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대마도 정벌에 나서는 이방원, 햇병아리 임금의 자괴감

기해년(1419년) 음력 5월 14일이었다. 주상은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수강궁으로 향하는 가마를 재촉했다.
“서두르라!”
주상이 수강궁 상왕전에 도착했을 땐, 이미 조정 중신들이 도열해 있었다. 주상이 상왕(이방원) 곁에 앉자, 상왕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대마도를 칠 것이니, 그대들은 따르라!”
상왕은 왜구의 노략질을 멈추게 할 유일한 방법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조선 개국 이래 왜구는 남해와 서해의 해안가를 제집 드나들 듯 하며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비록 그 기세가 고려 말의 상황엔 미치진 못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기엔 피해가 너무 심각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황해도와 충청도에서는 조선 수군의 전함이 왜선 수십 척의 공격을 받아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상왕은 더 이상 왜구를 묵과했다간 또 다시 고려 말과 같은 혼란이 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구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다시 전조(고려왕조)의 혼란상을 겪을 터, 이번에는 아예 왜구의 싹을 잘라 놓아야 할 것이다.”
상왕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왜구를 단절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사실, 왜구는 조선 뿐 아니라 상국 명나라에서도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왜구가 골칫거리가 된 것은 고려 조 공민왕 시절부터였다. 당시 중국은 홍건적이 일어나 원나라를 무너뜨렸고, 고려도 원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원나라군과 홍건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처지에 놓여 한 때는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왜구는 이런 혼란을 틈타 중국 해안가를 약탈하면서 동시에 고려를 침략했다. 하지만 원나라와 홍건적이라는 양대 세력을 상대하던 고려는 왜구의 침탈에 속수무책이었다. 왜구는 그 기세를 몰아 공민왕 재위 23년 동안 115회나 침략하였고, 이후 우왕 시절에는 더욱 기승을 부려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침략하였다.
왜구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선단이 500척이 넘고 병력도 1만을 넘었다. 그들은 단순히 재물을 약탈하는 수준을 넘어 중국과 고려의 백성들을 수천 명이나 잡아갔다.
하지만 홍건적의 우두머리 주원장이 원을 무너뜨리고 명을 세운 뒤부터 왜구의 기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중국과 고려에서 전쟁이 끝난 탓에 더 이상 왜구의 침탈을 두고 보지 않았던 까닭이다. 심지어 명나라는 고려 조정에다 왜구를 엄금하지 않으면 고려와 왜가 연합하여 명을 침범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고려가 알아서 왜구를 섬멸하지 않으면 고려와 왜를 모두 적국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고려를 공격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자, 고려는 명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왜구 소탕전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왜구 소탕전은 우왕 재위 2년(1376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후 최영의 홍산대첩, 최무선의 진포해전, 이성계의 황산대첩, 정지의 관음포대첩 등에서 대승을 거뒀고, 급기야 창왕 재위 1년(1389년) 2월에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에 대한 정벌을 감행했다. 이때 대마도 정벌을 이끈 인물은 박위였다. 당시 경상도 원수였던 박위는 함선 일백 여 척에 정예병 1만을 이끌고 대마도에 상륙하여 적선 300여 척을 불사르고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한 뒤, 돌아왔다.
박위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는 한 동안 힘을 잃고 더 이상 준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 사이 다시 기세를 회복하여 노략질을 재개했다. 심지어 태조 재위 5년(1396년)엔 왜선 120척이 경상도에 몰려와 동래, 기장, 동평성 등을 함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수군만호 이춘수가 죽고 병선 16척이 탈취당하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통양포에서 병선 9척을 빼앗기고, 영해성(경북 영덕)이 함락되었으며, 동래성이 포위되어 병선 21척이 소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태조 이성계는 우정승 김사형을 오도병마도통처치사로 삼아 대마도 정벌을 감행했다. 김사형은 35일 동안 대마도는 물론이고 일기도까지 전함을 이끌고 가서 왜구를 소탕했다.
김사형의 2차 대마도정벌 후 왜구는 한동안 잠잠해졌다가 세월이 흐르자 다시 몇 년 전부터 부쩍 기세가 되살아나 해안가를 침탈해오고 있었다. 상왕은 왜구의 특성상 강력하게 응징하지 않으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아예 왜구의 본거지를 공략하는 강수를 구사하려 했다.
“지금 왜구의 주력부대는 대마도를 비워둔 채 중국 해안가를 노략질하기에 여념 없다. 이 때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친다면 저들은 둥지 잃은 철새 신세가 될 것이다. 이는 곧 집 잃은 왜구 본진을 해상에서 일망타진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조선 조정은 상왕의 계획에 따라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정벌대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나흘 뒤, 상왕과 주상은 직접 두모포(서울 옥수동에 있던 포구) 백사정까지 거둥해 장수들을 전송했다. 그 자리에서 상왕은 엄중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승전해서 돌아오면 상을 줄 것이며, 패전하면 목을 칠 것이다!”
그런 말로 이종무와 9명의 절제사를 거제도로 내려 보낸 상왕이 돌아오는 길에 주상에게 물었다.
“주상이 왕위에 오른 뒤에 처음으로 가진 출정식이었는데, 지켜본 소회가 어떠하냐?”
“얼떨떨하고 긴장되옵니다.”
“자고로 왕의 손이란 항상 상과 칼을 함께 쥐고 있어야 한다. 칼만 쥐고 상을 주지 않는다면 앞에선 두려움 때문에 복종하지만 뒤에서는 그 두려움 때문에 되레 왕을 죽이려 할 것이고, 상만 주고 칼을 쥐고 있지 않다면 앞에서는 우쭐대기만 하고 뒤에서는 왕을 업신여기며 상이 적다고 불만만 늘어놓게 된다. 하지만 왕이 한 손에 상을 쥐고 한손에 칼을 쥐고 있으면 신하는 적은 상을 받아도 왕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그러니 주상은 이를 마음에 잘 새겨 내가 간 뒤에도 잊지 않도록 하라.”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주상은 내심 부왕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왕의 말은 곧 힘으로 신하와 백성을 지배하는 패도의 정치를 의미했다. 주상은 창덕궁에 돌아온 뒤로 한동안 편전에 홀로 앉아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바님의 패도정치는 피와 원한을 부르는 살육의 정치다. 살육의 정치로는 결코 태평성대를 열 수 없다. 태평성대를 열기 위해서는 사람을 살리는 활인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
하지만 주상은 아직까지 활인의 정치를 펼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활인의 정치를 펼칠 방도는 무엇인가?”
주상이 이 물음에 골몰한 지도 벌써 삼년 째였다.
“활인의 길을 택하겠습니까, 살인의 길을 택하겠습니까?”
그렇게 묻던 탄선의 음성이 되살아났다. 그때부터 주상은 만약 자신이 왕이 된다면 반드시 활인의 정치를 펼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활인의 길을 펼칠 구체적인 방도를 찾지 못했다. 특히 국방에 관한한 주상은 그야말로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나흘 전에 아군이 전함에 싣고 있던 쌀 45석을 왜구에게 내줬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상은 어리석게도 이런 말을 하고 말았다.
“각도와 각 포구에 비록 병선은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방어가 허술하여, 혹 뜻밖의 변을 당하면, 적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환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아예 전함을 두는 것을 폐지하고 육지만을 지키고자 한다.”
주상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나름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계책이라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번에 대마도 정벌대장으로 간 판부사 이종무는 우려 섞인 음성으로 전함 폐지는 안 될 말이라면 강력하게 반대했다.
“우리나라는 바다에 접해 있으니,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전함이 없으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종무의 말에 호조참판 이지강이 한 마디 더 보탰다.
“고려 말년에 왜적이 침노하여 경기까지 이르렀으나, 전함을 둔 후에야 국가가 편안하였고, 백성이 안도하였나이다.”
하지만 주상은 그 말에도 어리석은 아집을 드러냈다.
“우리 군대가 병선 5척으로 적에게 포위당하고, 실었던 쌀 45석을 주었다는데, 이것은 결코 좋은 계책이 아니었다. 그저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쌀을 내준 것이 아니겠는가?”
주상의 말인즉, 병선이 있다 한들 더 많은 병선을 가진 왜구를 만나면 겁을 먹고 쌀을 뺏길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에둘러 말한 것이지만, 전함이 있어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항변이었다.
주상의 이런 견해에 대해서도 신하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5척의 병선으로 38척을 가진 적에게 포위당하였으니, 싸우면 패할 것이므로, 쌀을 주어 일단 안심하게 한 뒤에 원병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는 결코 틀린 계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주상은 전함을 폐지해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이 만일 병선이 많이 모일 것을 알면, 병선이 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급히 쳐 올 것이니, 이것이 실로 염려되는 바이다.”
그러자 이종무를 비롯한 신하들이 더 이상 가타부타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신하들은 그날 바로 수강궁의 상왕에게 몰려가 왜구를 퇴치할 방도를 의논했고, 의논 끝에 나온 결론이 바로 대마도 정벌이었다.
주상은 화끈대는 얼굴로 대마도 정벌을 논의하던 자리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앉아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부왕의 입에서 대마도를 정벌하겠다는 용단이 떨어졌을 때, 주상은 혹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닌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또한 부왕의 결단에 동조하는 신하들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주상은 신하들이 부왕을 추종하는 것은 그저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주상은 신하들이 부왕을 추종하는 것이 결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부왕은 그들에게 두려움만 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왕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부왕이 능히 자신들을 제대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동안 주상은 부왕에 대해 반쪽만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주상은 자문자답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신하들에게 주상은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한낱 책상물림일 뿐이었다. 양녕이 쫓겨난 덕에 하루아침에 세자의 자리에 올랐고, 세자 생활 두 달 만에 왕위까지 넘겨받았지만, 그는 아직 즉위한 지 9개월 밖에 안 된 햇병아리 임금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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