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모든 것이 협력하여 (4)

그 말을 끝으로 스트라토스가 뒷짐을 지며 화를 쳐다보았지만, 화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허나, 그 찰나의 순간에 화의 입꼬리가 실룩이는 것을 본 탓일까.
입가에 미소를 띤 스트라토스가 지나가듯 말했다.
“네가 그 세계를 그리워하는 거 같아 내가 디안나에게 특별히 부탁했지. 네가 원할 때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
그럼에도 화의 무반응이 계속되자, 결국 스트라토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상하군. 분명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느낀 그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거짓은 아니었을 터.”
그녀를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던 스트라토스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닫자, 실내는 얼마간 적막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길 얼마.
줄곧 말이 없던 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
그 질문에 스트라토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곧바로 손가락을 튕기는 스트라토스.
딱-
그러자.
사아아아-
불길한 소리와 함께 그에게서 뿜어져나온 검은 연기가 방을 서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검은 안개가 주변을 모두 집어삼켰을 때.
그들은 완전한 흑암 속에 있었다.
마치 화가 스트라토스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그래서일까.
화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본인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화가 이를 깨닫기 무섭게, 스트라토스가 턱으로 그녀의 손을 가리켰다.
이에 화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하자, 새끼손가락에 박힌 조그만 자줏빛 가시가 보였다.
‘······뭐지?’
불안한 눈으로 그 가시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그녀.
스트라토스가 말했다.
“뽑아라.”
“······?”
“그 가시는 현실과 네 무의식을 이어주는 일종의 연결고리이자 열쇠. 만약 그 가시가 뽑힌다면, 너는 앞으로 현실에서 평생을 살아갈 거다. 대신 다시는 가족들과 조우할 수 없게 되겠지.”
“······!”
“그러나 가시를 받아들이고 뽑지 않는다면······. 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까지. 네가 그리워하던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거다. 그것도 네가 원할 때 언제든지 말이야. 그러니 택하라. 결정은 네 몫이니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라면 제거보다는 타협을 선택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스트라토스가 더 이상 말이 없자, 화가 가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대체 왜······.’
그의 말을 들어봤을 때, 분명 귀가 솔깃한 제안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의심스러웠다.
저자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의도를 가졌기에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무슨 목적이 있길래 이리도 잘해주는 것인지······.
그녀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너무 위험해.’
결국, 가시로 손을 가져가는 화.
그러나.
- 얘, 갑자기 쓰러져서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
순간 어머니의 음성이.
- 버티기가 힘들다면, 이 바닷가로 와 나를 찾거라.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주마. 나에게 너의 모든 아픔과 눈물, 그리고 속마음을 털어놓아라. 나는 이곳에서 너를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
“······.”
아하바의 온화하고도 따스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지자······.
화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차마 가시를 뽑지 못하고 입술을 악무는 그녀.
화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스트라토스가 씩 웃었다.
“뽑지 않을 건가? 난 네게 분명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얼마간 망설이던 그녀가 작게 물었다.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하나, 그 강도는 눈에 띄게 약해진 목소리였다.
“제가 그 세계를 얻는 대가로······. 당신이 얻는 건 뭐죠?”
스트라토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화.
하지만 그는 무덤덤했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내가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정도 외에는 없을 거다. 약속하지.”
“······?”
“네게 박힌 그 가시 덕에 네가 현실에서 무의식으로 진입할 수 있으니, 그 반대로 무의식에서 현실로의 이동 또한 가능할 터.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도 무의식에서 현실로 잠시 이동한 결과니까.”
“······!”
“다만 그간 그 통로를 안정화시키느라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앞으로는 언제든지 현실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거다. 마치 네가 허상 속 세계에 언제든지 난입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말에 화가 조그맣게 중얼거렸으나.
“그럼······. 가니한테는 내가 두 명으로 보이겠네.”
스트라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난 그저 현실에 ‘구현’된 것에 지나지 않은 상태. 즉 ‘실체화’된 게 아니기 때문에, 너를 제외한 자들에게는 보이지도, 그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없을 거다.”
“······.”
계속되는 그의 설명에 마음이 조금씩 기운 탓일까.
화의 얼굴이 눈에 띄게 복잡해지자, 스트라토스가 쐐기를 박았다.
“못 믿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주인이신 광기의 드래곤, 바르바토스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도 있다. 그분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약이니만큼 이를 어기는 즉시 난 소멸할 터. 어떤가? 이제 좀 구미가 당기나?”
그 말에 마침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그녀.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사랑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세계로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달콤하고도 매력적인 제안.
스트라토스의 말로 보아 감수해야 하는 위험에 비해 얻는 것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계약이었다.
게다가 그곳에서 아하바까지 만날 수 있으니······
‘어떡하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그녀.
스트라토스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듯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다만, 네가 현실이 아닌 무의식에 있을 때만큼은 내가 네 몸을 통제해야만 한다.”
“······?”
“네가 무의식으로 들어간다는 건, 네 몸을 통제하던 자아가 잠시 사라진다는 뜻. 즉, 그 시기만큼은 네 몸을 제어할 의지가 없으니 네 육체는 망자의 몸과 다름없어지겠지.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너도 잘 알 터.”
“······!”
“만약 그 틈을 타 누군가가 네 몸에 무언의 의지를 집어넣기라도 한다면, 넌 그대로 꼭두각시가 되어버릴 거다. 그러니 그때만큼은 내가 네 몸을 제어할 수밖에.”
어떤 악의나 거짓은 찾아볼 수 없는 말투.
하지만 그것만큼은 극렬한 거부감이 들었던 탓일까.
화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
그러자 스트라토스가 잠시 멈칫하고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설마 내가 네게 몹쓸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난 네게는 관심 따위 없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화의 태도가 변함없자, 스트라토스가 진중하게 물었다.
“뭐······. 난 상관없지만, 정말 괜찮겠나?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과 다름없을 텐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화는 확고했고.
“괜찮아요. 그 시간에는 가니에게 부탁해서 보살펴달라고 말하면 되니까요.”
결국 스트라토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택이니 존중해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때 벌어진 일들은 모두 네 책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그 말을 끝으로 스트라토스가 뒷짐을 풀었으나, 뒤이어 들려온 화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맹세하세요.”
“······?”
“바르바토스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다고 했죠? 제가 그 세계에 있을 때, 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지금 맹세해주세요. 저는······. 확실하게 하고 싶어요.”
“······.”
스트라토스를 빤히 쳐다보는 화.
고집스레 입을 다문 그녀를 그가 가만히 노려보았다.
‘······집요하군.’
결국 입을 여는 스트라토스.
말루스가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키이이이잉-
[나, 스트라토스는 류 화의 몸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위대하신 나의 주인, 광기의 드래곤 바르바토스님의 이름으로!]
허공에 울려퍼지는 스트라토스의 목소리.
그러자 그에게서 옅게 뿜어져 나온 말루스가 순간 스트라토스를 감싸는 듯하더니, 이내 작게 부서지며 사라졌다.
잠시 심호흡을 한 후, 화를 나른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스트라토스.
“······됐나?”
이에 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트라토스가 중얼거렸다.
다시 손가락을 튕기며.
“이제 볼일은 끝났군.”
딱-
그러자 그들을 둘러싼 흑암이 빠른 속도로 걷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익숙한 공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탓일까.
화가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제가 그 세상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말해줘야죠!”
그러자 그녀에게 속삭이듯 들려오는 스트라토스의 음성을 마지막으로, 화는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감고 네 마을을 떠올려라. 그럼 자연스레 그곳에 들어가 있을 거다.”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
화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허나 그녀의 방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를 맞이하자, 화가 다시 침대에 몸을 묻었다.
‘내가······. 잘한 게 맞을까.’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들지 않았는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그녀.
그렇게 얼마간 고민하던 화는 결국 눈을 감았다.
‘······지금 해보자. 마을을 생각하라고 했었지.’
천천히 심호흡하는 그녀.
화는 떠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매일 보았던, 그립고도 아련한 자신의 마을을.
그렇게 마을의 정경을 떠올리길 얼마.
쏴아아-
끼룩- 끼룩-
“······!”
그녀의 귀로 익숙한 소리들이 들려오자, 화가 슬며시 눈을 떴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는 그녀.
화의 눈이 주위를 찬찬히 쓸었다.
‘······거짓이 아니었어.’
자신을 맞이하는 하늘과 바다가 보였다.
자신이 질릴 정도로 보았던, 친근하고도 푸르른 바다가.
그때.
“화니?”
“괜찮아?”
“기절해서 집에서 쉬고 있다더니, 밖으로는 어떻게 나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음성들이 들려오자, 화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친구들.
화가 그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지은 채 작게 중얼거리며.
“애들아. 나······. 다시 왔어.”
*
그 후.
두 달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화는 별일이 없으면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시간을 보냈고.
그녀의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 화를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았던 화 역시 매일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언제나 자신을 반겨주는 아하바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허나, 그녀는 그 세계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그 세계에서 유일하게 허상이 아닌 것만 같은 자, 아하바와 함께하는 나날이 점차 많아져갔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화는 이제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올 때 가족들보다 아하바를 먼저 찾게 되었다.
덕분에 그녀의 가족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아하바를 달갑지 않아 했지만, 화가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무어라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가까워질수록.
화와 아하바 사이의 유대가 깊어질수록, 아하바는 그녀에게 어떤 특별하고도 고유한 존재가 되어갔다.
이제는 그가 없는 마을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단순히 ‘친구’를 넘어선 소중하고도 중요한 어떤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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