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실험 (4)

인체 실험 장소를 조사해달라고 하자 은밀한이 말했다.
“지난번 식품회사처럼 침투는 못 합니다.”
“네. 어떤 회사인지, 누가 소유주인지 등 행정적인 것만 알아봐 주시면 됩니다.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드론도 띄우지 마세요. 경비가 삼엄해서 들킬 염려가 있습니다.”
걱정해 주는 영웅을 은밀한이 미소 띤 표정으로 바라봤다.
“피고용인을 생각해 주는 그 태도 마음에 듭니다.”
“제게 은밀한 씨는 피고용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동료지요. 함께 악당을 물리치는 동료.”
영웅이 띄워주었더니 은밀한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번에 돈 많이 들여 최신 장비를 샀는데 한번 실험해 봐야겠네요.”
“뭔데요?”
“야간 투시경의 원리를 이용한 카메라인데 망원 렌즈가 달려있어 멀리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미국 특수부대에 납품하는 물건인데 어렵게 구했습니다.”
“커튼으로 가려도 안을 찍을 수 있나요?”
“정확한 모습을 찍을 수는 없어도 열 화상 기능이 있어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형태는 찍을 수 있습니다. 동영상 촬영도 가능하고요.”
“비싸게 주고 샀겠네요?”
“비즈니스를 하려면 투자는 기본이죠. 그리고 제가 특수부대 출신이라 최신 기기 마니아입니다. 몸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죠.”
다행히 은밀한과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
사흘 후 은밀한이 조사한 내용을 가지고 영웅과 만났다.
“제약 회사로 등록돼 있습니다. 소유주이자 대표는 구기영이라는 사람인데 YG식품과 마찬가지로 바지 사장입니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다 식당을 차려 망하고 뜬금없이 R&D란 이름의 제약 회사를 차렸는데 출근도 하지 않습니다.”
“건물이 제약 회사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맞습니다. 원래는 전문대학교였습니다. 학생 수가 줄어 폐교한 것을 R&D제약에서 사서 개조했습니다. 그리고.”
은밀한이 가방에서 사진을 꺼내 내밀었다.
봉고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었다.
“영웅 씨 추측이 맞았습니다. 모두 외국인입니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불법 체류자들이겠죠.”
은밀한이 품에서 사진을 꺼냈다.
“이건 투시 카메라로 건물 안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람이 하얗게 보였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있었다.
“2층 방들을 촬영한 영상입니다.”
마치 고문실 같았다.
사지를 묶여 발버둥 치는 사람, 욕조에 들어가 있는 사람, 두 팔을 흔들며 소리치는 사람...
731부대의 마루타 생체 실험을 보는 것처럼 끔찍한 장면이 이어졌다.
“이건 3층 방들을 촬영한 영상입니다.”
3층은 2층과 달랐다.
3층에 있는 사람들은 온갖 무기를 가지고 앞에 있는 사람을 공격했다.
“어, 칼로 찌른 것 같은데 쓰러지지 않네요.”
“실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처럼 생긴 인형입니다.”
“왜 이런 훈련을 시킬까요?”
“이런 훈련을 시키는 건 뻔한 거 아닙니까?”
영웅도 은밀한도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지금 세상에 대한민국에서 용병이나 암살 부대를 만든다는 겁니까?”
“하는 짓을 봐서는요. 말 잘 듣는 조폭을 만드는지도 모르지요. 4층도 만만치 않습니다.”
4층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공격 훈련을 하지 않았다.
남자들과 함께 여러 자세로 뒤엉켜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 시키네요.”
영웅이 동영상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모르죠. 더 많은 짓을 시키고 있는지도. 이건 하루 촬영분이니까요.”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동영상을 끄고 가방에 장비를 챙겨 넣은 은밀한이 말했다.
“배후는 조폭 같습니다. 남자들 훈련하는 내용이 폭력조직 키우는 거잖아요. 여자들은 술집 종업원으로 쓰려는 것 같고. 실제 마약으로 중독시켜 사람을 조종한 사례도 있습니다.”
은밀한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해가 갔다.
생각해 보면 마약보다 좀비균이 효과적이다.
마약에 중독되면 정신을 통제하기 어렵고 신체 능력도 떨어지지만 좀비균은 다르다.
정신이 멀쩡해도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할 수도 있다.
실제, 영웅이 그런 상태에서 자살 당했으니까.
“침투는 꿈도 꾸지 마세요. 계단마다 두 명씩 보초가 있습니다. 들어갔다가 잡히면 바로 사지가 묶여 인체 실험당할 수도 있습니다.”
은밀한이 주의를 줬다.
“실험에 참가한 불법 체류자를 만나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낼 수 없을까요?”
“영웅 씨가 만나본 사람도 맛이 가서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면서요.”
“제정신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불법 체류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확보할 수도 있고요.”
잠시 생각하던 은밀한이 말했다.
“친하게 지내는 베트남 동생이 있습니다. 그 애를 시켜 정보를 더 캐보겠습니다. 실험에는 참여시키지 않을 겁니다. 너무 위험해요.”
“네. 저도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저녁에 은밀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가 말한 베트남 동생 있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듣더니 실험에 참가하겠다고 합니다.”
“아니, 왜요?”
“친한 친구가 한국에서 임상실험을 받다가 행방불명됐다고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듣더니 이제 내막을 알겠다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위험하다고 말하고 자제시켜요.”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습니다. 걔도 특수부대 출신이고 친구들이랑 베트남 조폭 하나 깨부수고 한국으로 도망쳐 온 아이입니다. 같이 도망쳐 온 친구 하나가 행방불명됐고요. 지금 친구들 불러 모으고 난리가 났습니다.”
“섣불리 건드리면 지난번 YG식품처럼 건물을 폭파하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친구분이 살해당할 수도 있고요.”
“하, 젊은 놈들은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 문제에요. 알겠습니다. 제가 자제시켜 보겠습니다.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영웅이 다시 은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돈을 주겠다고 하세요.”
“그러면 말을 듣겠네요. 돈 좋아하는 얘들이니까. 지출이 많아지는데 괜찮겠어요?”
“지원받을 데가 있습니다.”
“잘됐네요. 뭘 시킬까요?”
“먼저 바깥쪽부터 알아가죠. 임상 실험자를 모집하는 사람과 방법, 임상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 명단.”
“실험 참가자들이 불법 체류자들이면 알려 주길 꺼릴 텐데요?”
“공공기관이 아니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세요. 친구처럼 행방불명되거나 살해되거나 술집에 팔려 가는 것을 막는 거라고 설득하세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의리 빼면 아무것도 없는 얘들이라 배신하면 눈이 회까닥 돌아갑니다.”
“그럼요. 그리고.”
영웅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뭡니까?”
“실험에 참가하겠다고 하면 굳이 막지 마시고 제게 알려 주세요. 다만 세 명 이상이 한꺼번에 들어가 제정신을 잃고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고 하세요. 미리 알고 경계하면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을 겁니다. 위험수당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은밀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뭘 알아내려는 거죠?”
“실험 방법, 운영하는 사람을 찍은 사진, 무엇보다 실험 이유, 관련자 명단을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아낼 수 있는 만큼만 알아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은밀한과 이야기를 마친 영웅은 권모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독약을 만들 수 있습니까?”
“해독약이라뇨?”
“약물로 최면 효과를 강화해 조종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약물을 해독할 수 있을까요?”
“묶어두면 됩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대부분 저절로 배출되는 성분이니까요.”
“바로 해독할 수는 없나요?”
“만들어 보겠습니다.”
“만들면 알려 주세요.”
“왜요? 지난번 그분 해독시키려고요.”
권모수가 함께 찾아가 만났던 사람을 말했다.
“그분도 그분이지만 이번에 새로 실험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리세요. 위험한 실험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말리는데도 참여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말씀드릴 테니 일단 해독약부터 만들어 주세요.”
“해보겠습니다. 효과를 확인하려면 지난번 그분을 다시 만나야겠네요.”
영웅은 은밀한과 함께 베트남인 트란을 만났다.
체구가 크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한국말을 잘한다고 은밀한에게 들었다.
트란이 종이를 내밀었다.
“임상실험 대상자를 모집하는 놈들 이름과 사는 곳이다.”
베트남, 필리핀, 태국... 나라마다 한 명씩 모집책을 두었는지 국적이 다양했다.
“동족을 팔아먹는 놈들이라 잡아다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밀한이 형이 참으라고 해서 참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돈을 건넨 영웅이 은밀한에게 물었다.
“그런데 존댓말은 배우지 않았나 봅니다.”
영웅의 말을 들은 은밀한이 말했다.
“마음에 든 사람에게만 존댓말을 씁니다.”
“트란, 내가 어떻게 해야 마음에 들겠어?”
영웅이 묻자 돈을 세어본 트란이 말했다.
“마음에 듭니다. 존댓말 씁니다.”
“역시, 돈이 최고예요.”
은밀한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트란이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임상실험에 참여한 베트남 사람 명단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은 조사하고 있습니다.”
신고할까 우려해서인지 주소는 적혀있지 않았다.
“지금 치료 약을 만들고 있어요. 치료약이 완성되면 트란이 나눠주세요.”
치료 약을 만든다고 하자 잠시 후 이해한 트란이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영웅이 은밀한에게 물었다.
“트란과 친구들, 다섯 명이 한꺼번에 임상실험에 참여할 겁니다.”
“모집하는 놈을 협박해서, 다 이야기됐어요.”
트란이 끼어들며 말했다.
“제가 3발까지 쏠 수 있는 테이저건을 다섯 명에게 나눠줄 겁니다.”
힐끗 영웅을 쳐다본 은밀한이 말했다.
“물론, 테이저건을 살 돈은 영웅 씨가 주셔야 합니다.”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마다 실험을 진행하는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약을 맞기 전에 테이저건으로 신속하게 진압해 묶고.”
잠시 말을 멈춘 은밀한이 트란에게 말했다.
“밖에 소리 나지 않게 테이프로 입 잘 막아야 한다.”
“걱정마라. 나 특수부대 출신이다.”
반말하는 트란을 잠시 쏘아본 은밀한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다음 복도에서 경계를 서는 놈들을 제압하며 1층으로 내려옵니다.”
“왜 1층으로 갑니까?”
“거기에 사무실이 있습니다. 책임자도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은밀한이 야간 투시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낮은 포복으로 가까이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무르팍 다 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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