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마지막화 - 병마와 의술 그리고 죽음

중례는 고요히 앉아 맥을 짚고 눈을 감았다. 제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도 하늘이 정한 명줄을 늘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명줄이 끊어질 때까지 무방비 상태로 기다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적취의 맥이 잡히는 곳은 비장이었다. 비장은 너무 깊이 있어 비록 적취가 생겼다 해도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이었다. 또한 막상 병증이 시작되면 보름도 되지 않아 명줄이 끊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언제 발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될지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관건은 발병 시기를 늦추는 것이었다.
“약을 쓰면 필시 아내가 알 터인데 어쩐다?”
발병 시기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은 탕약밖에 없었다. 비장의 발병엔 침과 뜸은 한계가 분명했다. 그렇다고 탕약을 쓰면 소비가 바로 남편의 비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것이다. 중례는 고칠 수 없는 병증 때문에 아내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중례는 며칠 동안 약을 쓰지 않고 고민만 거듭했다.
그런 상황에서 개성의 여러 고을에 역병이 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개성은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조정에서는 역병이 한양까지 번져올 것을 염려하며 빨리 방역단을 꾸려야 한다고 전의감을 다그쳤다. 중례는 곧 자원하여 방역단을 꾸리고 역병잡이 선봉대로 나섰다. 그저 비장의 적취가 자라는 것을 앉아서 기다리다 죽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탕약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방역단을 이끌고 개성으로 가면 아내 몰래 약을 먹을 수도 있고, 동시에 역병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방역단을 이끌고 개성을 다녀올까 합니다. 서너 달이면 돌아올 것이오.”
그러자 아내 소비가 약 꾸러미를 챙겨주며 말했다.
“이 약을 하루도 거르지 말고 달여 드십시오. 그리고 얼마 뒤에 저도 가겠습니다.”
“아니오. 이번에는 나 혼자 해결하고 올 것이니, 부인은 활인원을 지키시오. 역병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활인원의 병자를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소비는 중례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활인원을 지키겠습니다. 제가 드린 약재는 꼭꼭 달여 드셔야 합니다.”
“걱정마시오. 어부인의 명령인데 어길 리 있겠습니까? 한 끼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
중례는 그렇게 소비를 안심시키고 이튿날 개성으로 떠났다. 그리고 개성에 도착하자마자, 비장의 적취를 해결할 약재를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개성에는 이미 필요한 약재가 동이 난 상태였다. 역병이 번진 뒤로 한약방마다 약재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재물깨나 있는 부자들이 역병에 좋다는 약은 모두 구입해 갔다는 것이었다. 별 수 없이 중례는 아내 소비가 챙겨준 약재에서 쓸 만한 것들을 골라내고, 또 역병에 쓸 약재들 속에도 골라낸 것을 섞어 탕약을 달여 볼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약재 꾸러미를 풀어서 살폈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이것들은 모두 비장의 적취에 듣는 약재들이 아닌가?”
그때서야 중례는 아내 소비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비가 달인 탕약을 먹은 지도 이미 1년도 넘은 상태였다. 소비는 무려 1년 전부터 중례의 비장에 적취가 생긴 것을 알고 침과 뜸을 뜨고 탕약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소비는 그저 몸을 보하는 탕약이라고만 했었다. 탕약의 재료가 된 약재를 본 적이 없으니, 그저 아내 말만 믿고 매일 아무 생각 없이 탕약만 받아 마셨다. 그런데 그 탕약들이 중례의 발병을 늦추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례는 아내의 정성에도 감탄했지만, 그녀의 진맥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중례가 자신의 병증을 알아낸 것이 불과 보름 남짓 되었는데, 이미 일 년 전에 병증을 파악하고 탕약까지 달여 바쳤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간 내가 맞은 침과 뜸도 모두 비장의 적취 때문이었단 말인가?”
사실, 침술과 뜸에 있어서는 조선의 어느 의원도 아내 소비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중례 역시 침술과 뜸은 그녀에게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약을 쓰는 데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아내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싸준 약재를 살펴보고는 자신이 아내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가 싸준 약재 속에는 중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약재가 몇 개 들어 있었다. 그 약재들의 조합을 살펴보니, 자신의 처방보다 확실히 한 수 위였다.
중례가 의원으로 살아온 지도 어언 삼십 년이 넘었다. 그 삼십 년 동안 중례는 늘 아내 소비의 의술을 능가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소비는 아내이기 이전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중례는 단 한 번도 소비에게 이겨본 기억이 없었다.
<태산요록>을 편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 재위 15년(1433년)에 주상이 임산부와 소아에 관한 책을 편찬하라 하였고, 그래서 이듬해에 엮어 낸 것이 <태산요록>이었다. 그런데 <태산요록>의 내용엔 소비의 의술이 상당수 반영되었다. 중례는 고전방서를 정리하고 요약하는 수준에서 편찬하려 했는데, 소비가 그 내용을 보더니, 고전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보완하였다. 덕분에 산부의 임신, 분만, 산전·산후에 필요한 사항과 초생아 및 유아들의 양호와 치료에 관한 필요한 사항들을 정연하고 알기 쉽게 서술할 수 있었다.
“정말 세상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고 하더니, 이것이 모두 부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소?”
<태산요록>으로 세종의 칭찬을 잔뜩 듣고 술까지 한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온 중례가 소비에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더욱 의술에 매진하여 아내를 능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중례는 아내가 준 약재를 달이는 내내 계속 웃음이 쏟아졌다. 왜 그렇게 웃음이 쏟아지는지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런 말을 쏟아냈다.
“정말 타고난 천재는 결코 이길 수 없는 법이야, 암 그렇고말고.”
중례는 아내의 탕약을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즐겁게 먹은 덕에 개성에 퍼진 역병을 무사히 막고 별 탈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제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 해도 하늘이 정한 명줄 앞에선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듬해인 임신년(1452년) 봄에 한성을 덮친 역병을 막다가 부부가 차례로 감염되어 죽었으니 말이다.
왕(문종)은 온 몸을 바쳐 역병을 막다 죽은 노중례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부의를 내리고 특별히 졸기를 짓게 하였는데,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의관의 졸기다. 그 내용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고(故) 행 상호군 노중례의 집에 쌀·콩과 관곽을 부의로 내렸다. 노중례는 의원을 직업으로 삼아 의술에 정통하여 근세(近世)의 의원으로서는 그에 비할 이가 드물었다. 성품이 겸손하고 공손하여 내의(內醫)가 된 지 수십 년 동안에 처음부터 끝까지 경신(敬愼)하였으며, 두 임금에게 은혜를 받아 상을 받은 것이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세상의 의원들은 대개 미천한 데서 일어나서 관질(官秩)이 겨우 높아지면 지기(志氣)가 갑자기 교만해져서 비록 사대부 집안에서 초청하더라도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반드시 높은 값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노중례는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약을 물으면 반드시 곡진하게 가르쳐 주면서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노중례를 어질다고 여겼던 것이다.
- 끝 -
그동안 이 소설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에필로그
소설 <세종대왕의 주치의 노중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발췌하여 싣는다. 다음의 실록 기록들은 소설 속 상상력의 세계를 완전히 걷어내고 남은 그들의 미미한 흔적들이다. 이 흔적들을 참고하면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사족으로 남긴다
1. 탄선에 관한 기록
세종 3년(1421년) 12월 21일
서활인원 제조 한상덕이 계하였다.
"내년 봄에 성을 쌓을 군사가 많이 모이면 반드시 역려(疫癘, 역병)가 있을 것입니다.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초기에 비로소 도성을 쌓으매, 역려가 크게 일어났는데, 화엄종의 중 탄선(坦宣)이 여질(癘疾)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였습니다. 지금 탄선이 경상도 신령에 있사오니, 역마로써 불러 올려, 그로 하여금 구호하기를 원합니다.“
세종 4년(1422년) 1월 15일
비로소 도성을 수축하였다. 태상왕은 도총제 권희달을 보내고, 임금은 총제 원민생을 보내어 술을 내리어 제조를 태평관에서 위로하였다. 숙청문과 창의문 두 문을 열어 군인들의 출입하는 길을 통하게 하고, 도성의 동쪽 서쪽에 구료소 네 곳을 설치하고, 혜민국 제조 한상덕에게는 의원 60명을 거느리고, 대사 탄선(坦宣)에게는 중 3백 명을 거느리고 군인들의 병들고 다친 사람을 구료하도록 명하였다.
2. 노중례에 관한 기록
세종 22년(1440년) 6월 25일
임금이 말하였다.
"의술은 인명을 치료하므로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 심오하고 정미한 것을 아는 자가 적다. 판사 노중례(盧重禮)의 뒤를 계승할 사람이 없을까 염려되니, 나이 젊고 총명 민첩한 자를 뽑아서 의방(醫方)을 전하여 익히게 하라."
문종 2년(1452년) 3월 11일
노중례는 의원을 직업으로 삼아 의술에 정통하여 근세의 의원으로서는 그에 비할 이가 드물었다. 성품이 겸손하고 공손하여 내의가 된 지 수십 년 동안에 처음부터 끝까지 경신(敬愼)하였으며, 두 임금에게 은혜를 받아 상사(賞賜)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3. 소비에 관한 기록
세종 22년(1440년) 4월 10일
임금이 말하였다.
"중궁(中宮)이 일찍이 풍병을 앓았는데, 온천에 목욕한 이후로는 전의 병이 아주 나았으니 이것은 목욕한 효험이고, 또한 의원과 의녀가 약을 먹인 공효이다."
그리고 드디어 대호군 양홍수와 판전의감사 노중례에게 내구마(內廐馬) 각각 한 필씩을, 의녀 소비(召非)에게 쌀 여섯 섬을 주었다.
역사서와 역사소설의 근본적 차이는 허구의 유무가 아닐까 싶다. 비록 역사 소설 속엔 허구가 사실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때론 허구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일 때도 많다. 이 소설의 허구 역시 마찬가지다. 그 허구 속에서 역사의 진미를 더 진하게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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