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하늘의 단죄, 다시 생모의 무덤을 찾은 소비

하지만 이날 소비는 동행하지 못했다. 만삭이 된 왕비 심 씨가 언제 진통을 시작할지 몰라 산실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심 씨는 이번엔 식사 조절을 잘 하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살이 찌지 않았다. 소비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식단을 짜서 바치기도 했고, 후원 거둥 일정도 촘촘하게 짜서 실천하도록 도왔다. 심 씨는 지난 번 셋째아들 용(안평대군)을 낳을 때 비만으로 인해 워낙 고생을 했던 터라 이번에는 비만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결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소비가 마련한 식단을 철저하게 지키고, 후원까지 걸어가 산책하는 일도 절대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 눈이 펑펑 내리는 날도 후원으로 거둥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 덕에 심 씨는 넷째 아들 구(임영대군)를 순산했다.
심 씨가 구를 낳은 날은 상왕과 대비가 낙천정으로 떠난 후 사흘이 지난 1월 7일 아침이었다. 밤새 함박눈이 펑펑 내리다 동이 틀 무렵에 그쳤는데, 그 순간에 심 씨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진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진통이 시작된 지 채 일 각도 되지 않아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구가 세상에 나왔다.
그렇듯 심 씨가 무사히 출산한 뒤, 소비는 이레를 더 산실청에 머물다 급히 주상의 호출을 받고 낙천정으로 갔다. 대비 민 씨가 친정어머니인 삼한 국대부인 송 씨의 생일을 맞아 헌수하기 위해 도성으로 들어오려 했다. 민 씨가 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상왕과 주상은 반대했지만, 민 씨는 이번에 친정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면 다시는 뵙지 못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주상은 급히 소비를 호출하여 민 씨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 달라고 했다.
“거둥하셔도 되겠느냐?”
“거둥하시기엔 무리가 있습니다만, 워낙 의지가 강하셔서...”
대비 민 씨의 건강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정어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민 씨의 의지가 너무 강해 만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민 씨는 도성으로 돌아온 뒤, 넷째 딸 정선공주의 집에서 이틀을 머무른 뒤, 친정집으로 향했다. 민무구를 비롯한 네 아들이 모두 상왕이 내린 사약을 받고 죽은 터라 친정집엔 송 씨 홀로 지내고 있었다. 그렇듯 송 씨가 남편도 죽고 자식도 잃은 애처로운 신세였기 때문에 민 씨는 친정어머니를 더욱 불쌍하게 여기고 만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민 씨는 어머니 송 씨를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얼싸안고 통곡했다.
“불효막심한 이 딸년이 궁궐로 들어갈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어머니께서 이렇게 외롭게 사시지는 않았을 터인데...”
민 씨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온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된 채 통곡했다. 어머니 송 씨가 여러 말로 토닥거려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위 하나 잘못 들여 이게 다 무슨 꼴입니까? 이 딸년이 과욕을 부려 본방(친정)은 풍비박산이 나고 아우들은 모두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 늙은 어머니께서 의탁할 곳도 없이 홀로 지내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불효막심한 딸년은 저승에 가서 아버님 뵐 낯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말들을 쏟아내며 통곡을 이어가던 민 씨는 뒤에서 민망스런 표정으로 서 있던 상왕 이방원을 원망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기어코 상왕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모든 것이 이방원 네 놈 탓이다. 네 놈이 내 아우들을 모두 죽였지? 나쁜 놈아! 배은망덕한 놈아! 악귀 같은 놈아! 죽어라 이놈! 너도 죽어라 이놈아!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와? 여길 오냐구!”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말릴 틈도 없었다. 주상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고, 상왕은 민 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민 씨를 떨쳐내지 못했다. 워낙 악을 쓰며 죽을힘을 다해 달라붙는 터라 쉽게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상왕의 용포가 찢어지고 말았고, 그 바람에 상왕이 분을 참지 못하고 민 씨를 강하게 뿌리쳤다. 그런데 그렇듯 악을 쓰던 민 씨는 한 순간에 상왕의 손에 밀려 힘없이 뒤로 나뒹굴어졌다.
소비는 그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을 바라보며 하늘이 그들을 단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용상을 차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뇌까렸다.
‘어머니 보시고 계시나요? 하늘이 원수들을 단죄하는 것이 보이시나요?’
그렇듯 소비가 먹먹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주상이 대비 민 씨를 안고 소리쳤다.
“어서 어마님을 안으로 모셔라!”
궁녀들이 달라붙어 민 씨를 방으로 옮기느라 야단법석이었다. 그때서야 소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대비의 상태는 자못 심각했다. 평소엔 혼자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몸으로 그렇듯 악다구니를 쓰며 기운이란 기운은 모두 쏟아냈으니 쓰러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더구나 상왕이 거세게 뿌리치는 바람에 넘어지면서 땅에 뒤통수를 찧기까지 했다.
민 씨의 얼굴은 핏기를 완전히 잃고 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의식을 깨우고 체온을 되돌려놓는 것이 급선무였다. 소비는 일단 사향 가루를 코에 발라 숨을 자극하고, 이어 청심원을 으깨어 민 씨의 입에 넣어 삼키게 했다. 그리고 침으로 몇 군데 혈을 찌르고 배에 뜸을 떴다. 그러자 민 씨는 낮은 신음소리를 쏟아냈다.
“회복하신 것이냐?”
주상이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안색은 돌아오고 있습니다.”
주상은 자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쏟아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민 씨의 호흡이 거칠었고, 맥도 가늘었다.
“언제쯤 깨어나시겠느냐?”
“아직 장담할 순 없습니다. 워낙 원기가 없으셔서 우선 탕약을 올린 뒤,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소비가 올린 탕약을 먹고 민 씨는 의식을 회복했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급히 소비를 호출했다.
사랑채엔 상왕이 누워 있었다. 상왕은 아귀처럼 달려든 민 씨의 손아귀를 떼어내느라 순간적으로 너무 과하게 힘을 썼던 모양이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고 몸이 떨리더니, 이젠 숨쉬기도 괴롭구나.”
상왕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이미 왜국 승려 출신 의원인 평원해가 침과 뜸을 놓고 청심원까지 사용했지만 상왕의 상태가 별로 호전되지 않았다고 했다.
소비는 처음엔 순간적으로 힘을 잘못 사용하여 생긴 일시적인 병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맥을 잡아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중풍 맥이었다. 거기다 불규칙적이고 급하고 빠르게 뛰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발병을 한다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소비는 잠시 상왕의 인중을 손가락으로 두드린 뒤, 침을 놓았다. 그리고 참기름 한 홉에 사향소합원 환을 으깨어 마시게 했다. 중풍 초기에 쓰는 응급약이었다. 이후 머리의 중풍혈에 침을 놓았더니, 상왕의 상태가 호전되었다. 현기증도 사라지고 몸 떨림이나 호흡 곤란도 멈췄다.
“오호, 너의 의술이 신통하구나.”
상왕이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면서 덧붙인 말이었다.
“이제 완쾌되신 것이냐?”
상왕이 드러누웠다는 소리를 듣고 안채에서 달려온 주상이 물었다. 하지만 소비는 중풍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아직 초기인 데다 굳이 주상을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황망한 일을 당하셔서 몇 군데 혈이 막혔던 것뿐이옵니다. 막힌 혈을 뚫었으니 이제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비는 상왕의 맥을 다시 한 번 짚어보았다. 미약하지만 여전히 중풍맥이 잡혔다. 그대로 두면 머지않아 발병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당장은 별달리 조치할 것이 없었다. 무리하지 않고 찬바람만 조심한다면 피해갈 수도 있는 상태였다.
“한기를 조심하셔야 하겠습니다. 혹여 종기가 생길 시엔 더욱 한기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런 당부를 남기고 안채로 돌아가니, 민 씨가 의식을 회복하고 죽을 먹고 있었다. 죽을 다 먹은 뒤에 소비가 민 씨의 맥을 짚어보았더니,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몸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적취의 상태는 여전히 악화일로에 있었다. 아무리 습생을 잘 한다고 해도 민 씨의 명줄은 여름을 넘기기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소비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미 손쓸 방도도 없는데 괜히 병자를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 씨는 민재의 집에 이틀을 더 머물다 낙천정으로 돌아갔다. 물론 소비도 동행했다. 왕비 심 씨를 더 돌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산실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소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비는 민 씨의 마지막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손으로 부모의 원수를 갚을 순 없었지만 적어도 하늘이 그녀에게 내린 단죄 현장만이라도 직접 지켜보고 싶었다.
소비의 예상대로 민 씨는 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내지 못했다. 7월에 이르러 온 몸에 열이 나서 심각한 학질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더 이상 사지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상태가 며칠 지속된 뒤에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말도 듣고 사람도 알아보았다.
임종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한 상왕은 급히 민 씨를 창덕궁으로 옮기게 하였다. 창덕궁 서별실로 옮겨졌을 때 민씨는 더 이상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자 눈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귀는 들리는 상태였다. 소비는 민 씨와 단 둘이 있을 때, 그녀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죽기 전에 마음으로라도 죄 없이 죽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비소서. 대비께서 죽게 만든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소인의 아비와 어미도 있습니다. 제발 그분들께도 용서를 비소서.”
닷새 뒤에 민 씨는 숨을 거뒀다. 소비는 그녀가 숨을 거두는 순간을 눈을 부릅뜨고 목도했다. 그리고 대비 민씨의 국상이 시작되자, 궁궐에서 나온 소비는 홀로 어머니의 돌무덤을 찾아가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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