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주치의, 노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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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산
작품등록일 :
2024.05.1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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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0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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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호랑이굴에서 만난 원수

DUMMY


중례도 새벽부터 서둘러 활인원을 나선 탓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거기다 워낙 술이 약한 탓에 한 잔 남짓 마신 술기운까지 겹쳐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중례가 앉은 자리에 쓰러져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떠보니, 오희묵이었다.

“자네도 나처럼 잠이 든 게로군. 오랜만에 낮술을 마셨더니 졸음이 닥쳐 그만 헛간에서 잠이 들고 말았지 뭔가. 그 사이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네. 자네가 왔다 했더니 데려 오라 하시네. 어서 같이 가세.”




중례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오희묵을 따라 나섰다.

“자네가 서활인원 의원으로 있다는 노가인가?”

오치수는 목을 앞으로 뽑은 채 중례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더니 그렇게 입을 뗐다. 유달리 얇고 검붉은 오치수의 입술에서 약간의 쇳소리가 묻어나자, 중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바로 네 놈이었구나. 네 놈이 바로 아버지께 살인 누명을 씌우고, 아버지를 살해한 놈이구나.’

중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노가 중례라고 하옵니다.”

“내 자네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네. 의술이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온 김에 나도 맥이나 한 번 짚어주게. 요즘은 잠자다가 자주 깨는데, 한 번 깨고 나면 도통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네.”

오치수는 손바닥으로 목을 탁탁 치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중례는 오치수의 맥을 짚어보았다. 오치수는 이미 오십 줄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면 몇 가지 병은 달고 살 나이였다. 하지만 오치수의 맥은 활발했다. 얼굴에서도 특별히 병증이 드러나지 않았다.

‘죄 많은 놈이 오래 산다더니...’




중례의 뇌리엔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면서 제발 오래 살아달라고 빌었다. 기필코 죄값을 치르게 해 줄 것이라는 다짐도 하였다.

“아주 강건하십니다. 맥으로만 본다면 이십 대 청년의 몸이십니다.”

“그런가?”

오치수는 피식 웃었다. 사실, 잠을 설친다는 말도 꾸며낸 말이었다. 그저 노중례를 시험해 본 것뿐이었다.

“참, 정재술 대감은 무슨 병이라 했지?”

“적취와 수종이 겹친 것이옵니다.”

“듣자 하니, 얼마 더 살지 못하신다 하던데, 맞는 말인가?”

“소인의 의술이 아직 미천하여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건강을 회복하긴 쉽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혹 적취에 탁월한 신의(神醫)를 만난다면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오치수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피식 웃었다. 사흘 전에 정재술을 문병했을 땐,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도 못 알아보고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 눈만 뜬 채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는 처지였다. 정재술의 집을 나오면서 오치수는 늦어도 보름 안에는 부고가 올 것이라 짐작했다.

“알아보니, 자네는 오작인 신분이라 하던데, 어떻게 의술을 익혔는가? 혹 문자를 아는가?”

“네, 소싯적에 어깨 너머로 조금 배웠습니다.”

“어깨 너머로 글을 배워 의술을 익혔다? 자네, 머리가 비상한가 보군.”

“아닙니다. 그저 ...”




중례는 자기도 모르게 음성이 떨렸다. 오치수는 이미 중례에 대해 여러 모로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집안 내력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소름이 돋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쨌든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나도 답례를 하고 싶네. 혹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사례를 받았습니다.”

“그런가? 알았네. 혹 후에라도 내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찾아오게.”

그 말을 끝으로 중례는 오치수의 방에서 물러났다. 오희묵은 아버지의 특별한 명이 있었다며 중례를 자신의 사랑채에 머물게 했다.

“아버지께서 자네를 아주 좋게 보셨어. 굳이 내 사랑채를 자네에게 내주라 하셨네. 물론 아버지 당부가 없었더라도 나는 당연히 자네에게 사랑채를 내줄 심산이었네. 내 목숨의 은인을 어떻게 머슴들과 함께 행랑채에 재우겠는가?”




하지만 중례는 오희묵의 사랑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오치수의 집에 들어올 땐 호랑이를 때려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온다는 심사였지만, 막상 호랑이굴로 들어오니, 몸이 떨리고 마음이 불안했다. 혹여 자고 나면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여있을 것만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다.”

중례는 오치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한낱 책방 출신의 장사치가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다. 그래서 기껏 정충석의 수하 노릇이나 하며 시전이나 관리할 정도의 위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오치수를 만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정재술을 만났을 때도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는데, 오치수는 음성만 들어도 온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두려움은 정충석을 만났을 때와는 또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정충석은 온 몸으로 ‘나는 악인이다’ 하고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라면 오치수는 어느 구석에서도 악인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놈이었다. 빈틈없고 철두철미한 성품에 전혀 속을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려운 놈이었다.




중례는 다음 날 좌군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잠을 자야 했지만, 눈만 감으면 오치수의 차가운 입술과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벽녘까지 뒤척이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결코 깊은 잠은 자지 못했다. 그저 악몽에 악몽이 거듭되는 선잠을 자다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야 했다.

오희묵이었다.

“아버지께서 아침을 함께 하자고 하시네.”

놀랍게도 오치수는 겸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아들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데,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네. 국 식기 전에 어서 들게.”




간밤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인자함이 오치수의 얼굴에 흘러넘쳤다. 그 바람에 중례는 더욱 긴장하였다. 그 인자함 뒤에 숨어 있는 발톱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형제는 없는가?”

중례가 얼떨떨한 기분에 정신없이 수저를 놀려 밥을 반쯤 비웠을 때, 오치수가 느닷없이 물었다.

“네, 누이 하나가 있습니다.”

중례는 재희의 존재만 밝히고 상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혹여 상례까지 거론하면 오치수가 아버지 노상직과 연관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가?”




오치수는 인자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는 어느 관아에 있는가?”

“서활인원에 함께 있습니다.”

“오호, 다행이로세. 오누이가 의지가지가 되겠어.”

오치수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중례는 등줄기가 서늘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치수는 더 캐묻지는 않았다.




“어서 들게. 거제도까지 가자면 수일은 걸릴 텐데, 속을 든든하게 채우게.”

중례는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웠다. 하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중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기 국 한 그릇하고 밥 한 그릇 더 들이게.”

중례가 반찬은 제쳐놓고 국과 밥을 번갈아 떠먹으며 바쁘게 밥그릇을 비우자, 오치수는 이내 국과 밥을 더 들였다.

“이미 배가 찼습니다.”

“그래도 먼 길을 가는데, 그 정도 먹어서야 되겠는가? 사양하지 말게.”

“아, 네...”




중례는 다시 바쁜 손놀림으로 국과 밥을 비워야 했다.

“이렇듯 진수성찬을 대접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중례가 그런 인사치레를 건네자, 오치수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물고 말했다.

“거제도에서 돌아오면 또 한 번 오게. 그땐 미리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 잔칫상을 벌여놓겠네.”

“아, 아닙니다. 저 같은 천것이 오늘 대행수님과 겸상을 한 것만 해도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잔칫상이 웬 말씀입니까요.”

“허허, 그럼 잘 갔다 오게. 그 동안 자네 누이는 걱정 말게. 내 사람을 시켜 자네 누이를 잘 돌보겠네.”

“예? 아니,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중례는 섬뜩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이놈이 재희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나 싶었다. 마치 재희를 인질로 삼겠다는 소리 같았다.

“자네가 내 아들을 구해줬는데, 내가 자네의 누이를 돌보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허허허..”

중례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진 채로 오치수의 집을 빠져나왔다. 오치수의 솟을대문을 나와 계단을 내려서자, 중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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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제64화 문자 창제를 결심하는 주상 24.07.02 30 0 11쪽
63 제63화 온갖 병으로 시달리는 임금 24.07.01 53 0 15쪽
62 제62화 오치수의 몰락 24.06.30 33 0 10쪽
61 제61화 늙은 호랑이 사냥 24.06.29 29 0 12쪽
60 제 60화 마침내 형틀에 묶인 오치수 24.06.28 51 0 10쪽
59 제59화 스승 탄선의 유언 그리고 그들의 결합 24.06.27 44 0 11쪽
58 제58화 도성에 몰아닥친 역병 24.06.26 43 0 10쪽
57 제57화 이방원의 죽음을 지켜보는 소비 24.06.25 36 0 16쪽
56 제56화 나의 후궁이 되어 주겠느냐? 24.06.24 39 0 9쪽
55 제55화 소비의 신비로운 침술 24.06.21 41 0 12쪽
54 제54화 양녕의 병을 치료하고 임금의 신임을 얻은 노중례 24.06.20 41 0 12쪽
53 제53화 마침내 확인된 아버지의 결백 24.06.19 59 1 9쪽
52 제52화 결정적인 증인 24.06.18 39 0 14쪽
51 제51화 일망타진 24.06.17 42 1 8쪽
50 제50화 쥐도 새도 모르게 24.06.16 36 1 8쪽
49 제49화 이놈, 반드시 너를 죽인다 24.06.16 44 1 11쪽
48 제48화 하늘의 단죄, 다시 생모의 무덤을 찾은 소비 24.06.15 42 0 11쪽
47 제47화 마음을 털고 일어나는 소비 24.06.15 34 0 8쪽
46 제46화 영영 이별 24.06.14 39 0 12쪽
45 제45화 대마도 정벌군 속에서 만난 중례와 상례 24.06.13 38 1 14쪽
44 제44화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된 가이 24.06.12 41 1 10쪽
43 제43화 국무 가이의 실종 24.06.11 44 0 13쪽
» 제42화 호랑이굴에서 만난 원수 24.06.10 40 1 9쪽
41 제41화 기다려라 오치수 24.06.09 43 0 10쪽
40 제40화 집현전을 키우리라 24.06.08 46 1 13쪽
39 제39화 대마도 정벌에 나서는 이방원, 햇병아리 임금의 자괴감 24.06.06 5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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