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일망타진

유영교는 기어코 혼절하고 말았다.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자 갑자기 정신줄을 놓고 말았던 것이다. 중례는 우선 지혈제를 뿌리고 응급조치를 한 뒤, 유영교를 깨웠다. 다행히 조금 뒤에 유영교가 정신을 차렸다. 중례는 우선 유영교에게 죽을 쑤어 먹이고, 탕약을 달여 먹였다. 그렇게 사흘을 정성껏 치료했더니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유영교를 서활인원 별청으로 옮겼다.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 그곳밖에 없었다. 마침 탄선도 지방에 출타하고 없어서 별청은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중례가 유영교에게 당시 상황을 물으니, 유영교가 기억을 더듬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몇 놈이 갑자기 덮쳤어. 모두 단도를 들고 있었는데, 한참을 싸웠지. 그러다 한 순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는데,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안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워놓았고, 입에는 자갈이 물려 있고, 몸은 밧줄에 묶인 상태였어. 이후 마구잡이로 정신없이 맞았지. 그래서 또 정신을 잃었는데,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어. 그런데 갑자기 잠시 무슨 싸우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나를 구해줬어. 그게 다야.”
“정충석이 한 짓입니다.”
“정충석이?”
“네, 그놈들은 정충석의 부하들일 겁니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가?”
“차차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몸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십시오.”
“한성부와 집엔 연락을 해 줬는가?”
“아직 안했습니다.”
“왜?”
“놈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다 나을 때까지는 여기 숨어서 지내세요.”
그렇듯 중례가 유영교를 숨겨놓고 치료하고 있는데, 오치수가 사람을 보내 중례를 불렀다. 중례를 보더니 오치수가 물었다.
“유영교는 무사한가?”
“네, 겨우 목숨은 구했습니다.”
“다행이군. 하지만 안심하지 말게. 정충석이 살아 있는 한 유영교가 무사하긴 힘들 거야. 또 자네가 유영교를 구한 것을 알면 역시 자네도 그냥 두지 않을 걸세.”
그 말을 듣자, 중례는 약간 겁이 났다. 오치수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사생결단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오치수가 잔뜩 굳어 있는 중례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자네가 죽지 않으려면 적을 먼저 죽여야 하지 않겠는가?”
중례도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그래야지요.”
“그런데 적을 죽일 방도는 있는가?”
“...”
“하긴, 한낱 힘없는 관노 신세인 자네가 무슨 수로 정충석 같은 자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마음 같아선 단번에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될 일인가. 중례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하지만 전혀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
“혹 좋은 방도라도...”
“물증을 찾아내면 되지.”
“어떤 물증을 말씀 하시는 건지요?”
“정충석은 사람을 죽였다는 물증 말일세.”
하지만 중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충석이 살인을 했다는 물증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중례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오치수가 말을 이었다.
“정충석이 계궁선을 차지하려고 안광길을 죽였는데, 그때 정충석은 안광길의 눈알을 파내고 양물과 양쪽 손가락도 잘라냈지.”
“그러니까 안광길의 눈알과 생식기, 그리고 손가락을 찾아내면 된다 이 말입니까?”
“그렇지.”
“이미 어디 파묻었거나 썩어 없어졌을 텐데, 그것들을 어떻게 찾아냅니까?”
“천만의 말씀, 정충석은 절대 그것들을 버릴 놈이 아니지. 어딘가에 잘 보관하고 있을 게야. 놈에겐 승리의 전리품이거든.”
“하지만 설사 정충석이 그것들을 보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찾아내겠습니까?”
그 말에 오치수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문서 같은 것을 하나 내밀었다.
“이것을 가져가서 면밀히 살펴보게.”
오치수가 내준 것은 정충석 집안을 그린 도면이었다. 도면을 살피던 중례는 오치수가 일부러 찍어놓은 붉은 점을 발견했다.
“이 붉은 점이 있는 곳에 안광길의 눈알과 생식기, 그리고 손가락이 묻혀 있다는 것이겠지?”
중례는 곧 그것을 들고 유영교에게 갔다.
“정말 이 붉은 점이 있는 곳에 그것들을 숨겨뒀을까?”
유영교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유영교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중례 역시 오치수의 태도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다.
“워낙 교활한 자라 저도 선뜻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유영교는 한동안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안되겠네, 나를 한성부로 데려다 주게. 종사관 나리를 만나야겠네.”
“이 몸으로 뭘 하시려고요?”
“내게 생각이 있어. 날 한 번 믿어봐.”
중례는 여러 말로 유영교를 만류했지만, 유영교는 기어코 한성부로 가서 종사관 윤동진을 만났다. 윤동진은 만신창이가 된 유영교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정충석의 뒤를 쫓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정충석이라면 얼마 전에 돌아가신 정재술 대감의 서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도대체 그 자가 왜 자네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정충석의 뒤는 왜 쫓았는가?”
“정충석이 기생 계궁선을 차지하기 위해 진사 안광길을 살해한 것으로 판단하고 계속 놈의 뒤를 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충석의 수하들에게 당한 것입니다.”
“자네를 공격한 자들이 정충석의 수하들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증좌가 있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영교는 중례가 가져다 준 도면을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정충석의 집 안을 그린 도면입니다. 그리고 여기 붉은 점이 찍힌 곳에 증좌가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증좌가 있단 말인가?”
“정충석이 여기에다 안광길의 눈알과 생식기, 그리고 손가락을 묻어뒀습니다.”
“뭐라! 그게 정말인가?”
“네 확실합니다.”
“자네 말을 어떻게 믿는가?”
“일단 한 번 믿어보시지요.”
윤동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영교를 잠시 바라보더니,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좋아, 자네가 그토록 확신을 하니, 내 믿어봄세. 하지만 무턱대고 공신의 집을 들이칠 수는 없으니, 뭔가 적당한 구실이 필요하네.”
“제가 구실이 되겠습니다.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윤동진은 곧 유영교를 말에 태워 앞세우고는 한성부 나장 스무 명 남짓을 이끌고 정충석의 집을 들이쳤다. 이미 정충석이 출타하고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둔 터였다. 한성부 종사관이 왔다는 말에 정충석 집 청지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을 열어줬고, 유영교는 곧장 오치수가 붉은 점으로 표시해둔 곳으로 가서 수하 나장들에게 땅을 파게 했다. 그러자 작은 단지 하나가 묻혀 있었다. 단지 속에는 간장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속에 손을 넣어 휘저었더니, 사람 눈알과 생식기, 그리고 손가락이 나왔다.
“이놈, 이제 너는 죽었다!”
유영교는 이내 윤동진에게 증좌를 찾았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윤동진은 정충석의 가솔들을 모두 포박하여 마당에 모아놓고, 기생 계궁선을 끌어내어 문초했다.
“네 년은 정충석이 안광길을 살해한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그러자 계궁선이 울면서 실토했다.
“이 년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정충석의 손에 죽을까봐 차마 관아에 고할 수 없었습니다.”
윤동진은 곧 한성부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의금부에 협조를 요청하여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한 끝에 정충석과 그 수하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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