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마침내 확인된 아버지의 결백

중례는 고덕만의 입을 열 방도를 생각하던 끝에 그의 가족을 찾아보기로 했다. 닷새 동안 수소문 끝에 겨우 그들의 행방을 찾아냈다.
전옥서에 도착한 중례는 고덕만을 따로 불러내어 진료했다. 옥사 안은 아무래도 듣는 귀가 많아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덕만은 전에 없이 잔뜩 경계심을 드러내며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 일을 언급하자, 그의 경계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제가 좀 알아보았더니, 부인과 자녀분들은 무사히 지내고 있더군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소?”
“그 전에 뭐 하나 물어볼 말이 있소?”
“무엇이오? 내가 아는 것이면 다 말해주겠소.”
“혹 오치수 대행수님을 아시오?”
중례는 고덕만이 오치수의 이름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자 했다.
“오치수?”
고덕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중례는 고덕만이 오치수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래서 또 한 마디 툭 던져보았다.
“대행수님은 댁을 잘 아는 것 같던데...”
그 말에 고덕만이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짐작대로 고덕만은 오치수를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가 대행수님과 무척 친하거든요. 그래서 댁의 가족들을 대행수님께 부탁해 보려고요. 옛날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던 사이이니, 대행님께서 기꺼이 부인과 자녀들을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아, 안돼! 오치수는 안돼!”
“왜요? 오치수가 두렵습니까? 아니면 오치수에게 큰 죄라도 지었습니까?”
“부, 부탁이오. 제발 오치수에게 나에 대해 말하지 마시오.”
중례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고덕만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고덕만이 겁을 먹고 눈길을 피하자, 다그치듯 물었다.
“노상직이란 분을 아시오?”
“노상직? 노상직이라면...”
“의주 판관을 지낸 노상직 어른을 모르시오?”
“아, 아오.”
“그 분이 내 부친이오.”
“네?”
소스라치게 놀란 고덕만은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렸다.
“내 물음에 똑바로 대답하면 댁의 가족들은 무사할 것이고,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댁의 가족들은 모두 죽은 목숨일 거요. 댁이 나보다 오치수를 잘 알 테니 제대로 대답해야 할 겁니다.”
“아, 알았소. 뭐든 물어보시오. 아는 대로 다 대답해 드리리다.”
“제 부친은 스스로 목을 맨 것이오,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것이오?”
고덕만은 몸만 떨고 금방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알았소. 내 이 길로 가서 댁의 가족들을 모두 오치수에게 넘기겠소.”
“다, 다 말 하리다.”
“하나도 숨김없이 죄다 말하시오.”
“의원님의 부친께서는 살해되신 겁니다.”
“범인이 누구요?”
“범인은 모릅니다만 제 짐작으로는 정충석이 수하들을 시켜서 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살해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하시오?”
“오작인과 서리가 작성한 가검시서에 사망 원인을 늑사(勒死,목이 졸려 죽음)로 기록되어 있었고, 내가 다시 시신을 확인했을 때도 누군가가 끈으로 목을 졸라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서 중례는 당시 오작인이었던 대치가 남긴 가검시서를 내밀었다.
“그때 댁이 보았던 가검시서가 바로 이것이오?”
가검시서를 본 고덕만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이걸...”
“당시 오작인이었던 대치가 숨겨뒀던 것이오. 여기 있는 수결은 댁의 것이오?”
고덕만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수결은 당시 평양 감영의 서리로 있던 김영준의 것이오.”
“김영준,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소?”
“모르오. 그 사건이 벌어진 뒤에 갑자기 자취를 감췄소. 함께 검시에 참여했던 나장들도 모두 자취를 감췄소.”
“그러면 이것은 누가 한 짓이오?”
중례는 아버지 노상직의 유서를 조작하기 쓴 글씨들을 디밀었다. 하지만 고덕만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것이 무엇이오?”
“이 글씨들에 대해 모른단 말이오?”
“모르겠소. 도대체 이것들이 다 무엇이오?”
“누군가가 제 부친의 유서를 조작하기 위해 글씨 연습을 한 것이오.”
고덕만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판관 어른의 유서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당연히 조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누가 유서를 조작했는지는 모르오. 다만 정충석이 누군가를 시켜 유서를 조작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소.”
“그렇다면 제 부친의 죽음에 오치수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말이오?”
“당시 오치수는 평양에 오지도 않았으니, 판관 어른의 죽음에 오치수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소.”
“그렇다면 댁은 오치수를 언제 처음 보았소?”
“정재술 대감의 제의로 한성에 왔는데, 그때 처음 보았소.”
“그렇다면 댁은 왜 그렇게 오치수를 두려워하는 것이오?”
“정충석과 오치수가 정재술 대감 몰래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오. 다행히 그때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 야반도주를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벌써 놈들 손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오.”
“그들이 왜 그렇게 댁을 죽이려 한 것이오?”
“내 입을 막기 위함이었겠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그 사건과 관계된 사람 중에 살아남은 자가 없더라고요.”
“그러면 혹 의주 목사였던 윤철중 어른의 죽음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소?”
“그 일에 대해선 직접적으로 듣거나 본 바는 없소. 다만 의원의 부친인 노상직 판관을 죽인 것으로 봐서 정충석과 오치수가 공모하여 저지른 일이 아닐까 하고 짐작만 했을 뿐이오.”
고덕만은 확실히 윤철중의 죽음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중례는 한숨을 쏟아내며 고민에 빠졌다. 고덕만을 만나기만 하면 당시 사건의 전모를 모두 밝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막상 고덕만에게 얻어들은 말로는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고덕만의 말에 따른다면 아버지를 죽인 자는 정충석이고, 오치수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또한 정충석이 이미 죽어버려서 오치수와 정충석이 공모하여 윤철중을 죽였다는 것을 증명할 방도도 없었다.
중례가 그런 생각으로 고민에 휩싸여 있는데, 고덕만이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 식구들은 다 어떻게 하고 있소? 제발 좀 알려주시오.”
고덕만의 가족은 전옥서에서 멀지 않은 작은 초가를 빌려 임시로 머물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을 옥바라지하기 위해 온갖 잡일을 하며 돈을 구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번 돈으론 자식들의 입에 풀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도 거리에 나앉아 구걸을 하고 있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고덕만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중례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게 다 죄 없는 사람을 죽게 만들어 천벌을 받는 것이오. 내가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 정충석의 꼬드김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적어도 의원의 부친이 죄를 인정하고 자살을 했다는 누명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고덕만은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중례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덕만을 바라보다, 전옥서를 빠져나왔다. 전옥서 바깥에 여전히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중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싸락눈이 그의 눈으로 마구 파고들었다.
“이제 어떻게 아버지의 결백을 밝혀내지?”
중례는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힘으로는 아버지의 결백을 밝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오치수와 싸워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 스승님을 한 번 찾아가 보자. 혹 스승님이라면 내게 힘을 보태주실 수 있을지 몰라.”
중례는 어릴 적 스승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이수의 집으로 향했다. 스승 이수를 찾아뵙지 못한 세월이 어언 십 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찾아가는 것이 맞느냐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런 예의 따위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야 옛 스승을 찾는 핑계거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대과는 아니더라도 의과 취재에라도 합격을 했으니, 학문을 가르친 옛 스승을 찾는 명분은 된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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