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1)

영웅을 바라보던 이현철이 한마디 툭 던졌다.
“문제가 생겼네.”
“네? 어떤 문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비밀을 지켜야 하네. 그러리라 믿지만.”
“네.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이현철은 회장이 사장을 강압적으로 퇴사시키고 그 자리를 이상철에게 물려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충격적인 이야기였지만 영웅은 놀라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니까.
이대로 진행되면 이상철이 사장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다.
“대책을 의논할 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불렀네. 그렇다고 부담 갖지는 말게. 이 자리에 있으니 마음 놓고 대화 나눌 상대가 없어서 부른 거네.”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전생에 이상철을 도와 이현철을 쫓아낸 사실이 미안했다.
“회장님은 어떻게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까?”
“분기 이사회에서 사장을 퇴임시키고 새 사장으로 상철이를 올릴 생각이네. 전년 매출이 적자를 기록했어. 명분으로 그걸 내세울 테고.”
이사회는 사내이사 5명, 사외이사 6명으로 구성돼 있다.
사내이사는 회장의 충복들로 구성돼 있고 사외이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이사회는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만든 제도지만 실제는 총수 일가의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내 편이야. 그리고 상철이를 사장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아 해.”
“그러면 우리 편 이사는 몇 명입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내이사 3명, 사외이사 2명 정도야.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면 어느 쪽으로든 마음을 바꿀 수 있고.”
현재로서는 이상철이 대표이사로 선임될 가능성이 크다.
“이사들을 설득해야겠네요.”
영웅이 말했다.
“사내이사와 사외이사 어느 쪽을 설득해야 할까?”
“둘 다 해야죠. 어느 쪽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니.”
대답을 들은 이현철이 믿음이 담긴 눈빛으로 영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어느 쪽이 설득하기 쉬울까?”
“사내이사 쪽입니다. 부사장님이 사장이 된다고 믿게 하십시오. 그러면 계속 회사에 남기 위해 부사장님 편을 들 겁니다.”
잠시 시간을 둔 다음 영웅이 말했다.
“부사장님이 사내이사를 맡으십시오. 사외이사는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할 수 있겠나?”
“일단 제가 먼저 만나보고 부사장님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세. 자주 연락해야 할 테니 이걸 쓰게.”
부사장이 새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지난번 도청 장치 때문에 혼이 나서... 자네가 아니었으면 그것도 모를뻔했네.”
“알겠습니다.”
영웅이 휴대전화를 챙겨 넣었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게.”
부사장이 가방을 내밀었다.
“열어보게.”
가방을 여니 서류 봉투와 돈이 들어있었다.
서류는 ‘사망 조사 보고서’와 ‘부검 결과서’였다.
“돈은 왜 주시는 겁니까?”
“나를 위해서 돈을 많이 쓰지 않았나?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사람에게도 돈이 들었을 거고, 앞으로도 사외이사 만나려면 돈이 필요할 걸세. 더 필요하면 전화하게.”
부사장 말이 맞다. 앞으로 돈이 더 들 수도 있다.
“네. 그럼, 꼭 필요한데 쓰겠습니다.”
가방을 닫아 옆에 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경영기획팀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나? 의논하기도 편하고.”
“아닙니다. 지금은 뒤에서 부사장님을 돕는 게 더 낫습니다. 이상철 소장이 견제하면 오히려 일이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제가 영업 쪽에 남아있는 게 유리합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게. 하지만 행동이 자유로워야 하니 내가 마케팅팀장에게 새로운 시스템 개발을 지시했다고 말해두겠네.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움직이게.”
“감사합니다.”
“날 위해 하는 일인데 내가 감사해야지. 일 이야기는 이만하고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오늘은 남은 술이나 마시세.”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물에 어룽거리는 불빛이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죽었다 되살아나도 인간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권력을 위해 부자간, 형제간에 싸우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해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출근하자 마케팅팀장이 회의실로 불렀다.
“부사장님께 들었어. 부사장님이 새로운 마케팅 시스템을 개발하라고 해서 외부 활동이 잦을 테니 배려해 주라고 하셨네.”
“네. 외국에서는 AI를 활용한 자동 마케팅, 판매 시스템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시스템을 업무에 접목할 방법을 연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AI 업체 인수도 지시하셨기 때문에 당분간 외부 활동을 할 겁니다. 부서 일이 바쁜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강 파트장이 잘 관리해서 디지털마케팅 파트는 알아서 돌아가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 그런데 내가 도울 일은 없나?”
부사장의 입김 때문인지, 영웅이 일하는 모습을 봐서인지 새 팀장은 영웅에게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부하직원이 부사장의 지시에 따라 직접 움직인다면 소외되는 느낌이 들어 서운할 것이다.
“제가 정리가 되면 팀장님께 중간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때 필요한 사항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실행은 마케팅팀 이름으로 할 계획입니다.”
마케팅팀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팀장 주도하에 한다는 뜻이었다.
영웅의 말을 들은 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겠네. 자질구레한 것까지 보고할 필요 없으니 자유롭게 움직이게. 실행할 때 되면 꼭 알려 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귀가 통하는 사람이었다.
AI 시스템 활용은 미래에는 일상화된 경영 방법이다.
영웅은 이사회 업무가 끝나면 팀장 주도하에 AI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영웅은 부사장에게 받은 사외이사 6명의 리스트를 읽어 보았다.
이름 옆에 〇, △, X 표시가 돼 있었다.
〇은 우리 편, △는 중립, X는 회장 편이란 뜻이었다.
각 표시가 2개씩 돼 있었다.
영웅는 〇을 제외하고 △와 X, 4명을 포섭할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로 만날 사람은 신영식이었다.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회장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영웅은 회사 일로 만나 뵙고 싶다고 말해 약속을 잡았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신영식은 왜 찾아오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벌써 이번 이사회 안건에 ‘사장 해임과 선임의 건’이 포함돼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신영식은 검사장 출신으로 작은 로펌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대쪽 같은 성격으로 재벌 비리를 수사하다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적당히 무마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찰청을 나온 이후로는 주로 재벌을 변호하며 살고 있고 대민제약의 사외이사도 겸하고 있다.
세익스피어는 ‘썩은 백합꽃은 잡초 썩는 것보다 더 심한 악취를 풍긴다’고 했다.
영웅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젊어서는 운동권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가 권력을 쥐자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사는 사람을.
‘신영식은 썩은 백합꽃일까?’
박앤신 로펌은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형 로펌처럼 화려한 장식을 하지 않아 마음에 들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돈을 밝힐 수도 있었다.
‘대놓고 돈을 요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악의 결과를 맞더라도 영웅은 돈으로 매수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박앤신 로펌’이라고 쓴 유리문을 여니 일반 사무실처럼 10여 명의 사람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영웅을 본 여사원이 밝은 얼굴로 물었다.
“신영식 변호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리로 오게.”
안쪽 사무실 문이 열리며 머리가 하얗게 세고 눈빛이 날카로운 남자가 말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목소리나 움직임이 젊은 사람 같았다.
영웅은 신영식을 향해 걸어가 인사했다.
신영식이 말없이 소파를 가리키더니 사무실 문을 닫았다.
변호사 자격증과 책만 꽂혀있는 소박한 사무실이었다.
“어떤 일로 왔나?”
“이번 이사회 안건에 사장 해임과 선임의 건이 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영웅은 솔직하게 말했다.
“누구 편인가?”
“이현철 부사장 편입니다.”
“왜 이현철 부사장 편을 들지?”
단순하지만 핵심을 물었다.
“이현철 부사장이 회사를 바르게 운영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대답을 들은 신영식이 고개를 저었다.
“회사의 목적이 무엇인가?”
“흔히 영리 추구라고 말하지만 바르게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다시 고개를 젓는 신영식을 본 영웅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돈이 없으면 저 사람들 월급도 못 줘.”
신영식이 사무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 회사를 바르게 운영할 수 있겠나?”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며 부드럽게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은 그와 달리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린 바르게 운영한다는 뜻은 바르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특히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약을 만드는 제약회사는요.”
영웅의 말을 신영식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거라면 식약처나 수많은 기관에서 검토하고 있지 않나. 법 때문이라도 바르게 만들 수밖에 없지.”
“법망을 빠져나갈 방법을 연구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기업가도 많습니다.”
“이상철이 그렇다는 이야기인가?”
영웅은 가져온 자료를 신영식에게 보여주었다.
약품 인수에서 약값 올리기, 횡령, 도청, 살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정리한 자료였다.
“이게 사실인가?”
“모두 근거 자료가 있습니다. 확인하기를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이런 내용은 사외이사라도 모를 수 있다.
회장이 관련자들을 입막음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매출을 올리고 있는 스타트-업 강장제도 문제가 있습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강장제와 관련해 3명이 사망했습니다. 현재 정밀검사 중에 있습니다.”
영웅의 말을 들은 신영식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만 듣고 믿을 수는 없네. 흑색선전일 수도 있으니까. 근거를 제시하게.”
검사 출신답게 근거를 요구했다.
영웅은 가방에서 증거 자료와 사진, 동영상을 꺼내 건네주었다.
자료를 보던 신영식의 표정이 참담하게 변해갔다.
고개를 든 신영식이 영웅에게 말했다.
“이상철을 사장으로 선임하지 않겠네. 그렇다고 이현철을 밀겠다는 뜻은 아니야. 그가 회사 운영을 제대로 할 사람인지 알아야겠네.”
“죄송하지만 너무 막연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변호사님이 원하시는 회사 모습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전달하고 믿으실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습을 보며 신영식이 말했다.
“나는 학생 때 운동권이었네. 노동자로 취업해서 조합을 만들어 쟁의를 일으켰지. 그러다 회사가 망해 수십 명의 사람이 실직했어. 실직이 가난보다 고통스럽다는 것을 그때 알았지. 젊은 사람에게는 보수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회사의 근본 목적은 영리 추구와 고용 창출이야. 여력이 되면 주주 환원도 해야겠지. 세간에서는 내가 재벌을 옹호하는 변절자라 말하지만 내게는 명분보다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이 중요해.”
“변호사님 뜻 잘 알겠습니다. 이현철 부사장에게 전해 영리 추구, 고용 창출 계획서를 작성해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가치가 같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네.”
사무실을 나온 영웅은 이현철이 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신영식 변호사의 이야기를 전했다.
“내 생각과 같으신데. 경영계획서는 작성돼 있으니 내가 직접 찾아가서 말씀드리겠네. 수고했고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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