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주치의, 노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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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산
작품등록일 :
2024.05.11 06:15
최근연재일 :
2024.07.04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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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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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떠나는 주상, 찾아온 병마

DUMMY



“소비야, 소비야.”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소비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누구세요?”

소비가 안방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섰다. 대청에는 안개가 잔뜩 밀려와 있었다. 삼월 들어 갑자기 날씨가 풀린 탓에 안개 끼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여태껏 이토록 짙은 안개는 없었다. 한 발자국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소비야, 나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선뜻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소비는 안개를 헤치고 대청 아래로 내려섰다. 마당에도 안개가 잔뜩 밀려와 있었다.

“날 모르겠느냐? 내 목소리를 잊은 것이냐?”





그때서야 소비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챘다.

“어, 어머니.”

양모 가이의 음성이 분명했다.

“그래, 나다. 뭐 하는 것이냐? 서두르지 않고.”





그때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가이가 국무 복장을 하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어서 가자, 이리 오느라.”

가이는 이미 돌아서 대문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자는 말씀입니까?”

“어디긴 어디냐, 대궐이지.”

“대궐요?”

“몰랐느냐? 오늘 큰 굿판을 벌이기로 했단다.”

“굿판을요?”





그때, 가이가 고개를 돌려 소비를 쳐다보았다. 가이의 얼굴은 썩은 채로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다. 소비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나자, 가이가 소비의 손을 덥석 잡고 끌어당겼다.

“가자, 궁궐에 오늘 큰 굿판이 벌어진다니까...”





소비는 비명을 지르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며칠째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그리고 마침내 양모 가이까지 꿈에 나타났다. 이상하게 가이가 꿈에 나타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4년 전에 소헌 왕후 심씨가 죽던 날도 꿈에 가이가 나타났었다.





가이는 마당으로 나가 북을로 바라보았다. 남편 중례는 사흘 째 퇴청하지 않았다. 주상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주상이 죽는다면 중례는 또 벼슬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그간 중례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야 했다. <의방유취> 편찬 작업에 투입될 무렵에 중례는 첨지중추원사에 올라 있었다. 정3품의 당상관 벼슬이었다. 물론 실권은 없는 무관직이었다. 의관직 중에서 최고위직인 전의감 판사를 거친 의관들이 늙으면 실무 없는 무관직이나 검교직(실무 없는 임시직)을 내리곤 했다. 중례에게 내린 첨지중추원사도 그 중 하나였다. 전의감의 실무에서 물러난 의관을 내의원 어의로 계속 쓰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어쨌든 정3품 당상관 벼슬인 만큼 고위직임에 분명했다. 또한 그에 맞는 녹봉도 지급된다. 의관으로서는 출세의 정점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중례가 중추원 참치에 제수된 것은 주상의 병을 여러 차례 회복시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이었다.





하지만 중추원 첨지가 된 이래 중례에겐 영욕의 세월이 반복되었다. 주상 재위 27년(1445년) 10월 27일엔 조선 의학 발전을 위한 숙원 사업이었던 <의방유취> 편찬에 성공했다. 무려 365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의서였다. 중례는 이 사업에 최종 감수자로 참여하여 의관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첨지 자리를 내놓고 의관 중에 가장 말단직으로 강등되어야 했다. 소헌왕후 심 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이었다. 왕이나 왕비, 세자가 죽으면 담당 의관은 으레 유배되거나 벼슬을 뺏기고 쫓겨나는 것은 관례였다.





다행히 중례는 유배는 면하였고, 몇 달 만에 벼슬도 되찾았다. 그런데 벼슬을 회복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수양대군의 학질 치료를 소홀히 한 죄로 전의감 영사(심부름꾼)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 뒤로 10개월 만에 벼슬을 되찾았으나, 또다시 세자의 종기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여 벼슬을 빼앗겼다가 세자 향의 병이 나은 덕에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듯 중례는 중추원 첨지가 된 후로 부침이 심했다. 소비는 남편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이상하게 가이가 나타나는 꿈을 꿨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가이가 꿈에 나타났으니, 확실히 불길한 징조였다.

“혹 주상께서...”





소비는 주상의 죽음이 임박한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무려 사흘이나 남편이 퇴청하지 않는 것만 봐도 주상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분명했다. 주상이 죽는다면 어의 중례는 유배를 면하지 못할 터였다.





중례는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주상의 병을 돌보느라 자신의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저 눈만 뜨면 어전으로 달려가 주상의 병세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다. 주상의 병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소갈증은 이미 오래 된 고질이었고, 거기에 종기와 중풍, 안질, 요통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루도 독서를 거르는 날이 없고, 중요 국사는 반드시 챙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라도 중례의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주상은 정상적인 생활이 되지 않았다. 결국, 주상의 모든 병증은 중례의 과로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중례는 요즘 이상하게 건망증이 심해졌다. 소비가 보기엔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병증이었다. 그 때문에 소비는 침과 뜸은 물론 중례를 위한 탕약을 달여 대기 바빴다.





소비는 주상의 병세도 걱정스러웠지만, 남편 중례의 건강이 더 염려되었다. 중례는 주상보다 나이도 많고, 고생도 많이 하여 심신이 매우 쇠약한 상태였다. 그런데 만약 주상이 사망하여 유배라도 가게 되면 병세가 더욱 악화될 게 뻔했다.

“제발, 별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소비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 시간 주상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 동별궁에선 소비의 불안이 현실로 닥치고 있었다. 중례와 여러 어의들이 날밤을 새워가며 주상을 치료했지만, 주상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었다. 주상도 이미 죽음을 예감했는지 중례와 어의들을 불러 놓고 가느다랗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그만 하라. 인명은 제천이라 하였다. 침이든 뜸이든 약이든 이제 멈춰라. 내 명이 다 했음을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중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 어찌 그런 명을 내리시옵니까? 분부 받들 수 없사옵니다. 용서하소서.”

주상이 빙긋이 웃었다.

“중례, 자네 손 놈 주게.”





주상은 열흘 전에 이미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중례가 손을 잡자, 주상이 말했다.

“사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명줄은 이미 오래 전에 끊어졌을 것이네. 자네 덕에 내가 할 일을 다 할 수 있었네. 왕비와 세자는 자네 처가 살려주었고, 나는 또 자네가 살려줬네. 정말 고마웠네. 이젠 됐네. 자네도 알지 않는가? 명이 다하면 의술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말을 끝으로 주상은 중례와 어의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세자와 대군들을 불러들였다.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 특히 세자는 나의 장례로 인해 지나치게 몸을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한 장례는 검소하게 하라.”





세자 향과 대군들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울지들 마라. 그리고 내 말을 명심하라. 내가 죽더라도 노중례를 비롯한 어의들을 벌하지 말라. 그 사람들은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당부하건대, 이 아비가 만든 훈민정음을 끝까지 지키고 가꾸어 모든 백성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아비의 마지막 부탁...”





그 말을 끝으로 주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주상이 호흡이 거칠어지자, 세자가 급히 중례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중례가 주상의 맥을 잡았을 땐 이미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중례는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별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별궁 밖에서 의관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대기했다. 치료하던 주군이 죽었으니, 왕을 보살피던 의관들은 모두 죄인 신세였다.





국상이 시작되고, 산릉 조성 작업이 한창일 때, 중례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유배 길에 올랐다. 유배지는 황해도 곡산이었다. 그런데 곡산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는데 새로운 임금으로부터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허겁지겁 한성으로 돌아와 새 임금을 배알하니, 이렇게 말했다.





“대행대왕께서 의관들을 벌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소. 하지만 국상이 나면 담당 의관들을 벌주는 것은 오랜 관습이니, 어쩔 수 없이 벼슬을 떼고 유배를 보낸 것이오.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지만 중례는 내의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 어의에서 물러나 활인원에 머물며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중례가 활인원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스승 탄선의 뜻을 잇기 위함이었다. 소비도 탄선을 뜻을 잇기 위해 몇 년 전에 이미 활인원으로 돌아와 있었다. 활인원엔 여전히 의원이 부족했고, 환자는 넘쳐났다. 그 때문에 늘 손이 부족했다. 중례는 하루라도 빨리 활인원으로 돌아가 부족한 손을 채울 생각이었다.





중례는 활인원을 맡은 지 지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아 내의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새 임금의 몸에 큰 종기가 났는데, 병증이 매우 심각하였다. 내의원 어의들이 총 동원되어 치료했지만, 쉽게 낫지 않았다. 그래서 종기 치료 경험이 많은 중례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임금은 세자 시절에 이미 종기로 엄청난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종기의 크기가 무려 한 자나 되었고, 빼낸 고름만 해도 열 홉이 넘었다. 그럼에도 중례는 그 종기를 무사히 완치시켰다.





그 때에 비한다면 이번 종기는 작은 편이었다. 크기는 두 치 정도였고, 고름도 많이 차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종기의 뿌리가 매우 깊었다. 거기다 초기 치료를 잘못하여 잔뜩 덧난 상태였다. 고름을 빨리 빼낼 욕심에 너무 서둘러 종기를 찢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임금은 빈전을 지키느라 무리를 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닥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고, 수라도 제대로 들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있었다.





중례는 우선 임금의 몸을 보하고, 덧난 상처부터 치료했다. 또한 임금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빈전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고, 고약으로 고름을 다스린 끝에 가까스로 종기를 잠재웠다. 하지만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었다.

“전하, 무리를 하시면 또 재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섭생을 잘 하셔야 합니다. 대행대왕께서 장례를 간소하게 하고 너무 무리하시지 말라 유언하신 것도 모두 이런 일을 예상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듯 새 임금의 병증을 가라앉히고, 중례는 내의원에서 물러났다. 중례의 몸에 병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중례 스스로 맥을 잡아보았더니, 결코 예사 병이 아니었다. 언제 찾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방심하는 사이에 그의 몸 깊이 적취가 자라고 있었다.





중례는 자신의 적취를 아내 소비에게 비밀로 하기로 결심했다. 적취는 너무 깊은 곳에 있었고, 의술로는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섭생을 잘 하면 적취가 자라는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내게 남은 명줄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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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제67화 마지막화 - 병마와 의술 그리고 죽음 +1 24.07.04 38 1 11쪽
» 제66화 떠나는 주상, 찾아온 병마 24.07.04 22 0 12쪽
65 제65화 훈민정음을 공표하는 세종 +1 24.07.03 28 0 11쪽
64 제64화 문자 창제를 결심하는 주상 24.07.02 29 0 11쪽
63 제63화 온갖 병으로 시달리는 임금 24.07.01 53 0 15쪽
62 제62화 오치수의 몰락 24.06.30 33 0 10쪽
61 제61화 늙은 호랑이 사냥 24.06.29 29 0 12쪽
60 제 60화 마침내 형틀에 묶인 오치수 24.06.28 50 0 10쪽
59 제59화 스승 탄선의 유언 그리고 그들의 결합 24.06.27 44 0 11쪽
58 제58화 도성에 몰아닥친 역병 24.06.26 43 0 10쪽
57 제57화 이방원의 죽음을 지켜보는 소비 24.06.25 36 0 16쪽
56 제56화 나의 후궁이 되어 주겠느냐? 24.06.24 39 0 9쪽
55 제55화 소비의 신비로운 침술 24.06.21 40 0 12쪽
54 제54화 양녕의 병을 치료하고 임금의 신임을 얻은 노중례 24.06.20 41 0 12쪽
53 제53화 마침내 확인된 아버지의 결백 24.06.19 59 1 9쪽
52 제52화 결정적인 증인 24.06.18 39 0 14쪽
51 제51화 일망타진 24.06.17 41 1 8쪽
50 제50화 쥐도 새도 모르게 24.06.16 35 1 8쪽
49 제49화 이놈, 반드시 너를 죽인다 24.06.16 43 1 11쪽
48 제48화 하늘의 단죄, 다시 생모의 무덤을 찾은 소비 24.06.15 41 0 11쪽
47 제47화 마음을 털고 일어나는 소비 24.06.15 33 0 8쪽
46 제46화 영영 이별 24.06.14 39 0 12쪽
45 제45화 대마도 정벌군 속에서 만난 중례와 상례 24.06.13 37 1 14쪽
44 제44화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된 가이 24.06.12 41 1 10쪽
43 제43화 국무 가이의 실종 24.06.11 44 0 13쪽
42 제42화 호랑이굴에서 만난 원수 24.06.10 39 1 9쪽
41 제41화 기다려라 오치수 24.06.09 42 0 10쪽
40 제40화 집현전을 키우리라 24.06.08 46 1 13쪽
39 제39화 대마도 정벌에 나서는 이방원, 햇병아리 임금의 자괴감 24.06.06 5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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