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5) 24.06.20 23 1 12쪽
53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4) 24.06.19 23 1 15쪽
52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3) 24.06.19 21 1 12쪽
51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2) 24.06.18 21 1 14쪽
50 Ep 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1) 24.06.18 19 1 15쪽
49 향후 방향 공지 +2 24.06.17 47 1 2쪽
48 Ep 10. 미련함으로 지혜를 (3) 24.06.17 25 1 12쪽
47 Ep 10. 미련함으로 지혜를 (2) 24.06.14 20 1 15쪽
46 Ep 10. 미련함으로 지혜를 (1) 24.06.14 18 1 12쪽
45 Ep 9. 개화(開化) (4) 24.06.13 20 1 17쪽
44 Ep 9. 개화(開化) (3) 24.06.12 22 1 23쪽
43 Ep 9. 개화(開化) (2) 24.06.11 22 1 16쪽
42 Ep 9. 개화(開化) (1) 24.06.11 21 1 14쪽
41 Ep 8. 악을 선으로 (7) 24.06.10 23 1 11쪽
40 Ep 8. 악을 선으로 (6) 24.06.10 21 1 15쪽
39 Ep 8. 악을 선으로 (5) 24.06.10 21 1 18쪽
38 Ep 8. 악을 선으로 (4) 24.06.07 20 1 16쪽
37 Ep 8. 악을 선으로 (3) 24.06.07 19 1 17쪽
36 Ep 8. 악을 선으로 (2) 24.06.06 23 1 16쪽
35 Ep 8. 악을 선으로 (1) 24.06.06 22 1 14쪽
34 Ep 7. 작은 불꽃 하나가 (5) 24.06.05 22 1 15쪽
33 Ep 7. 작은 불꽃 하나가 (4) 24.06.05 19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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