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문자 창제를 결심하는 주상

중례가 물러가자, 주상은 빙그레 웃었다. 중례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나마 지금 정도의 건강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복이 많아.”
중례가 어의가 되기 전에는 주로 양홍달과 양홍적이 주상의 병을 돌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의술은 중례의 실력에 미치지 못했다. 거기다 중례는 그들에 비해 학문에도 밝고 문장도 좋았다. 덕분에 주상은 숙원 중 하나였던 <향약집성방> 편찬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향약집성방>이 완성된 지도 벌써 10년이나 지났다. 노중례를 얻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재위 15년(1433년) 6월에 <향약집성방>이 완성되자, 주상은 권채에게 서문을 쓰게 했다. 권채가 올린 서문 중에 아직도 주상의 뇌리에 생생히 박혀 있는 문구가 있었다. 주상은 지금도 <향약집성방>을 떠올리면 그 문구를 재미 삼아 줄줄 외운다.
“오직 우리나라는 하늘이 한 구역을 만들어 대동(大東)을 점거하고, 산과 바다에는 무진장한 보화가 있고 풀과 나무에는 약재를 생산하여 무릇 민생을 기르고 병을 치료할 만한 것이 구비되지 아니한 것이 없으나, 다만 옛날부터 의학이 발달되지 못하여 약을 시기에 맞추어 채취하지 못하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고 먼 것을 구하여, 사람이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니, 이는 7년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약은 구하지 못하고 병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주상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향약집성방> 편찬을 숙원사업으로 삼았다. 약초란 모름지기 자신이 사는 곳에서 구해야 효험이 있는 것이고, 약이란 시기를 놓치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때문에 병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흔히 늘려 있는 약초를 사용하여 적절한 시기에 약으로 만들어 먹여야만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주상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향약집성방> 85권을 만들었고, 덕분에 조선 의학은 이제 중국 의학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향약집성방>으로 보완된 조선 의학은 1만 706건의 치료법으로 959종의 병증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까닭이다. 또한 주상은 향약을 체계적으로 채취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여 <향약채취월령>을 편찬했다.
하지만 주상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 의학을 확립하기 위해 또 하나의 작업을 지시했다. 중국과 조선의 모든 의학서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이었다. 말하자면 중국 최초의 전문의학서인 <황제내경>으로부터 진, 한, 당, 송, 원, 명의 모든 의서와 조선에 전해지고 있는 모든 의서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의학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이었다. 주상은 이미 속으로 이 의학백과대사전의 명칭을 <의방유취>로 정해 뒀다.
주상은 이 작업을 위해 6년 전부터 명나라 연경에 수많은 인재를 파견했다. 그리고 자료 확보가 끝난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편찬 작업에 돌입했다. 노중례는 그 모든 작업을 최종적으로 감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편찬은 주상이 구상한 ‘활인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제 중 하나였다. 주상은 왕위에 오른 이후로 어떻게 ‘활인의 정치’를 구체화할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여러 원로와 젊은 학자, 그리고 수많은 독서와 직접적인 통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임금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백성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주상은 이러한 임금의 책무를 이루기 위해서 네 가지 실천 과제를 설정했다. 그 첫 번째 과제가 백성 개개인의 건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백성의 건강을 위해 무엇보다도 의학의 발전이 급선무였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편찬은 바로 의학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사업이었다.
의학의 발전이 개인의 생명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농업의 발전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실정과 조선의 땅에 맞는 농사법을 개발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배포했다. <농사직설>를 편찬하여 배포한 목적은 단 하나였다. 같은 크기의 땅에서도 재배법만 개량하면 훨씬 더 많은 소산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전분육등법과 연분구등법을 마련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였다.
하지만 개인의 건강이 좋아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해서 백성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깥으론 외적을 막아 백성이 재산과 땅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영토를 확립하고 군대를 강화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야 했고, 그 일환으로 왜구의 준동을 막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여진의 침략을 예방할 목적으로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내치에 집중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국정을 안정시켜 백성이 나라를 믿고 의지하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집현전을 설립하여 미래의 동량을 키우고, 재상 정치를 실현하는 차원에서 의정부서사제를 부활시켰으며, 행정조직을 혁신하였다.
주상은 이십여 년의 통치를 통해 이 네 가지 과제를 얼추 이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상은 몇 년 전부터 다섯 번째 과제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다섯 번째 과제는 왕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뛰어난 인재들과 함께 의논해서 해결할 일도 아니었다. 반드시 홀로 해야 할 일이었고, 그리고 꼭 이뤄야할 일이었다.
주상은 이 과제를 실행하기 위해 왕권까지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왕권을 분산하여 의정부의 재상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른바 의정부서사제로 불리는 이 제도를 통해 조정의 근간이 되는 이,호,예,병,형,공으로 이뤄진 육조의 서무결제권을 정승들에게 넘겼다. 재위 18년(1436년)에 단행한 이 조치 이후에 주상은 또 한 번 왕권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아예 세자에게 왕의 서무결제권을 넘겨버렸다.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빗발쳤지만 주상은 요지부동이었다. 다섯 번째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왕권을 내려놓고 뒷방으로 물려나지 않는 한 이 과제를 해결할 시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상이 이 일에 매달린 지도 어언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15년 중에 10년은 그저 이 일을 마음에 품고만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의정부서사제를 마련하여 왕권을 대대적으로 의정부로 넘겼다. 하지만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한 뒤에도 여전히 업무에 시달렸다. 그래서 재위 24년(1442년)인 작년엔 아예 첨사원을 설치하고 세자 향에게 서무결제권을 넘겨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7년 동안의 노력 끝에 다섯 번째 과제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공표만 하면 될 일이다.”
주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갔다. 그 세월의 첫 머리에 그 사건이 있었다. 때는 재위 10년(1428년) 10월이었다. 사헌부에서 이런 보고를 하였다.
“경상도 진주에서 김화라는 자가 아비를 살해했습니다. 부모를 죽인 죄는 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또한 강상의 죄를 범한 터라 저자에서 참하고 효수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상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아들이 아비를 죽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김화라는 자가 정말 아비를 죽였는가?”
“그러하옵니다.”
“그 자는 어떤 자이며, 무엇을 하는 자인가?”
“그저 무지한 백성이옵니다.”
“아무리 무지한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자신을 낳아준 어버이를 살해한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임금이 덕이 없어 생긴 일이다. 임금이 백성을 제대로 교화했더라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어찌 일어나겠는가?”
주상은 자책을 거듭하다 이 모든 것이 무지한 백성이 윤리를 몰라 벌인 일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며칠 뒤 경연 자리에서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백성들이 삼강의 도리를 알 수 있도록 교화하여야 하겠다. 그러니 백성을 교화할 좋은 방책이 있거든 말해보라.”
그러자 신하들이 의논 끝에 효행록 등의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효행과 예의를 알게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서적을 널리 반포해봤자, 글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글을 몰라 책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책을 배포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에 글과 함께 그림을 함께 그려 배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 책이 곧 <삼강행실도>였다. 그런데 <삼강행실도>가 배포된 것은 주상 재위 16년(1434년)으로 김화 사건이 난 지 무려 6년이나 지나서였다. 그리고 그 6년 동안 숱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그 살인사건 중에는 패륜범죄도 많았다. 그 때문에 주상은 백성들이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것은 법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패륜 범죄는 무지몽매한 자들이 저지르는 것이니, 그들에게 법을 알게 하면 범죄도 줄어들고 패륜도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다.
주상은 곧 이조판서 허조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도 율문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린 다음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무지한 백성은 율문을 알지도 못하니,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 구분도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백성들로 하여금 율문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으니 큰 죄에 해당되는 조항만 가려 뽑아서 이두로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라. 그러면 어리석은 백성이 스스로 범죄를 피할 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허조는 반대했다.
“신은 폐단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간악한 백성이 율문을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골라내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생길 것입니다.”
이에 주상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죄를 짓는 줄 알지도 못하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옳다는 말인가?”
주상은 곧 집현전에 명하여 옛 백성들이 법률을 익히게 했던 일을 상고하여 정리해 오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율문을 이두로 만들어 배포하려 하니, 거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두로 율문을 배포한다고 해도 이두를 아는 사람만 그 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밑바닥 백성들은 이두를 알지 못했다. 이두 역시 결코 배우기 쉽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이두를 아는 자도 많지 않았다.
결국, 주상은 고민 끝에 율문을 이두로 번역하여 배포하라는 명령을 철회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주상은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럴 때 만약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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