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장제 (3)

이현철이 회장실을 나가자 이구억은 사장이자 아들인 이기영을 불렀다.
호텔에서 손님을 만나던 이기영은 이구억의 호출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저 왔습니다. 회장님.”
이기영이 긴장해서 서 있었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이기영은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사춘기 때 한 번 반발했다가 심한 체벌을 받았다.
그 후 이기영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았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라면 가고, 정해준 여자와 결혼하고, 영업 현장에서 일하라면 일했다.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첫 아이를 낳자 임원으로 승진했고, 둘째 아이를 낳고 사장이 되었다.
사장이 되어서도 이구억의 눈치를 살피며 일했다.
회사를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먼 훗날을 기약하며 참았다.
“거기 앉아라.”
“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흔치 않은 아버지의 칭찬을 들으니 이상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사장직을 내려놓고 편히 쉬거라.”
예기치 않은 말에 이상철은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깜짝 놀랐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기영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물어보았다.
“너는 경영자 자질이 없어. 생각해 봐라. 무엇 하나 네 뜻대로 한 게 있냐? 시키는 대로 하며 살았지. 그런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다.”
회장의 말이 틀리지는 않는다.
이기영은 이구억의 뜻대로 살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탁자 밑에서 이기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길들여진 짐승처럼 두려움이 앞섰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 뜻대로 하지 않은 건 아버지 뜻에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이기영이 반박했다.
“그래서 리더의 자질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기영은 억울했고 화가 났다.
“사장질이 뭐가 좋냐. 풍광 좋은 곳에 살면서 네가 좋아하는 그림이나 실컷 그려라.”
어렸을 때 이기영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어렵사리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가 어린 나이에 쫓겨나다시피 미국으로 유학 가 경영학을 전공하고 MBA 과정을 마쳤다.
‘그래 놓고 이제 와 그림이나 그리라고?’
이기영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제 후임으로는 누구를 생각하십니까? 외부에서 전문가를 들이시려고요?”
“왜 내 회사를 남에게 맡기냐. 상철이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아들이 사장이 되면 이기영은 물러나야 한다. 남은 자리는 회장뿐인데 이구억은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상철이는 아직 어립니다.”
“어려도 호랑이 새끼다. 늙은 개보다 낫다.”
이구억이 자신을 개에 비유하며 이죽거렸다.
“알겠습니다.”
“네 아들이 사장이 되니 너로서도 나쁠 것 없다. 네가 유일하게 잘한 일은 똑똑한 자식을 낳은 것이다.”
“가보겠습니다.”
닫힌 회장실 문손잡이를 잡고 이기영은 잠시 서 있었다. 현기증이 밀려왔다.
“사장님 어디 안 좋으세요?”
손잡이를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기영을 보고 비서가 놀라 물었다.
“아냐, 괜찮아.”
이기영은 비틀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걸으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이상철을 편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철은 아버지를 똑 닮았다.
잔인한 성정이나 화가 나면 미친놈처럼 광기를 폭발시키는 것까지.
이상철이 어렸을 때 집 정원에 길고양이들이 자주 나타났다.
이상철은 막대기를 들고 쫓아다니며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고양이를 패 죽였다.
‘그 아이가 사장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다.’
사장에서 물러나더라도 한때나마 자신을 위해 일했던 직원들을 그런 상황에 부닥치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을 닮은 아들은 이현철이었다.
어려서부터 인자하고 온화했다.
동물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랑했다.
사장실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던 이기영이 이현철을 불렀다.
“회장님이 상철이를 사장 자리에 앉히려 한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기영은 이구억과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말도 안 됩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젊으신데 그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하라니요.”
“내가 물러나더라도 상철이가 사장이 되면 안 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할 아이다. 현철아, 네가 사장이 돼야 한다. 대책을 세워라. 아버지가 돕겠다.”
연말 결산이 마무리되자 공격이 시작됐다.
회사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이상철의 무리한 약품 인수로 그걸 수습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을 썼기 때문이다.
이구억이 이현철을 회장실로 불러 결산자료를 내던지며 말했다.
“내가 회사를 세운 이래 적자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상철이가 저지른 일 때문에 비용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변명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그 아이가 드링크를 만들어서 그나마 이 정도를 유지한 거야.”
“스타트-업은 문제가 많은 제품입니다. 회사에 치명타를 안길 수도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눈도 못 마주치던 아이가 꼬박꼬박 말대꾸하자 이구억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현철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재떨이가 벽에 부딪히며 담배꽁초가 사방으로 튀었다.
별도 환기 장치를 만들어 사무실에서도 피울 정도로 이구억은 쿠바산 시가를 좋아했다.
“리더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사내새끼가 변명이나 늘어놓고.”
이구억이 씩씩거리다 기침을 했다.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작년에 적자 본 만큼을 금년 경영 목표에 더해 달성하겠습니다.”
“그게 책임지는 거야? 미루는 거지?”
“리더라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회사를 경영해야지 단기 실적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가!”
이번에는 회장 명패가 날아왔다.
이현철이 슬쩍 피하자 목표를 잃은 명패가 문에 부딪혀 쿵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밖에서도 소리가 들렸을 텐데 이구억의 광기가 폭발할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직원들은 모른 체 하고 있었다.
“나가기 전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책임보다 앞서는 것이 공정입니다. 공정해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겁니다.”
할 말을 다 한 이현철이 문을 열고 나갔다.
회장실에서 나온 이현철의 얼굴을 보는 직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현철은 강해졌다.
그 시각 영웅은 권모수를 만나고 있었다.
연구소로 찾아가 안내원에게 용건을 말하고 휴게실에서 기다리니 권모수가 웃으며 나왔다.
“어쩐 일이세요? 평일에 찾아오고.”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영웅이 스타트-업 한 박스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뭐,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우리 사이에.”
“마시라고 드리는 거 아닙니다. 연구하라고 드리는 겁니다.”
“연구요? 뭘?”
“피시방에서 사망자가 또 발생했습니다. 옆에 스타트-업 빈 병 10개가 있었고요. 정밀 분석을 해주세요. 비용은 드리겠습니다.”
“돈보다... 막막하네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성분표를 보면 평범한 물질들인데.”
“뇌와 신경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연구해 주세요. 그 분야는 연구원님이 전문가 아닙니까.”
권모수는 동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뇌와 신경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하기는 하네요.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작용기전을 살펴보죠. 그런데 연구할 데가 마땅치 않네요. 여기는 나노 분야 장비만 있어서.”
고민하던 권모수가 말했다.
“모교 교수님께 도움을 청해야겠네요.”
권모수는 교수에게 찾아가 휴일에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성분을 분석해보니 성분표와 다르지 않았다.
유사한 드링크제와 비교를 해보았다.
다양한 아미노산과 에페드린 화합물이 들어있는 게 두드러진 차이점이었다.
에페드린 화합물은 중추신경 흥분제에 속하는 약물이다.
카페인과 함께 사용하면 집중력을 높이고, 에너지 수준 및 대사율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합은 심혈관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다음으로 아미노산이다.
특정 아미노산은 카페인 지속 시간을 늘리는 한편 내성을 높일 수 있다.
내성이 높아지면 중독될 가능성도 커져 많이 마시면 카페인으로도 사망할 수 있다.
‘카페인 독성’이라고 알려진 이 증상은 발작, 환각, 구토를 일으키거나 심각한 경우에는 심장 부정맥,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
개인의 민감도에 따르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시간에 100잔 정도를 마셔야 카페인 독성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아미노산의 작용으로 카페인이 배출되지 않고 신체에 축적된다면...
여기까지 생각한 권모수는 영웅에게 전화해 사망 전 상태가 기록된 자료나 부검 자료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영웅은 자료를 구해보겠지만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말했다.
권모수와 전화를 끊은 영웅은 차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 스타트-업 마시고 사망한 분 조사 자료 가지고 있어?”
“그건 왜 찾는데?”
“확인할 게 있어서.”
“없어. 그건 극비문서로 분류돼 있어서 연구소장님이나 부사장님 이상만 볼 수 있을 거야.”
“그래. 내가 그 문서를 찾았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줘.”
“알았어.”
심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차미나가 목소리를 낮춰 약속했다.
잠시 고민하던 영웅은 한숨을 쉬며 은밀한에게 전화했다.
“부탁할 게 있습니다.”
내용을 들은 은밀한이 말했다.
“저야 돈 벌어서 좋지만. 직장 상사라면서요. 직접 찾아가 보여달라고 하세요.”
“사정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이번에 정보 줄 때 요청하신 자료를 포함해 물품 보관함에 넣어달라고 하면 되죠?”
“네. 그렇게 해주세요.”
다음날 출근하는 부사장 차를 오토바이가 막아섰다.
기사도 이제 알고 차를 멈췄다.
“이번에는 추가 요청 자료가 있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스타트-업을 마시고 사망한 사람의 조사 자료와 부검 자료를 요청했다.
‘왜 이 자료를 요청하는 걸까?’
회사에 도착한 부사장은 서랍에서 사진을 꺼내보았다.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긴 태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사람이 물품 보관함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얼굴을 가렸어도 부사장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강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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