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이놈, 반드시 너를 죽인다

중례는 잰걸음을 치다 광통교가 보이자 육조거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전의감에서 시행한 초시에서 중례는 18명의 합격자에 들었다. 이제 9명을 뽑는 복시에 합격하면 의관이 되는 것이었다.
의술을 익힌 이후 3년을 기다린 끝에 작년 기해년(1419년) 가을에 초시를 치러 통과했고, 올해 경자년(1420년) 식년을 맞아 복시를 치렀다. 그리고 마침내 예조에서 복시 합격자 방이 붙는 날이었다.
광통교를 건넌 중례가 육조거리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몹시 붐볐다. 관청마다 사람들이 긴 줄을 형성하고 있는 데다, 오가는 군중도 유난히 많았다. 무과와 잡과의 최종 합격자 방이 붙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예조에선 의과, 천문과, 역과, 율과, 지리과 등 잡과 합격자 방이 한꺼번에 붙은 날이라 예조 앞에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집을 나설 걸...”
중례는 군중을 헤집고 예조 앞으로 달려가며 뇌까렸다.
중례와 재희는 지난해 7월에 서활인원에서 나와 서소문 밖에 별도의 살림을 냈다. 중례가 거제도에서 돌아왔더니, 재희가 함께 살 집이 생겼다며 무척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중례가 거제도에 내려간 사이 오치수가 재희에게 집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비록 초가집이었지만 담장과 대문까지 제대로 갖추고 마당에 텃밭까지 딸린 제법 어엿한 살림집이었다. 가운데 대청을 둔 본채는 좌우에 방이 셋이나 되는 데다 부엌과 헛간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대문 옆에는 두 칸에 불과했지만 행랑채까지 있는 서른 칸 남짓한 규모였다.
중례는 오치수가 마련해준 그 집에 사는 것이 꺼림칙하였지만 재희가 워낙 마음에 들어 하는 터라 그냥 눌러 살기로 하였다. 어차피 호랑이 굴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 이상 오치수를 멀리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하였다.
중례의 집에서 광통교까지는 건장한 사내의 걸음으로도 한 시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중례는 그 길을 잰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기에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날씨도 몹시 더웠다. 음력 5월이라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광통교에서 육조거리로 가는 도상을 가득 메운 군중 사이를 헤집고 가자니 땀이 비 오듯 하였다. 그리고 가까스로 육조 거리 초입에 있는 공조 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붙였다.
“자네 기다린다고 새벽부터 여기 서 있었는데, 이제 오면 어떻게 하나?”
유영교였다.
“냉수부터 쭉 들이켜. 그렇게 땀을 많이 흘려서야 어디 자네 이름 석 자 확인이나 하겠는가?”
유영교가 물통을 내밀었다.
“한성부 우물에서 갓 길어온 물일세. 내가 자네한테 이 냉수를 주려고 몇 번이나 두레박을 끌어올렸는지 아나?”
“고맙습니다.”
중례는 벌컥거리며 물통을 다 비웠다. 중례가 물통을 내려놓자, 유영교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실망 하지 말어. 의과 취재야 3년만 더 기다리면 또 볼 수 있는데, 뭘.”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합격자 명단을 모두 살펴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자네 이름은 없었어.”
“네?”
그 소리에 중례는 허물어지듯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례를 거제도 산기슭에 묻고 나서 한동안 넋을 잃고 지내다가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한을 품고 준비한 것이 의과 취재였다. 의술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아우를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치를 떨며 의관이 되기로 결심한 터였다. 의관이 되면 내의원에 있는 수많은 의방 비서를 마음껏 익혀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런데 낙방이라니. 중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 같아 정신이 아뜩하고 눈물이 마구 솟구쳤다. 그래서 퍼질러 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울 참이었다.
그러자 유영교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미,미안하네. 내가 자네 좀 놀려보느라 농을 좀 했네. 자네가 이렇게까지 절망할 줄은 미처 몰랐네. 미안하네, 미안해. 자네 안 떨어졌어. 자네 붙었다구. 그것도 장원이네, 장원.”
그 소리에 중례는 벌떡 일어나 합격자 방문이 붙어있는 예조 담벼락을 향해 마구 뛰어갔다. 예조는 공조, 형조, 병조, 사헌부, 중추부를 거쳐 삼군부와 함께 맨 안쪽에 있었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접근이 쉽지 않았지만, 중례는 사람들을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며 가까스로 합격자 명단 앞에 섰다.
유영교의 말 대로 장원이었다. 합격자 명단의 최상단에 ‘노중례’ 세 글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중례는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내 말이 맞지? 자네가 장원이잖아, 장원.”
어느새 뒤 따라온 유영교가 중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자네가 해낼 줄 알았네.”
유영교는 중례의 손을 끌어당겼다.
“자, 가세.”
유영교는 중례를 광통교 근처 청계천 북쪽의 한 주점으로 이끌고 갔다.
“오늘은 내가 살 것이니, 맛있는 요리도 먹고, 술도 마시고, 제대로 한 번 놀아보세. 경사 아닌가, 경사. 세상에 이렇게 좋은 날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런 날 낮술을 먹는 거지, 안 그런가? 노 의관!”
중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유영교가 부어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그간에 마음에 담고 있는 말들을 자기도 모르게 술술 쏟아냈다. 그러다 한 순간 하늘이 빙글빙글 돈다 싶더니 갑자기 탁자에 코를 박고 쓰러졌다. 원체 술이 약한 데다 아침 일찍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온 터라 술기운이 더 빨리 돌았던 것이다.
정신없이 쓰러져 자던 중례가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가 누워 있던 곳은 주점 뒤뜰 나무 그늘 밑에 놓인 평상이었다.
“노 의관, 이제 정신이 좀 드는가?”
“아, 네.”
“이 사람아, 사내대장부가 그렇게 술이 약해서 어데 쓰겠나?”
중례는 여전히 정신이 몽롱하였다.
“정신 좀 들었으면, 이제 이 말을 해도 되겠구만.”
“무슨 말인데요?”
“거 왜, 자네 작년에 거제도 내려가기 전에 흉측스런 시신 하나 보지 않았는가?”
“아, 네... 눈알이 달아나고 양물이 송두리째 잘려나간 그 시신이 말입니까?”
“그렇지. 그런데 자네가 떠나고 두어 달 쯤 뒤에 그 시신의 신원이 밝혀졌거든.”
“그래요? 그게 누군데요?”
“동소문 밖에 살던 진사 안광길이라는 자로 밝혀졌어.”
“진사라면 양반 아닙니까?”
“양반이지. 그것도 제법 떵떵거리는 부잣집 양반이라네.”
“아니, 그런 분이 왜 그 꼴을 당했을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어.”
“이상한 것이라뇨?”
“아무래도 이 사건에 정충석이란 놈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정충석이라면 정재술의 서자 말입니까?”
“그렇지. 바로 자네 집안을 풍비박산 낸 바로 그 정충석이 놈 말이야.”
중례는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정충석이 이 사건과 어떻게 엮여 있는데요?”
“청계천 유곽에 계궁선이라는 기생이 하나 있는데 안광길이 몹시 좋아했거든.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충석도 계궁선을 탐내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안광길과 정충석이 모두 계궁선을 첩으로 들이려고 혈안이 되었었는데, 그런 와중에 안광길이 그런 꼴을 당한 거지.”
“그러면 계궁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긴, 정충석의 후원 별당을 차지하고 있지.” “그러니까 정충석이 계궁선을 차지하기 위해 안광길을 죽였다는 말이지요?”
“그렇지. 내가 처음부터 뭐라고 했어. 이 사건은 분명히 계집을 사이에 둔 치정살인이라고 했잖는가?”
“그렇다면 정충석을 잡아들였나요?”
“아니.”
“왜요?”
“물증이 없어. 정충석이 안광길을 죽였을 것 같은 생각은 드는데, 아무리 캐어 봐도 아무런 물증이 잡히지 않아.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충석을 범인으로 지목할 수도 없고...혹 잘 못 건드렸다간 오히려 내가 당하기 십상이거든. 만약 물증만 잡을 수 있다면 정충석을 한 방에 보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이제 정재술 대감도 죽고 없으니, 잘만 하면 정충석을 요절낼 수 있지 않을까?”
정재술이 죽은 것은 올 봄이었다. 작년 여름부터 거동을 못하고 누운 채로 명줄만 이어가더니, 해를 넘기고 봄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마침내 숨을 거뒀다. 오희묵은 정재술의 부고를 전하면서 걱정이 태산인 얼굴이었다. 정충석의 망나니 행각이 더욱 심해질 것인데,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 오희묵과 달리 아버지 오치수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자신이 오랫동안 모시던 상전이 죽었음에도 슬픈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재술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냥 입가에 묘한 웃음까지 물면서 정충석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희묵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늙은 여우보다는 마구 날뛰는 망나니를 다루는 게 쉽지 않겠니?”
그런 오치수의 말을 전해듣자, 중례는 어쩌면 오치수와 정충석 사이에 한 판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잘만 하면 물증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떻게 말인가?”
“정재술이 죽고 나서 오치수와 정충석이 시전의 상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들 둘 관계를 잘 이용하면 뭔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오, 만약에 둘 사이가 틀어졌다면 그럴 수도 있겠어. 그리고 정충석과 관련된 일이 한 가지 더 있네.”
“한 가지 더요?”
“국무당 가이 사건도 정충석 짓이 아닌가 싶어.”
“네? 정말입니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국무당의 딸 소비를 정충석이 첩으로 앉히려 했는데, 국무당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정충석이 국무를 불러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며 노발대발 한 적이 있다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마음이 걸려. 정충은은 자기 말을 어기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놈이거든.”
정충석이 소비의 어머니인 국무를 죽였을 것이란 말에 중례는 이번 기회에 정충석을 반드시 요절내고 말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소비가 어머니를 잃고 몇 달 동안 집안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재희로부터 전해 듣고는 중례도 마음이 무척 아팠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소비를 만나 위로의 말이라도 전하려 했지만 궁궐 안에 있는 그녀를 만날 방도가 없었다.
“정충석 이놈, 내 반드시 너를 죽인다!”
중례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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