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훈민정음을 공표하는 세종

막상 그런 생각을 하자, 주상은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글을 몰라서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히거나 죽는 사람은 또 얼마나 억울할까 싶었다. 그런 생각이 이어지자, 글을 몰라 억울하게 죽는 사람의 입장에선 글이 곧 생명줄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의술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 시절 탄선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래, 의술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문자를 알게 하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러자 주상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문자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여러 나라의 운서(언어학 책)를 구해 와서 연구해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나라의 문자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백성들을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배우고 쉽게 쓸 수 있는 문자가 꼭 있어야 하는데,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구나.”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4년을 더 보내다가, 마침내 주상은 결심했다.
“세상에 없다면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백성들이 쉽게 쓰고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들려고 하니, 넘어할 산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난관은 바로 조정 대신들과 학문을 익히 학자들이었다. 그들에겐 문자란 곧 권력의 기반이었다. 문자를 통해 학문을 익히고, 그 학문을 통해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며, 관리가 가진 국가 권력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만약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가 있어 누구나 학문에 접근할 수 있다면 그들은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염려하게 될 게 뻔했다. 때문에 문자를 아는 관리와 학자들은 필시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을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문자 창제 작업을 함께 할 수도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면 누구와 이 일을 의논하여 함께 진행한단 말인가?”
주상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 일은 나 홀로 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조정 대신들과 상의하면 시작도 하기 전에 좌절되고 말 것이다.”
주상은 이미 법전을 이두로 번역하여 배포하는 일에서 실패를 맛보았다. 그 쓰라린 경험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것은 조정의 관리와 이 나라의 선비들은 백성들이 문자를 아는 것을 결단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목숨보다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문자 창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새로운 문자 창제에 성공하면 기습적으로 공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결심 아래 주상은 기어코 홀로 문자 창제 작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무려 7년 동안의 연구 끝에 새로운 문자 창제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도 난관은 남아 있었다.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여 공포한다고 해도 관리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또한 설사 일시적으로 새로운 문자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정착시키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주상은 새로운 문자의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지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었다.
주상이 훈민정음을 공표하기로 결정한 날은 바로 열흘 뒤인 섣달 그믐날이었다. 설을 하루 앞둔 섣달 그믐날을 공표일로 잡은 것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신년이 시작되면 정초라 조정이 어순해지기 마련이었다. 대신과 관료들의 인사이동과 관련한 논의가 시작되는 때이기도 했고, 지방관 교체를 위해 물밑 작업을 하는 때이기도 했다. 때문에 적어도 정월 한 달 동안은 조정의 중책을 논의하긴 쉽지 않은 기간이었다. 주상은 이 어순선한 시기를 이용하여 훈민정음 창제를 공식화하고 동시에 저항 세력의 힘을 빼놓을 계획이었다. 그야말로 숨 쉴 틈 없이 밀어붙이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저항하는 세력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저항을 강력하게 저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훈민정음을 공표하기 이전에 할 일도 많았다. 미리 우군을 최대한 확보해야 했다. 그것도 비밀리에 아주 급속도로 진행해야 했다.
주상은 우군으로 삼기에 적당한 인물들을 먼저 추려보았다. 무엇보다도 세자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새로운 문자에 대해 알리고 사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주상은 세자를 먼저 불러들였다. 세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주상이 운학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주상은 두어 달 전에 이미 세자에게 이런 귀띔을 했었다.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쉽게 배우고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 있다. 이제 완성이 머지않았으니, 그리 알도록 하라. 하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세자 향은 진중하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주상은 적어도 세자의 입에서 말이 샐 염려는 없다고 확신했다.
“만약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아바님이 만드신 글자를 배운다면 얼마 만에 익힐 수 있을까요?”
세자 향은 놀라는 기색 없이 그렇게 물었다.
“빠르면 열흘이면 익힐 것이다.”
그 말에 세자 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획의 원리를 알고 쓰고 읽고 이해하는데 열흘이면 된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그 글자는 몇 개나 됩니까?”
“스물여덟글자다.”
“스물여덟글자로 어떻게?”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네게도 곧 보여줄 테니, 기다려 보거라.”
주상의 부름을 받고 세자가 어전으로 들었다.
“이제 네게 내가 만든 새로운 문자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면서 세자 앞에 새로운 문자 스물여덟 글자를 펼쳐 놓았다. 하지만 세자는 아주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소자가 보기엔 그저 어린아이가 문자를 배우기에 앞서 획을 긋는 연습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설명을 해주마. 네가 보기엔 조악해 보이는 이 단순한 글자 속에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인 음양과 오행의 이치가 모두 들어 있다. 음양오행의 원리를 이렇다. 세상의 모든 만물의 근원은 곧 태극이며,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 움직임이 극도에 이르면 고요하게 되는데, 고요하여 음을 낳는다. 또한 음과 양이 결합하여 다섯 가지 성질을 낳으니, 그것이 곧 오행이 아니겠느냐?
이러한 음양오행의 원리는 모든 만물에 다 해당되는데, 문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문자에도 음과 양이 있는데, 음은 곧 뜻을 담고, 양은 곧 소리를 담는다. 그래서 문자는 뜻글자와 소리글자로 나눠진다. 그 중에 우리가 쓰는 문자인 한자는 뜻글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뜻글자 말고 소리글자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자와 같은 뜻글자는 문자에 뜻을 새겨 넣기엔 유용하지만 소리를 제대로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또한 모든 사물마다 뜻을 새겨 넣다보니 글자 수가 수천수만 가지가 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익히는데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소리글자는 적은 글자 수로 수많은 소리를 담는데 매우 유용하다. 사람 소리는 물론이고, 사물의 이름이나 바람소리 같이 의미 없는 소리도 모두 표기할 수 있다. 또한 글자 수가 적고 소리나는 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편리하다. 다만 단점이라면 낱자 하나하나에 특별한 뜻을 담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바님께서 만든 이 글자는 뜻글자가 아닌 소리글자란 말씀이군요?”
“그렇다. 나는 이 글자를 훈민정음이라 이름 붙였다. 소리글자는 원래 홀로 소리가 되는 모음과 모음과 반드시 결합을 해야 소리가 되는 자음으로 구성되는데, 훈민정음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스물여덟 글자 중에 홀로 소리가 되는 모음이 열하나이고, 자음이 열일곱이다. 이 중에 자음 열일곱은 다시 오행의 법칙에 따라 다섯으로 구분되는데, 그 소리가 뿌리의 무엇인가에 따라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으로 나눠진다. 이들 글자는 또한 초성, 중성, 종성이 합하여 소리를 내는데...”
주상은 한동안 훈민정음의 원리를 설명한 뒤에, 쓰는 법과 읽는 법을 세자 향에게 가르쳤다. 그러자 이내 세자가 자신의 이름을 훈민정음으로 쓰고 물었다.
“제 이름을 이렇게 쓰는 것이 옳은지요?”
“그렇다.”
“그렇다면 세자는 이렇게 쓰는 것이 옳은지요?”
“그렇다.”
“어머니는 이렇게 쓰는 것이 옳은지요?”
“그렇다.”
세자는 곧 자신이 하는 말들을 훈민정음으로 옮겨놓고 역시 옳은 지 물었고, 주상 역시 옳다고 대답했다. 그렇듯 한참을 묻고 또 묻더니, 세자가 경탄을 금하지 못하며 말했다.
“참으로 신기한 글자입니다. 이렇게 쉽게 익히고, 이렇게 간단하게 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자신의 말을 글로 쓰고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글로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주상은 몹시 기꺼워하며 즐거워하였다.
“어떠냐? 이 글자를 우리 백성에게 배포하면 누구든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느냐?”
“물론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따름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비한 글자를 만들어 내셨습니까?”
그런 세자의 반응에 힘입어 주상은 적자와 서자를 가리지 않고 아들을 불러들여 훈민정음을 가르쳐보았다. 그랬더니 역시 그들의 반응도 세자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중전과 후궁, 공주와 며느리들을 불러들여 훈민정음을 가르쳤더니, 그들 역시 어렵지 않게 익혔다.
하지만 주상은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공표할 때까지 훈민정음의 존재로 철저히 비밀에 붙일 것을 당부했다.
주상은 영의정 황희를 비롯한 정승들과 육조의 판서들을 불러들여 훈민정음을 창제했음을 알렸다. 또한 그들에게도 공표일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붙일 것을 다짐받았다. 이후엔 집현전 학자들 중에 유연한 성향을 가진 자들을 불러들여 역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알리고, 그들에 창제의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했다. 이런 일련의 정지작업을 마친 주상은 마침내 계해년(1443년)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 아침에 전격적으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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