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마음을 털고 일어나는 소비

소비는 양어머니 가이가 죽은 충격으로 한동안 만사에 의욕을 잃고 지냈다. 사실, 소비는 가이가 살아있을 땐 그녀의 빈자리를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막상 가이가 죽자, 그야말로 졸지에 천하 고아 신세가 된 듯했다. 그 때문인지 툭하면 눈물이 쏟아졌다. 그저 밥을 먹다가도 울컥울컥 울음이 쏟아졌고, 참새들이 떼를 지어 노는 것을 보다가도 밑도 끝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거기다 집이 갑자기 너무 넓어진 느낌이었고, 반대로 자신은 너무나 작아진 것 같았다. 집안에 누워 있으면 마치 거대한 성 안에 홀로 갇혀 있는 것처럼 무섭고 외로웠다. 그래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마당에라도 나가면 마치 거대한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막막하고 두려웠다. 그 때문에 한동안 쉽사리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집 밖을 나서면 한 무리의 도적들이 덤벼들어 순식간에 자신을 낚아챌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 때문에 늘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두어 달을 그렇게 숨죽이며 지내고 있던 그녀는 급히 궁으로 입궐하라는 주상의 명을 받고서야 겨우 정신을 추슬렀다.
소비가 허겁지겁 입궐하여 편전에 나아갔더니, 주상이 근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노대의 말이 네가 도통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일부러 불렀다. 괜찮은 것이냐?”
소비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래, 상심이 큰 것은 안다. 그렇다고 마냥 그리 지내면 되겠느냐? 너는 지금 많이 아픈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이 병이 되고 있다. 또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너 밖에 없다. 명색이 네가 누구냐? 내가 아는 한 너는 조선 제일의 의원이다. 그런데 남의 병은 잘 고치면서 어찌 네 병은 고치지 못하느냐?”
주상은 호통 아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부드럽게 위로하는 말투였지만, 소비에겐 호통으로 들렸다. 주상의 말처럼 소비는 자신이 병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너무나 지당한 말이었다.
소비는 대답 대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무엇인가 변명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입을 열면 그저 울음만 터져 나왔다.
주상이 다가와 소비의 어깨를 토닥였다.
“많이 힘든 게로구나. 이렇듯 네가 힘든 줄도 모르고 나는 너를 불러 어마님 간병을 시키려 했으니, 나야말로 참으로 못된 임금이구나.”
그때서야 소비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주상의 토닥거림이 위안이 됐는지 내면 저 깊숙한 곳에서 작은 문이 하나 열리는 듯 했다.
“아닙니다. 곧 돌아가서 채비를 하여 수강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호, 그래? 정녕 그리 할 수 있겠느냐?”
“네, 그리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네가 그리 말하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주상의 그 말에 소비는 또 밑도 끝도 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하지만 말문이 막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속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소인을 믿고 다시 불러주시니, 성심을 다하여 대비마마를 치료하겠나이다.”
그런 말을 던져놓고 편전을 빠져나가는 소비를 주상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기운이 다시 내서 일어나야 할 텐데...”
소비는 마치 그런 주상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전에 없이 힘이 쏟아났다. 그래서 궁궐을 빠져나오면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조선 제일의 의원이다.”
소비는 주상이 한 말을 새기고 또 새겼다. 호통처럼 들린 말이 위로가 되어 다시 다가오기도 했다.
“내 병도 고치지 못하면서 어찌 남의 병을 고치겠어?”
그러고 보니, 지난 서너 달 동안 자신이 병을 고치는 의원이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그저 어미 잃고 두려움에 질린 짐승 새끼처럼 살았었다.
소비는 발걸음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한성부로 찾아갔다. 그것은 두려움을 벗어 던지기 위한 다짐 끝에 나온 행보였다.
“아직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까?”
소비는 유영교를 찾아가 따지듯이 그렇게 묻는 것으로 자신의 결심을 다시 확인했다.
“그렇네. 자네도 알다시피 시신만 발견되었을 뿐 어떤 범행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네. 그래도 열심히 수사하고 있으니, 기다려 보게.”
소비는 그 말만 듣고 한성부를 빠져나왔다. 사실, 소비도 한성부의 수사가 진척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가이의 시신을 발견한 것만 해도 천운이라 할 정도로 범인은 아무런 자취도 남기도 않았기 때문이다.
발견 당시, 가이의 시신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소비가 시신이 입고 있던 옷과 손에 낀 가락지를 보고서야 어머니라는 것을 겨우 알아볼 정도였으니, 시신의 훼손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두 눈알은 달아나고 없었고, 내장도 다 파먹은 뒤였다. 누군가 암매장 한 것을 들짐승들이 파내어 그 꼴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들짐승이 시신을 파내지 않았다면 영원히 발견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니, 오히려 들짐승들에게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주상은 특명을 내려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라고 했지만 한성부에서는 범인에 관한 단서조차 하나 잡지 못했다. 소비도 별감 오노대를 통해 이미 그런 사실을 전해 들었음에도 굳이 한성부를 찾아간 것은 자신이 한성부를 찾아가 수사를 재촉하고 따질 정도로 원기를 되찾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소비는 다음 날 바로 수강궁으로 들어갔다. 소비가 없는 동안 대비 민씨의 병세는 좀 더 악화된 상태였다. 전에는 곧잘 햇살을 즐긴다며 후원 행차를 하곤 했는데, 이제 거의 운신을 못했다. 홀로 걷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잘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하여 소비를 보더니 위로하며 말했다.
“어미를 잃었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나 상심이 컸느냐? 어쨌든 상심을 이겨내고 이렇게 와줘서 너무 고맙구나.”
“그간 보살펴 드리지 못해서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네가 다시 온 것만으로도 나는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
대비 민 씨는 정말 소비가 온 뒤로 한결 낯빛이 좋아지고, 얼굴도 밝아졌다. 소비의 침과 뜸이 효과를 보았는지, 한 달쯤 지나자, 다시 후원 나들이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자 민 씨는 한층 더 욕심을 내며 하루는 주상을 불러놓고 말했다.
“내 죽기 전에 꼭 한 번 낙천정에 가보고 싶구나.”
낙천정은 상왕이 한강 변에 지은 별궁이었다. 강변의 산 중턱에 지은 낙천정에서는 광진 나루터가 굽어보일 뿐 아니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방원은 왕위에 있을 때도 자주 틈을 내서 낙천정 나들이를 하곤 했다. 그러다 왕위를 금상에게 내준 뒤로는 사흘이 멀다 하고 낙천정에 거둥하고 있었다. 그곳에 측근 신하들을 불러 사냥도 하고 풍광도 즐겼는데, 주상도 가끔 함께 하곤 했다. 민 씨도 어느 가을에 낙천정에서 닷새를 지낸 적이 있는데, 아직도 주변 풍광이 눈앞에 생생하다며 꼭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주상으로부터 대비의 말을 전해들은 상왕 이방원이 모처럼 대비전을 찾아와 약속했다.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이 되면 낙천정으로 옮겨 가도록 합시다.”
그 말을 듣고 민 씨는 아이처럼 좋아라 하였고, 상왕은 경자년(1420년)이 되자마자 약속을 이행했다. 경자년 정월 초나흘이었다. 아직 한파가 몇 차례 남아 있었지만, 상왕은 민 씨와 함께 낙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상왕과 대비의 어가가 낙천정으로 가던 날엔 잠시 눈발이 날렸다. 하지만 날씨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대비는 눈이 온다는 소리에 가마 창을 열고 머리를 내밀며 아이처럼 좋아 하였다. 상왕은 그런 대비의 모습을 힐긋힐긋 보며 빙긋이 웃었고, 금상은 대비와 상왕을 번갈아 쳐다보며 흐뭇해하였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