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주치의, 노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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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산
작품등록일 :
2024.05.1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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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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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국무 가이의 실종

DUMMY


돌무덤 앞에 간소하게 제상을 차려놓고 절을 올리는 소비를 마인국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마저 스산하여 가랑비가 간간히 떨어졌다. 소비는 술잔을 채워 어머니의 무덤 위에 뿌렸다.

“어머니, 어머니!”

소비는 얼굴도 모르는 생모를 애타게 부르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이제 덜 외로우시죠? 소녀가 찾아와서 좋으시죠?”

소비는 돌무덤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죽은 생모와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 저승에서 아버님을 만나셨겠지요? 아버님을 또 보시면 소녀가 보고 싶어 한다고 꼭 전해주세요. 그리고 꿈에라도 두 분이 함께 저를 찾아주세요. 어머니, 아버지 정말 보고싶어요.”




소비는 돌무덤 위에 엎어진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소비를 지켜보던 마인국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몇 번 우르릉거리더니 빗발이 굵어졌다. 마인국이 얼른 소비를 일으켜 세워 바위 밑으로 이끌었다. 검은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거리더니 하늘이 쪼개질 듯 천둥소리가 산을 뒤흔들었다. 이어 한바탕 장대비가 쏟아졌다. 소비는 엉엉 울었지만, 그녀의 울음소리는 이내 장대비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렇듯 온 산을 쓸어버릴 듯 쏟아지던 빗줄기는 소비가 울음을 그칠 때쯤 함께 그쳤다. 어느덧 먹구름을 뚫고 한 줄기 햇살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소비는 돌무덤에 반절을 한 뒤에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면 궁궐로 돌아가야 했다. 대비 민 씨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주상 이 별감까지 보내 입궐을 재촉하고 있었다. 늦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입궐하라는 명이었다.

소비는 병이 낫지 않았다고 핑계하여 대궐로 돌아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생모를 죽음으로 내몬 대비 민 씨를 치료하고 간병하는 일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승 탄선을 찾아가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소비가 정도전의 손녀라는 사실을 듣고, 탄선은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소비의 말을 듣고 탄선은 한참동안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삼봉에 대해 물은 것이었구나. 따지고 보면 삼봉은 내겐 원수나 다름없다. 내 부모님을 죽게 만들고, 나를 세상을 등지게 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네가 삼봉의 손녀라니... 부처님께서 세상 인연을 묘하게 엮으셨구나.”

소비는 조부 정도전이 스승의 원수라는 말에 황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스승은 원수의 혈육인 자신을 자식처럼 보살피고 양육한 꼴이었다.

“마음이 많이 괴로웠겠구나. 나도 지난번에 네 입에서 정도전의 이름이 나왔을 때, 잠시 울화가 치밀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도전이 내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 우리 집안을 몰락시킨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더구나. 제 딴엔 세상을 바꿔서 백성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자 역성혁명을 감행한 것이었고, 그 혁명의 소용돌이에 우리 집안이 휘말린 것뿐이지. 상왕이나 대비 민 씨도 같은 뜻으로 정도전을 처단했을 것이다.”




탄선은 빙긋이 웃으며 소비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소비야, 나는 그저 너를 제자로 둬서 너무 좋다. 네가 누구의 핏줄이든 상관없다. 그저 너는 나의 자랑이며, 보배일 뿐이다. 또한 너는 좋은 의원이다. 실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천성이 아름다운 의원이다. 네가 누구의 자손이든 그 사실 만큼은 변함없는 것이다.”

스승의 그 말을 듣자, 소비는 언젠가 스승이 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죽어가는 원수를 만나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소비는 그때서야 그 질문이 제자인 자신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 탄선 스스로에게 던진 것임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조선 왕실이 모두 스승 탄선에겐 원수였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물론이고 그의 아들인 상왕과 손자인 금상까지 모두 원수였다. 스승은 그 원수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살며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되새김질하며 살아왔던 거였다.

‘죽어가는 원수의 병을 고쳐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소비는 이제 처음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을 스승 탄선은 이십여 년을 안고 고뇌해온 것이 분명했다.

“스승님께서 제 처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비는 스승이 내린 결론을 듣고 싶어 그렇게 물었다. 탄선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의원이라면 병자의 병부터 고쳐야지.”

소비는 스승의 그 대답을 의심하지 않았다. 스승은 이미 제자인 자신이 원수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고도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며 다독여주었다.

‘의원이라면 병자부터 고쳐야지.’

소비는 스승의 그 태도가 정말 위안이 되었다. 소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어머니 묘소를 다녀와서 대궐로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강건하십시오.”




탄선이 흐뭇하게 웃으며, 소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소비는 스승이 두드려준 어깨를 가만히 만지며 산을 내려왔다. 입궐하기 전에 집에 들러 어머니 가이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그녀를 보지 못한 지도 열흘이 다 됐다. 집에 가면 가이가 지청구를 늘어놓으며 정충석의 첩으로 들어가란 말을 해댈 게 분명했지만, 소비는 피식 웃음이 쏟아졌다. 밑도 끝도 없이 소비는 어머니 가이의 지청구가 그리워졌다.




서소문 근처에서 마인국과 헤어진 후 소비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점방에서 가이에게 줄 부채와 떡을 샀다. 지난번 입궐할 때 집에 들르지 않았다고 한 바탕 잔소리를 해댈 것에 대비한 입막음용이었다. 가이는 잔소리도 많고 자주 땍땍거리긴 해도 인정이 많은 여자였다. 하긴 인정이 없었다면 소비를 데려다 키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비는 가이의 지청구 속에 묻어나는 딸에 대한 애틋함을 모르지 않았다.

“어머니, 저 왔어요.”

소비가 집안으로 들어서며 가이를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성수청에 가셨나?”

그런데 집안을 둘러보니, 요 며칠 집이 비어 있었던 같았다. 부뚜막에 먼지도 잔뜩 앉아있고, 아궁이에 불씨도 꺼진지 며칠 되어 보였다. 거기다 찬장에 놓인 나물은 상해서 냄새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가이는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찬장에 썩은 음식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소비는 이상한 생각에 성수청에 들렀더니, 가이가 성수청에 오지 않은 지 벌써 닷새는 족히 되었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수청에서도 가이에게 기별을 넣을 참이었다고 했다. 장마에 앞서 재를 올릴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산신재를 올리러 가셨나?”




성수청 무당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말을 했지만, 소비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이가 산신재를 갔다면 집안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흩어놓고 갔을 리가 없었다. 산신재를 갈 때면 방안이며 마당이며 부뚜막이며 찬장이며 지나치리만큼 말끔하게 청소해놓는 것이 가이의 오래 된 습관이었다.

소비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집안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역시 재를 지내러 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소비는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그리고 십일 전쯤에 정충석의 첩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악다구니를 쓰듯 해댔던 말들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약간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네가 만약 첩 자리를 거절하면 정충석이 그 자가 그냥 있을 것 같으냐? 장안에서 정충석이 눈 밖에 나서 온전한 사람이 얼마나 있더냐?’

흘려듣긴 했지만, 가이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정말 그 자가 해코지라도 했으면 어쩌지?”




소비는 불안한 마음에 옆집이며 자주 가는 점방이며 이곳저곳을 찾아가서 제 어머니를 보지 못했냐고 수소문을 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나마 하나 알아낸 것이 있다면 닷새 전에 가이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사라진 지 벌써 닷새나 됐나는 건데...”

소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안했다. 그러다 마인국을 만났던 그날, 납치당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어머니 일로 한 동안 까맣게 잊었던 일이었다. 마인국도 그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았기에 그저 꿈길에 있었던 일처럼 잊혀져가고 있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혹 어머니도 그 놈들이...”




소비는 겁이 덜컥 났다. 분명히 한낱 도적 패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납치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왜? 도저히 짚이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까지 놈들에게 끌려갔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정충석이라는 이름이 뇌리에 박혔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소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첩 자리를 마다한다고 사람을 납치까지 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했다.

소비는 마음이 찜찜했지만, 대궐로 향했다. 어느덧 해가 서녘으로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수강궁으로 돌아오라는 주상의 명을 어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몸은 완쾌된 것이냐?”




소비가 수강궁에 앞서 창덕궁 편전에 들렀더니, 주상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네, 완쾌되었습니다.”

“다행이구나. 그간 어마님께서 매일같이 너를 찾았느니라. 어머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겠구나. 어서 수강궁으로 가자.”

주상의 말대로 대비 민 씨는 소비를 무척 반겼다.

“네가 없는 동안 여러 의원들이 침도 놓고 탕약을 올렸지만, 너의 침과 뜸을 능가하는 것이 없었다. 제발 아프지 말아라. 네가 아프면 나는 어쩌란 말이더냐?”

“송구하옵니다.”

“오늘 네가 해 지기 전에 온다는 전갈을 받고, 침이며 약이며 모두 거부하였느니라. 그러니 어서 내 몸을 좀 봐 다오.”




민 씨는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못 쉴 같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소비가 침과 뜸으로 치료하자 한결 가슴이 시원해졌다며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고, 주상이 소비를 따로 불러내 말했다.

“어마님께서 근래에 저렇듯 밝은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너의 치료를 받으시고 한결 좋아지신 것 같구나. 모든 것이 너의 덕이다.”

“황공하옵니다.”

“그래, 어마님께서 쾌차하실 수 있겠느냐?”




소비는 그 말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민 씨의 병세는 전에 보다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솔직히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래, 속 시원히 말해 보거라.”

“대비마마의 병세는 전보다 조금 악화된 상태이옵니다. 지금 대비마마께서 일시적으로 호전된 느낌을 가지시는 것은 기분 탓이 크옵니다.”

“으음... 그러하냐?”

“황공하옵니다.”

“아니다. 그래도 네가 어마님 곁에 있으면 내 마음이 든든하다. 지금 그나마 어마님께서 거동하실 수 있는 것도 다 네 덕이 아니더냐?”

“과찬이시옵니다.”




소비의 음성이 평소 같지 않았다. 평소엔 늘 활기차고 분명한 어조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힘이 없고, 얼굴에 그늘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주상은 혹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네 얼굴이 어둡구나.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은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표정이 그리 어두우냐? 혹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저 개인적인 문제이옵니다.”

“개인적인 문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그러느냐? 무슨 일인지 몰라도 혹 내가 도움이 될지 아느냐? 말해 보거라.”




“실은 제 어미가 종적이 묘연하여 ...”

“종적이 묘연하다니? 네 어미가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활인원에 머물다 수일 만에 집에 들렀는데, 계시지 않아 알아보니, 벌써 닷새 전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껏 이런 일이 없었기에 주변을 수소문하여 찾다가 입궐할 시간이 되어 부랴부랴 온 터라...”

“알았다. 내 한 번 알아보게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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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제67화 마지막화 - 병마와 의술 그리고 죽음 +1 24.07.04 38 1 11쪽
66 제66화 떠나는 주상, 찾아온 병마 24.07.04 22 0 12쪽
65 제65화 훈민정음을 공표하는 세종 +1 24.07.03 28 0 11쪽
64 제64화 문자 창제를 결심하는 주상 24.07.02 29 0 11쪽
63 제63화 온갖 병으로 시달리는 임금 24.07.01 53 0 15쪽
62 제62화 오치수의 몰락 24.06.30 33 0 10쪽
61 제61화 늙은 호랑이 사냥 24.06.29 29 0 12쪽
60 제 60화 마침내 형틀에 묶인 오치수 24.06.28 50 0 10쪽
59 제59화 스승 탄선의 유언 그리고 그들의 결합 24.06.27 44 0 11쪽
58 제58화 도성에 몰아닥친 역병 24.06.26 43 0 10쪽
57 제57화 이방원의 죽음을 지켜보는 소비 24.06.25 36 0 16쪽
56 제56화 나의 후궁이 되어 주겠느냐? 24.06.24 39 0 9쪽
55 제55화 소비의 신비로운 침술 24.06.21 40 0 12쪽
54 제54화 양녕의 병을 치료하고 임금의 신임을 얻은 노중례 24.06.20 41 0 12쪽
53 제53화 마침내 확인된 아버지의 결백 24.06.19 59 1 9쪽
52 제52화 결정적인 증인 24.06.18 39 0 14쪽
51 제51화 일망타진 24.06.17 41 1 8쪽
50 제50화 쥐도 새도 모르게 24.06.16 35 1 8쪽
49 제49화 이놈, 반드시 너를 죽인다 24.06.16 43 1 11쪽
48 제48화 하늘의 단죄, 다시 생모의 무덤을 찾은 소비 24.06.15 41 0 11쪽
47 제47화 마음을 털고 일어나는 소비 24.06.15 33 0 8쪽
46 제46화 영영 이별 24.06.14 39 0 12쪽
45 제45화 대마도 정벌군 속에서 만난 중례와 상례 24.06.13 37 1 14쪽
44 제44화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된 가이 24.06.12 41 1 10쪽
» 제43화 국무 가이의 실종 24.06.11 44 0 13쪽
42 제42화 호랑이굴에서 만난 원수 24.06.10 39 1 9쪽
41 제41화 기다려라 오치수 24.06.09 42 0 10쪽
40 제40화 집현전을 키우리라 24.06.08 46 1 13쪽
39 제39화 대마도 정벌에 나서는 이방원, 햇병아리 임금의 자괴감 24.06.06 5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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