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주치의, 노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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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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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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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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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나의 후궁이 되어 주겠느냐?

DUMMY


풍양궁의 주인인 그가 일찍 침소에 들자, 시녀들과 시위군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일찍 일과를 끝냈다. 소비 또한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일찌감치 잘 준비를 하였다. 이튿날 한성 신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상왕 이방원이 이번에 풍양궁으로 거둥한 것은 순전히 사냥 때문이었다. 중풍을 앓은 이래 제대로 사냥 길에 나서 보지 못한 지가 벌써 두 해를 넘긴 터였다. 그간 사냥터에 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저 구경만 했을 뿐 직접 사냥에 참여하진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직접 말을 타고 사냥을 즐겼다. 구안와사에서 벗어나자 중풍을 완전히 이겨냈다고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주상은 그런 부왕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함께 사냥에 참여하고, 함께 한성으로 환궁하자고 제안했다. 혹여 풍양궁에서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주상이 풍양궁에 계속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주상이 정사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고,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방원은 아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신궁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주상 전하 납시오!”





소비가 이불을 내리려고 하는데, 바깥에서 들린 소리였다. 소비가 급히 버선발로 뛰쳐나가자, 주상이 서 있었다.

“전하, 어인 일로 소인의 처소를 찾았나이까?”

“다행이 아직 자지 않았구나. 내 네게 물어볼 말이 있어 들렀다.”

“그렇다면 소인을 부르시면 될 것을...”




“놀랐느냐?”

“그저 황송하여...”

“허허, 물어볼 말이 있긴 한데... 늦은 밤이라 네 처소에 들어가긴 그렇고... 잠시 따를 수 있겠느냐?”




주상은 주변을 모두 물리고, 소비를 연못 속 수각 정자로 이끌고 갔다. 그리고 옆에 앉힌 뒤 말했다.

“낮에 봄볕이 좋더니, 밤엔 달빛이 매우 좋구나.”

“예 전하, 아주 좋은 봄밤이옵니다.”

“돌아보니, 내가 너를 본 지도 벌써 꽤 되었구나. 벌써 6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그간 너는 내겐 늘 은인이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세자 향을 살렸고, 난산으로 죽음의 문턱에 선 왕비와 왕자를 무사하게 하였다. 어디 그뿐이냐. 병마에 시달린 어마님을 돌보아 줬고, 이제 아바님까지 돌봐주고 있으니, 너는 그야말로 내겐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이다.”




“전하, 과찬이옵니다. 소인은 그저 의원으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이옵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




주상은 잠시 말을 끊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네게 따로 상을 내리자니 마땅한 것이 없고, 그렇다고 아녀자라 벼슬을 내리기도 애매하고... 음...”




주상은 또 말을 끊고 헛기침을 하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고심 끝에 결심하였는데... 음, 내 너에게 첩지를 내리려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첩지라 하시면?”

“그러니까 너를 후궁...”




그러자 소비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전하, 용서하십시오. 소인은 전하의 첩지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다니?”




“소인은 이미 정혼자가 있습니다. 제 스승께서 맺어준 인연이옵니다.”

“그, 그러냐? 몰랐구나.”

“황공하옵니다, 전하.”

“아, 아니다. 내 말은 없던 것으로 하거라. 으음... 달이 참 좋구나. 내일 모래가 보름이라지? ”




주상은 그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소비는 주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지 목례를 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소비는 주상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상하게 몸이 떨리고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혼자라니...”




소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입에서 정혼자라는 말이 튀어나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그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소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리에 힘이 빠져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후궁이라니... 첩지라니...”




소비는 혼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주상을 만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그를 남자로 바라본 적이 없지도 않았다. 어쩌면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런 감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감생심 그의 여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런 마음을 품을 수조차 없었다. 일국의 왕자로서 올려다보기도 벅찰 만큼 높은 곳에 서 있는 그였다. 더구나 그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용을 품에 안은 임금이 되었으니, 어찌 그를 마음에 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막상 후궁이니, 첩지니 하는 소리를 듣자, 가슴이 쿵쾅거리고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은 왜일까? 정녕 마음속에 그를 품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단 말인가?




소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땐 분명 주상을 남자로 생각한 적이 있긴 했지만, 상왕이 부모의 원수인 것을 알고는 완전히 마음을 접었었다. 그런 까닭에 주상의 후궁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달아오른 것은 분명 아니었다. 사실,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것은 후궁이니 첩지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상의 후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로 둘러댔던 정혼자라는 말이었다. 정혼자. 결혼상대로 정해 둔 사람. 소비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정혼자...”




그 말을 입에 담자,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노중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소비의 일생에서 가슴을 뜨겁게 만든 유일한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다. 소비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언제나 그 사람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파 누운 그녀의 어깨에 전해지던 그의 뜨거운 열기가 되살아나곤 했다.




소비는 갑자기 중례가 몹시 보고 싶었다. 중례를 못 본 지도 어언 3년이나 되었다. 그 3년 동안은 소비에겐 그야말로 암흑 같은 시간이었다. 부모를 죽인 두 원수를 간병하면서 처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 된 것을 후회했던 시간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매일같이 대하며 그들의 숨이 끊어지길 기다리는 삶이란 한 마디로 지옥 그 자체였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 매일같이 확인해야 했다. 매 순간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고, 매 순간 그 불길을 끄기 위해 스스로와 싸워야 했다. 그리고 그들 둘 중 하나는 황천길로 떠났다. 또한 남은 하나도 숨이 끊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속엔 죽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원수 이방원의 몸속에 똬리를 튼 죽음이 매일같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소비 자신에게도 옮겨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누군가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죽음의 늪에 함께 빠지는 일이었다.




소비는 이제 그만 그 죽음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누군가가 죽기를 바라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중례가 더 보고 싶은 지도 몰랐다. 그가 곁에 있다면 당장에라도 죽음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주상이 후궁이니 첩지니 하는 말을 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그런 감정에 빠진 적이 없었다. 오로지 불구대천의 원수 이방원이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한 후 어머니의 돌무덤에 달려가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당신을 죽인 그 놈이 마침내 죽었다고, 그러니 이제 편안히 저 세상으로 가시라고, 그래서 더 이상 이 딸년을 염려하지 마시라고.




그런데 왜 주상이 자기의 여자가 되라고 하는 순간, 원수 놈의 마지막을 어머니께 알리겠다는 마음보다 중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서게 됐던 것일까? 소비는 자신의 그런 심경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도 들여다보고 저렇게도 헤아려보았지만 ㄱ결코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얻은 결론 하나는 있었다. 주상의 후궁이 되는 순간, 영원히 죽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소비는 생각에 생각을 덧칠하고, 그 덧칠한 생각 위에 또 다른 생각들을 덮고 또 덮으며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망상 속에서 밤을 보냈다. 얼핏 꿈속에서 중례를 본 듯도 했고, 중례의 얼굴이 다시 주상의 얼굴로 변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상이 갑자기 이방원으로 돌변하여 자신의 목을 조르며 소리쳤다.

“네 년이 독살처럼 내 몸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흐흐흐, 이 년 내 반드시 너부터 죽이고 말리라!”

소비는 목을 잡고 한참을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내다 가까스로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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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제67화 마지막화 - 병마와 의술 그리고 죽음 +1 24.07.04 38 1 11쪽
66 제66화 떠나는 주상, 찾아온 병마 24.07.04 22 0 12쪽
65 제65화 훈민정음을 공표하는 세종 +1 24.07.03 28 0 11쪽
64 제64화 문자 창제를 결심하는 주상 24.07.02 29 0 11쪽
63 제63화 온갖 병으로 시달리는 임금 24.07.01 53 0 15쪽
62 제62화 오치수의 몰락 24.06.30 33 0 10쪽
61 제61화 늙은 호랑이 사냥 24.06.29 28 0 12쪽
60 제 60화 마침내 형틀에 묶인 오치수 24.06.28 50 0 10쪽
59 제59화 스승 탄선의 유언 그리고 그들의 결합 24.06.27 44 0 11쪽
58 제58화 도성에 몰아닥친 역병 24.06.26 43 0 10쪽
57 제57화 이방원의 죽음을 지켜보는 소비 24.06.25 36 0 16쪽
» 제56화 나의 후궁이 되어 주겠느냐? 24.06.24 39 0 9쪽
55 제55화 소비의 신비로운 침술 24.06.21 40 0 12쪽
54 제54화 양녕의 병을 치료하고 임금의 신임을 얻은 노중례 24.06.20 41 0 12쪽
53 제53화 마침내 확인된 아버지의 결백 24.06.19 58 1 9쪽
52 제52화 결정적인 증인 24.06.18 39 0 14쪽
51 제51화 일망타진 24.06.17 41 1 8쪽
50 제50화 쥐도 새도 모르게 24.06.16 35 1 8쪽
49 제49화 이놈, 반드시 너를 죽인다 24.06.16 43 1 11쪽
48 제48화 하늘의 단죄, 다시 생모의 무덤을 찾은 소비 24.06.15 41 0 11쪽
47 제47화 마음을 털고 일어나는 소비 24.06.15 33 0 8쪽
46 제46화 영영 이별 24.06.14 39 0 12쪽
45 제45화 대마도 정벌군 속에서 만난 중례와 상례 24.06.13 37 1 14쪽
44 제44화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된 가이 24.06.12 41 1 10쪽
43 제43화 국무 가이의 실종 24.06.11 42 0 13쪽
42 제42화 호랑이굴에서 만난 원수 24.06.10 39 1 9쪽
41 제41화 기다려라 오치수 24.06.09 42 0 10쪽
40 제40화 집현전을 키우리라 24.06.08 46 1 13쪽
39 제39화 대마도 정벌에 나서는 이방원, 햇병아리 임금의 자괴감 24.06.06 5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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